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 대원군 (1820~1898)

興宣大院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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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

흥선 대원군.

고종(高宗, 1863~1907)의 부친이며, 조선 말기에 정계를 풍미하였던 정치가. 영조의 현손 남연군(南延君)의 제4자. 본명은 이하응(李是應),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며 흥선 대원군으로 불렸다. 대원군의 군호(君號)는 국왕의 부친으로 국왕이 아니었던 어른에게 올리는 존호로, 1841년 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2년 후에 흥선군(興宣君)의 군호를 받았으며, 1863년 고종 즉위 후에 흥선 대원군으로 봉작되었다.
〔생애〕 17세 때에 부친을 잃은 후 사고무친의 신세로, 철종(哲宗, 1849~1863) 당시 세도를 누리고 있던 안동 김씨의 횡포하에서 뛰어난 정치 감각으로 불우한 파락호 궁도령(宮道令) 행세를 하며 생을 도모하는 한편, 안동 김씨와 정치적으로 대적 관계에 있던 풍양 조씨 가문의 조성하(趙成夏)를 사이에 두고 궁중 어른인 조 대비와 은밀한 인연을 맺으며 정치적으로 웅비할 날을 기다렸다. 마침내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여 새 국왕 옹립 문제가 생기자, 조 대왕대비의 언교로 그의 둘째 아들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나이 어린 군주의 즉위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의 권력을 장악한 조 대왕대비는 흥선군에게 대원군의 칭호를 내리고 어린 국왕의 섭정으로 국가 만기(萬機)를 요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안동 김씨 세도하에서 자행되던 학정과 수탈로 인한 사회 불안과 국가 재정의 결핍, 불합리한 제도와 부정한 정치 운영의 실태와 봉건제 모순에서 생겨나는 민생의 고난을 직접 목격한 흥선 대원군은 왕권 부흥과 사회 질서 재확립 및 국가 재정의 재건을 위한 과감한 개혁 정치를 강력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하였다. 부패한 권세가들과 양반 특권층의 반대를 누르고 왕권 확립, 국가질서 및 사회 구습을 일시에 바로잡으려는 부국 안민의 개혁 정치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흥선 대원군은 봉건적 국가 체제의 정비를 목적으로 《대전회통》(大典會通) · 《육전조례》(六典條例) 등의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여 법 질서를 확립하였다. 이와 동시에 국정의 최고 관서인 의정부(議政府)를 부활시키는 한편,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삼군부(三軍府)를 신설하여 정무(政務)와 군정(軍政)을 분리하는 등 국정 질서를 확립하여 세도 정치의 폐해를 발본색원(拔本塞源)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사림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쟁의 배경이며 특권적 폐악의 근원이던 서원(書院)을 혁파하였다. 안정적인 국가의 재정 확보를 위하여 무명 잡세를 폐지하고 군포세(軍布稅)를 호포세(戶布稅)로 개혁하여 양반들에게도 납세의 의무를 부과하고 양반 토호의 면세 전결(田結)을 철저히 조사하여 과세하는 등 세제 개혁을 단행하고, 복식(服飾)을 간편히 하는 동시에 양반들의 사회적 특권을 제약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여 사회적 인습의 개혁에도 기여하였다.
이러한 개혁 정치로 국가 사회에 새로운 기풍이 감돌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독재적 과단성과 무리한 사업의 추진은 문제가 되었다. 왕권의 위세를 드높이기 위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 때에 파괴된 채 방치되었던 경복궁(景福宮)의 중수를 시작하여, 권세가들에게 원납전(願納錢)을 부과하고 문세(門稅)를 신설하여 건축비를 조달하였다. 하지만 무거운 금전적 부담과 거대한 토목 공사로 인한 가혹한 부역으로 국민의 원성은 날로 높아졌고, 건축 자재로 묘송(墓松)을 강제로 벌채· 사용하는 등의 횡포로 말미암아 양반 세가는 물론 시정 서민층 사이에서도 불평의 소리가 높아졌다. 복구된 경복궁의 위용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데에 효과는 있었으나, 민심의 이반과 양반들의 반(反)대원군 원성을 초래하였다.
무엇보다 대원군은 보수적인 척사 세력에 휩싸여 근대 세계사의 역사적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1873)를 도발하여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하였다. 또한 서구 식민주의 국가의 개방 압력에 무력으로 대응하여 두 차례의 양요(洋擾) 끝에 침략적 접근을 물리칠 수는 있었으나, 이후 쇄국양이(鎖國洋夷)정책을 고수하여 결과적으로 조선을 세계사의 흐름 속에 뒤늦게 편입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와 일생 동안 벌이게 되는 정쟁(政爭)의 격렬한 갈등과 투쟁은 단순히 두 사람 간의 감정적 마찰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척사와 개항, 수구와 개화 세력의 작용, 민씨 척족(閔氏戚族)의 배후 공작으로 인한 왕실 내적 상황과 그들의 이러한 정치적 대립 · 투쟁을 조선에 대한 세력 신장과 침략 강화에 이용하려는 외세의 외적 작용이 장기간에 걸쳐 복잡하게 얽혀 돌아간 문제였다.
민씨 척족은 친정(親政)을 바라는 고종을 등에 업고, 대원군을 탄핵하는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상소가 올려지자 마침내 흥선 대원군을 정계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본래 흥선 대원군은 국왕 외척들의 세도 정치를 근절시키고자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 閔氏 : 흥선 대원군의 부인)의 추천으로 친족 배경이 없는 여흥 민씨(驪興 閔氏) 출신의 규수를 고종의 왕비로 삼았다. 하지만 대원군이 궁인 이씨 소생의 완화군(完和君)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여 사이가 벌어지자, 명성황후는 고종을 움직여 흥선 대원군 축출을 공작하고 대원군 집정 10년의 막을 내리게 하였다. 이후 개방 · 개항 · 개화를 추진하다가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으로 사망할 때까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민씨는 자파 세력뿐 아니라 외세를 등에 업고 정권 쟁탈을 거듭하면서 조선 말기 국정의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키는 두 배후로 정치적 각축을 벌이게 된다.
1881년 청(淸)의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의 대조선 외교 전략서인 《조선책략》(朝鮮略) 문제를 계기로 유림세력의 척사 상소 운동이 활발해지자, 민씨 세력을 타도하고 대원군의 서장자인 이재선(李載先)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공작이 대원군의 지원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국왕의 부름을 받고 한때 정권을 다시 잡을 수 있었으나 명성황후의 세력을 업고 조선 문제에 간여하고 나선 청국의 개입으로 청에 납치되어 3년간의 유수 생활을 겪어야 하는 불운을 맞기도 하였다. 이후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조약을 맺고 정치적으로 친러 노선을 취하자, 대원군은 이에 불만을 품은 청국과 손을 잡고 그의 장자 이재면(李載冕)을 국왕으로 옹립하려고 하였다. 1894년 갑오 동학 농민 전쟁으로 국내가 혼란해지자 국정 수습을 위해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그의 뜻과 달리 갑오경장의 개혁 운동이 추진되자, 일제의 작용으로 다시 실각하게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 세력은 대원군존봉의절(大院君尊奉儀節)이라는 법적 조치를 통해 대원군의 정치 개입을 사전에 억제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러시아가 조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세력이 위축되자, 일부 친일 세력과 야합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긴급한 위기 사태의 국정 수습을 위해 다시 정권을 담당하게 되었으나,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 정부가 세워지면서 다시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정계에 나서지 않고, 정치 풍운아로의 활동을 접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이 마지막으로 정권을 담당한 것은 1895년 을미사변이 벌어진 직후 국왕 고종의 부름으로 비상시국의 뒷수습을 위해 정권을 위임받은 때였다. 그러나 친러파와 웨베르(K.I. Weber, 韋貝) 주조선 러시아 공사의 공작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으로 이렇다 할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정계를 떠나 마포의 산장과 운현궁을 오가며 여생을 지냈다. 그는 파란 속에 살아온 자신의 정치 행각을 되돌아보고, 한말 정국을 걱정하며 노년의 생활을 지내는 가운데, 1896년 10월 11일 부대부인 민씨는 운현궁 밖에 살던 고종의 유모인 봉보 부인 박 마르타의 집에서 당시 조선교구의 교구장이던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의 집전으로 박 마르타의 딸인 원 수산나를 대모로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민 마리아는 1898년 정월 8일에 노환으로 사망하였고, 두 달 후인 2월 22일에는 대원군이 사망하였다. 5월 15일에 부부 합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으며, 흥선 대원군은 1907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40여 년의 파락호 생활과 10년간의 국가 요람 담당의 섭정기, 12년에 걸친 정적 명성황후와의 정치적 각축 시기, 아관파천 후 16년 동안의 야인 생활로 정리되는 흥선 대원군의 생애는 격동적인 것이었다. 그는 조선의 중흥을 위해 개혁 정치를 실시하고 외침으로부터 조국을 방어한 한말의 정치가였으며 동시에 천주교도의 살해와 개항 거부로 조선의 근대화를 뒤쳐지게 한 수구적 정치가였다. 사실 당시는 밀려오는 외세로부터 조국을 수호하는 보위 정책과 함께 근대 실용 문화를 수용하여 근대 국가로의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정치적 지도자가 필요할때였다. 하지만 근대적 역사 의식을 터득하지 못했던 그는 조선 봉건 국가의 과단성 있는 독재자로서 정치적 생을 살았다고 종합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천주교와의 관계〕 흥선 대원군은 안으로는 반대 세력을 억압하면서 왕권 강화를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침략적 의도를 숨기고 조선에 접근해 오는 서구 근대 식민주의 국가에 대응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에 대면해야 하였다. 세도 정치로 흐트러진 유교적 봉건 지배 체제의 부흥을 추진하던 흥선 대원군은 전통적인 위정 척사 정신에 입각한 양이 정책으로 서양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급변하는 국제 정치에 유연하게 대응할 여유를 가지지 못한 구시대의 독재적 집권자였다. 그는 청국을 왕래하는 사대사행원의 귀국 보고를 통해, 아편 전쟁과 제 2차 아편 전쟁으로 불리는 애로호 사건으로 영 · 불의 무력 침공에 시달리던 청국의 위기 상황을 접하면서, 조선에도 닥칠 수 있는 외세의 침략적 접근의 위험성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침략적 외세 접근은 청국에 무력을 가한 영국과 프랑스 등 해상 식민 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17세기 이후로 꾸준하게 시베리아 진출을 추진하던 '북방의 육상 식민주의 국가인 러시아 제국' 의 연해주(沿海州) 영유와 러시아인들의 '두만강 월경 사건' 으로 현실화되었다. 1860년 '애로호 사건' 을 종결짓는 베이징 조약(北京條約)의 체결을 주선한 대가로 러시아 제국(당시는 아라사〔俄羅斯〕 제국으로 불림)은 시베리아 동부 연해주 땅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접경하게 되었고, 극동 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 항구를 건설하면서, 두만강 너머의 조선을 넘보게 되었다. 1864년 이후 러시아가 조선에 통상과 국교를 청하는 월경 사건이 잦아지게 되자, 전통적으로 서양인을 양이(洋夷)로 여기고 척양 정책(斥攘政策)을 고집해 오던 조선 정부로는 북변의 문제가 긴급한 국가 문제로 떠올랐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프랑스의 도움으로 러시아의 남침을 저지하려는 이른바 '이이제이(以異制夷)의 방아책(防俄策)' 이 천주교인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이 천주교회 측과 비밀리에 접촉하던 일이 정계에 알려지면서, 양이이자 박해 처형의 대상이었던 천주교와의 접촉을 문제삼는 반대 세력의 정치적 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변하게 되자 그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방위하기 위하여, 천주교 측과의 이면 교섭을 철회하고 천주교 박해를 선포함으로써 이후 6년에 걸쳐 이른바 '병인대박해' 의 참극이 벌어지게 되었다. 대략 23,000여 명으로 추산되던 천주교도는 양이와 내통하는 '통외분자' (通外分子)요, 침략의 무리를 끌어들이는 '초구지도' (招寇之徒)로 몰려 격렬한 박해를 받으며 무수한 순교자를 냈다.
당시 조선 교회에서 선교 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프랑스 신부들은 흥선 대원군을 '신체는 왜소하고 성격은 조급하며 우직하고 과격하다' (푸르티에〔J.A.C. Pourthie, 申妖案〕 신부의 1863년 서한 기록), '성격이 급하고 잔인하여 백성을 업신여기고 사람의 생명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고 있다' (다블뤼〔M.N.A. Daveluy, 安敦伊) 부주교의 서신 기록), '악하고 탐하는 성격에서 사람을 죽이기를 잘하여 명성을 잃게 되었다' (페롱[S. Féron, 權〕 신부의 서한 기록) 등 대체로 성급하고 위험한 인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교회의 책임자이던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낸 보고서에 흥선 대원군이 의외로 천주교에 호의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원군은 그가 잘 알고 있는 천주교에 대해서나, 또는 잘 알고 있는 성직자에 대해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 나라에 8명의 서양인이 들어와 활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 '대원군의 부인, 즉 국왕의 모친이 천주교를 알고 있으며 교리 문답의 일부를 배우고 있고, 그녀는 매일 몇 가지의 기도문을 외우며,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을 감사하는 뜻에서 나에게 미사 성제를 청해 왔었다. 뿐만 아니라 국왕의 유모(乳母 : 공식 호칭은 봉보 부인〔奉保夫人〕) 박말다(朴 마르타)는 교인이다. 나는 금년에도 그녀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이것은 국가의 기록에는 나올수 없는 내용이어서 흥선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가 고종 즉위 당시에 이미 천주교에 호의적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녀가 사망하기 전에 영세를 받은 것과 당시 대원군이 그 사실을 묵인한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젊은 시절에 천주교를 가까이 하였을지도 모르는 개연성을 부인할 수 없다.
그가 강경한 반천주교 의지를 가진 집권자였다면 국가 총람의 권력을 장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천주교 박해를 단행하였을 것이나, 3년이나 지난 후에 돌연 박해를 하게 된 것은 그의 반천주교 의지라기보다는 다른 요인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러시아 제국 세력의 두만강 월경과 국교 강요로 북변의 문제가 긴박해지면서,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침략 의도에 대응하기 위해 시도한 천주교와의 은밀한 접촉, 그 접촉에 차질이 생겨 시일이 천연되는 가운데 그 사실이 정계에 알려져 그의 정적들인 반대원군 세력의 대원군 공세가 벌어지게 되자, 자기의 정치적 생명과 정권 지속을 위해 천주교와 무관함을 천하에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결단으로 전국적인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고 대규모 박해를 시작하였다고 이해된다. 그는 정치적으로 과감하고 신속하게 국내 문제의 대책을 취해 왔고, 목적 달성을 위해 가혹한 탄압과 살육을 감행할 수 있었던 봉건 시대 정치가였다.
러시아의 두만강 월경 사건으로 조성된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제기된 '이이제이의 방아책' 은, 천주교회 측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제안한 대응책임과 동시에 교인들의 신앙 자유의 허용을 흥선 대원군에 기대해 보려는 노력의 방법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회장직을 담당하고 있던 홍봉주(洪鳳周, 토마스)가 대원군 앞으로 상서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대원군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그와 친교가 있던 전 충주 부사 남상교(南尚敎, 아우구스티노)의 아들이며 승지 벼슬을 지낸 남종삼(南鐘三, 요한)이 고종의 유모이던 봉보 부인 박 마르타를 통해 재차 건의하였다. 그는 이이제이의 방책을 올려 흥선 대원군과 천주교 측의 조선교구 수뇌와의 면담을 주선하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부주교가 지방 공소 순회 사목 여행 중이어서 시일이 지연되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조속한 면담을 기대하던 흥선 대원군은 차츰 의구심을 품게 되었고, 천주교회 측과 모종의 교섭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정보가 밖으로 알려지게 됨으로써 그가 박해의 전통을 어기고 천주교와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다는 반대 세력의 정치적 공세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중국에서 돌아온 사대사행원이 애로호 사건으로 전쟁 사태가 진정되었고 중국에서 천주교 박해가 활발하다는 정보를 전하자, 흥선 대원군은 자기의 정치 생명 연장과 옹위 및 천주교와의 관계를 선명하게 알리고자 돌연 천주교에 대한 박해령을 선포하였다.
병인박해는 6년간 4차례에 걸쳐 천주교회를 엄습하며 막대한 희생자를 냈다. 박해 초년인 1866년 1차 박해는 주로 수도를 중심으로 경기 지역에서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를 위시하여 9명의 프랑스인 선교사와 남종삼, 홍봉주 등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일소하는 데 주력하였다. 당국은 8월 초에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발표하고 박해를 접을 태세를 취하였으나, 프랑스 동양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하여 병인양요(丙寅佯擾)가 발발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2차에서 4차까지의 박해는 주로 서해안 지대 각지에서 선참후계령(先斬後啓令)의 시달에 따라 거세고 무자비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는 모두 조선 왕국에 대한 침략적 서구 식민주의 국가의 자극적 도전이 요인이 되어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재개되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차 박해는 병인양요로 인해, 3차 박해는 오페르트(Emest J. Oppert, 載拔) 등의 국제적 도굴단에 의해 자행된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파묘 사건으로 격앙된 흥선 대원군의 특명으로 벌어졌다. 마지막 4차 박해는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이유로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자극제가 되어 남아 있는 천주교 신자들을 일소하기 위하여 벌어졌다.
병인박해가 이처럼 6년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파동치듯 전개된 것은 천주교에 대한 조선의 전통적인 박해 정책 때문이기도 하나, 대외적으로는 조선의 개항을 군사적으로 강요하는 무력 침공에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는 침략적 식민주의 국가의 침공으로부터 조국을 방위하는 열전적 대책 가운데 천주교회가 휘말릴 수 밖에 없었고, 천주교들은 침략 외세와 내통하는 통외분자, 침략에 부동하는 초구지도로 단정되어, 특히 식민 세력의 출몰이 잦은 지역이었던 한강 유역과 충청도 해안 각지에서 순교자가 다수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 교회 측 기록에 의하면 박해가 일어난 1866년에는 선교사 12명과 24,000명에 가까운 신자가 있었으나, 박해로 9명의 선교사와 약 8천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 대원군 ; → 남종삼 ; 민 마리아 ; 척화비)
※ 참고문헌  《高宗實錄》/ 《陰晴史》/ 《高宗紀事》 《韓國痛史》/ 柳洪烈, 《高宗治下 西學受難 研究》, 을유문화사, 1962/ 崔奭祐, 《丙寅迫害 資料 研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68/ 이원순, 《한국성인의 천주신 - 성 요한 남종삼과 그 일가의 천주신앙》, 1984, 분도출판사/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李元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