흑석동 본당

黑石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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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경의 흑석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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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경의 흑석동 성당.

서울대교구 소속 본당.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 175-3번지 소재. 1954년 5월 29일 도림동 본당 소속 흑석동공소에서 명수대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1996년 흑석동 본당으로 개칭하였다. 주보는 평화의 모후. 관할 구역은 흑석 1~3동과 본동. 〔교 세〕 1954년 440명, 1960년 2,880명, 1965년 4,386명, 1971년 4,500명, 1976년 4,585명, 1980년 4,696명, 1985년 5,901명, 1990년 5,577명, 1995년 5,409명, 2000년 5,586명, 2003년 5,156명. 〔역대 신부〕 초대 이경재(李庚宰) 알렉산데르(1954. 5~1961. 4), 2대 조인환(曹仁煥) 베드로(1961. 4~1964. 8), 3대 유영도(劉永道) 디오니시오(1964. 8~1966. 12), 4대 김옥균(金玉均) 바오로(1966. 12~1971. 6), 5대 박병윤(朴炳閏) 토마스(1971.6~1976. 6), 6대 나상조(羅相朝) 아우구스티노(1976. 6~1981. 6), 7대 이종환(李鍾煥) 미카엘(1981. 6~1986. 8), 8대 정광웅(鄭光雄) 요셉(1986. 8~1991.9), 9대 최익철(崔益喆) 베네딕도(1991. 9~1996. 10), 10대 전창문(田昌文) 가브리엘(1996. 10~2001. 10), 11대 안상인(安商仁) 요셉(2001. 10~현재) .
흑석동 지역에 신자들이 거주하게 된 것은 1930년대 중반 무렵부터이다. 직장이나 거주지 관계로 또는 새로운 생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이주해 온 이들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으나, 당시 이 지역을 관할하던 약현(현 중림동) 본당이 한강 건너편에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성당에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후 이 지역의 관할이 약현 본당에서 영등포(현 도림동) 본당으로 바뀌었지만, 교통은 더 불편해졌다. 이처럼 신자들이 본당의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불편하고 또 신자수가 점차 증가하게되자, 영등포 본당의 박일규(朴一圭, 안드레아) 신부는 1945년 가을 흑석동 공소를 설립하여 공소 회장 이의경(李義景)의 집에서 공소 예절을 가졌다. 교세가 점차 확장됨에 따라 신자들은 이후 1949년 초 은로국민학교(현은로초등학교) 맞은편의 부지(1,050평)를 매입하면서 본당 승격 운동을 전개하였고, 마침내 교구에서도 신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흑석동 본당을 설립할 것을 결정하고 1950년 5월 유수철(柳秀徹, 도미니코) 신부를 파견하여 본당 설립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유 신부는 교우 위정헌(韋正憲)의 집 2층에 거주하면서, 본당 자치 위원회를 구성하여 1946년에 조직한 공소 강당 신축 기성회와 병합하여 흑석동 성당 건립 기성회를 출범시키면서 본격적으로 본당 승격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한 달 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흑석동 공소는 와해되고 말았다.
흑석동 공소에 다시 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교우 가정들이 피난지에서 돌아온 1953년 초부터였다. 그해 봄 성당 건립 기성회를 재조직하는 것을 시작으로 주일학교가 재건되고 부인 전교반 등이 조직되었다. 그러던 중 1954년 1월 미군 군사 물자 원조처(A.F.A.K.)에서 사용하던 군수 물자를 복구 건설에 제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와병 중이던 이경재 신부의 부탁을 받은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 신부와 공소 신자들은 성당 건립을 위하여 미 8군 민사처에 원조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이와 함께 이들은 이전에 구입하였던 은로국민학교 뒤편 부지가 성당 부지로는 부적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새 성당터를 물색한 결과, 서울 대목구에서 운영하던 '한영 방직' 의 소유지(현 성당 부지)를 새 성당 터로 결정하고 서울 대목구에 요청하여 사용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4월에는 미 8군 민사처의 원조 승낙 통지를 받고 본격적으로 성당 건설을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였다.
1954년 5월 29일 마침내 명수대 본당이 설립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이경재 신부가 부임하였다. 아직 성당이 마련되지 않았으므로 이 신부는 성당 신축 부지 앞에 있던 2층 건물을 빌려서 위층은 성당으로, 아래층은 사제관 겸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1954년 6월 성당 건립 기성회를 성당 신축 위원회로 개칭하고 8월에 명수대 성당 기공식을 가졌다. 성당은 이듬해 5월에 완공되었으며, 7월에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55년 8월에는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이 창단되어 서울교구 최초로 레지오 마리애가 설립되었고, 1959년에는 사제관 별관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사제관 건물 뒤편 개인 주택을 구입하였다. 같은 해 3월에는 3개의 성당 종 축성식을 가졌으며 평화의 모후꾸리아를 설립하였고, 8월에는 김세중(金世中)이 조각한 예수 성심상의 봉헌식을 가졌다. 이어 1960년 2월에는 본당 주보인 <검은 돌>을 창간하였으며, 이 무렵 평신도 사목회도 조직되었다.
1961년 4월에 부임한 2대 주임 조인환 신부는 가톨릭 청년회를 결성하고, 6월에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를 발족하여 그 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10월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 수도자를 요청하여 본당 사목을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 본당에 수녀원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파견된 수녀들은 수녀회 본원 수련소에서 생활하며 본당 활동을 하였다.
신자수가 계속해서 증가하자 3대 주임 유영도 신부는 본당 분할을 결정하고, 1966년 12월에 상도동 본당을 분리하여 상도1~2동, 노량진2동, 봉천동(신림동 일부 포함)을 이관하였다. 이어 4대 주임 김옥균 신부는 유영도 신부 때부터 추진하였던 유치원 사업을 이어받아 1967년 3월 성당 아래쪽에 건물을 짓고 명수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성당 앞 토지 일부를 매도하여 공사비를 마련한 후 사제관 신축 및 유치원 사무실의 증 · 개축 공사를 시행하였다.
1971년 6월 5대 주임으로 부임한 박병윤 신부는 부임과 동시에 사당동 본당을 분리하고 사당동과 방배동 일부, 남현동을 이관하였다. 그리고 본당 단체들의 활성화를 위하여 '새 바람 운동' 을 전개하고, 1971년 7월부터는 단체장 교육을 위한 꾸르실료 운동을 도입하였다. 또한 1973년 5월에는 유치원 옆에 가건물을 지어 유치원을 확장하였고, 9월에는 사무실 2층에 신자들의 친교 공간인 성모 회관(말씀의 방)을 완공하였다. 본당 분할도 계속되어, 1972년 1월에는 노량진 본당이, 1976년에는 반포 본당이 분할되는 등 명수대 본당은 총 4개의 자본당을 갖게 되었다.
6대 주임 나상조 신부는 1976년 8월 본당 내 구역과 반 조직을 개편하며 소공동체 활성화와 냉담자 회두를 위하여 노력하였고, 1978년 4월에는 사제관 1층에 도서실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본당 주보 <검은 돌>에 '시대의 위기' 를 연재하였고, 6월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 구호금 모금과 '조국의 평화와 교회 쇄신을 위한 기도회' 를 개최하였다. 11월에는 평신도 사목회를 개편하여 평신도 협의회로 재구성하였고, 1981년 3월에는 명수대 신용 협동 조합을 창립하였으며, 5월에는 성당 앞에 성모 동굴을 조성하고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1981년 6월 이종환 신부가 7대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본당 주보 <검은 돌>이 710호를 끝으로 <서울주보>에 통합되었다.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노후한 성당의 신축 문제였기 때문에, 1982년 3월 '건축 위원회' 를 구성하여 성전 신축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또한 이듬해 2월에는 활동이 부진하던 기존의 청년회를 개편하여 새로운 청년 연합회를 출범시켰고, 7월에는 예수 성심상 뒤편의 건물을 수리하여 수녀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84년 3월에는 새 성당의 신축 기공식을 거행하였고, 성당 신축 공사 기간 동안 유치원 건물 2층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1986년 5월 현 위치에 성모 동굴을 새로 조성하여 축성식을 거행하였으며, 6월에는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의 집전으로 새 성당의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8대 주임 정광웅 신부는 1988년 8월부터 나눔의 헌금 운동을 전개하여, 매월 첫 주일에 봉헌한 2차 헌금으로 본당 내 불우한 이웃을 도왔다. 그리고 9월에는 사제관 보수 공사를 실시하였고, 10월과 이듬해 5월에는 평화의 모후 성모상과 성 요셉상을 안치하였으며, 1989년12월에는 새 수녀원의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9대 주임 최익철 신부는 1992년 평신도 협의회를 사목 협의회로 개칭하였고, 구역 및 반을 개편하는 동시에 매월 반 모임의 날을 시작하여 소공동체의 활성화를 꾀하였다. 또한 3월에는 레지오 마리애 평화의 모후 꾸리아와 자비의 모후 꾸리아를 각각 19개의 쁘레시디움으로 확대하였고, 4월에는 다시 구역과 반을 개편하며 남성 구역장제를 도입하였다. 1995년 5월과 6월에는 본당 설립 4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 미사 봉헌과 《명수대 본당 40년사》 발간 등 다양한 기념 행사를 거행하였고, 이듬해 9월에는 본당 명칭을 일본인 별장 이름이었던 명수대에서 흑석동으로 변경하였다.
10대 주임 전창문 신부는 1997년 혼인 서약 갱신식을 하였고, 1998년 2월에는 상지의 좌 쁘레시디움(평화의 모후 꾸리아)의 500차 기념 주회, 1999년 11월에는 겸손하신 모후 쁘레시디움(하자 없으신 모후 꾸리아)의 800차 기념 주회를 가졌다. 또한 2000년 5월에는 전례단을 신설하였으며, 11월에는 평화의 모후 꾸리아의 500차 기념 회합을 거행하였다.
11대 주임 안상인 신부는 2001년 11월부터 어린이 미사 대신 가족 미사를 신설하여 온 가족이 함께 미사를 봉헌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2002년 10월에는 거리 선교를 시행하였으며, 2003년 4월에는 거리 청소를 통한 선교 방침을 세우고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거주 지역의 거리 청소를 실시하였다. 이어 2004년을 본당 설립 50돌 기념의 해로 정하고, 감사 미사 봉헌 및 본당 체육 대회 개최, 50주년 기념 성가 대회 등 2004년 5월부터 11월까지 다양한 기념 행사를 거행하였다. 또한 12월에는 대성당 1층에 납골당 '평화의 쉼터' 를 건립하고 염수정(廉洙政, 안드레아) 주교의 집전으로 축복식을 거행하였고, 2005년 5월에는 《흑석동 성당 50년사》를 발간하였다. (→ 서울대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본당 40년사 편찬위원회, 《명수대본당 40년사》, 천주교 명수대 교회, 1994/ 흑석동 성당 50년사 편찬위 원회, 《흑석동 성당 50년사》, 천주교 흑석동 성당, 2005/ <가톨릭신문>/ 본당 사목 보고 현황서. 〔金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