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즈키야

〔히〕חַזִקַיָּח וּ · 〔그〕Εζεκἰας · 〔라〕Ezechia · 〔영〕Hezek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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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즈키야 왕이 독립 전쟁에 대비해 기혼 샘에서부터 실로암 샘까지 지하 암벽을 뚫어 만든 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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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즈키야 왕이 독립 전쟁에 대비해 기혼 샘에서부터 실로암 샘까지 지하 암벽을 뚫어 만든 수로.

유대 왕국의 왕(기원전 716~687). 고대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된 이후 열세 번째 왕으로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즉위하였다.
히즈키야의 어간(חָזִק)은 '강하게 하다' 라는 의미로, 히즈키야는 '야(훼)는 〔나의〕 굳셈' 이란 뜻이다. 선왕인 아하즈(기원전 735~716?)가 그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즈가리야의 딸인 아비( '아비야' 의 축약형으로 추정, 2역대 29, 1)이다. 또한 그의 아들은 므나쎄(기원전 687~642)이다. 유대 왕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의 왕으로, 구약성서에서 언급되는 "다윗, 히즈키야, 요시야"(집회 49, 4) 세 명의 경건한 왕 중 한 명으로 칭송된다. "그의 뒤를 이은 유다의 모든 임금 가운데 그만한 임금이 없었고, 그보다 앞서 있던 임금들 가운데에서도 그만한 임금이 없었다" (2열왕 18, 5). 그 이유는 그가 "주님께 매달려 그분을 따르는 일에서 돌아서지 않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들을 지켰기"(2열왕 18, 6) 때문이다. 후기 유대교에서도 그는 이상적인 왕으로 추앙받았다.
히즈키야는 한때 중병을 앓았는데, 아마 아시리아의 왕인 산헤립(Sennacherib, 기원전 705/704~681)의 침공 이전 시기로 여겨진다. 이때 예언자 이사야가 그의 죽음을 예언하며 죽음에 대비하라고 하자, 히즈키야는 울면서 기도하였다. 결국 하느님은 그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시켜 주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여 줄 것을 약속하였다(2열왕 20, 1-11). 그의 이름은 예수의 족보에도 등장한다(마태 1, 9-10).
〔자료와 상황〕 즉위 기간 : 그는 25세에 왕위에 올라 29년간 통치하였다(2열왕 18, 2 : 2역대 29, 1). 재위 기간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하지만, 즉위 연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열왕기 하권에 따르면 북이스라엘의 멸망(기원전 722)이 히즈키야 재위 6년째에 일어났으므로(2열왕 18, 9-10) 그는 기원전 727년에 즉위한 것이 된다. 그러나 재위 14년에 산헤립이 공격해왔다(기원전 701 : 2열왕 18, 13)라는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716년에 즉위한 것이 된다.
자료 : 그에 관한 자료는 아시리아 연대기와 실로암 비문 등 성서 외부 자료와 성서(2열왕 18-20장 ; 2역대 29-32장 ; 이사 36-39장 ; 집회 48, 17-25 등)에 많이 남아있다. 이사야서 1~39장의 상당 부분도 히즈키야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2역대 32, 32 참조). 그런데 관련 내용이 일치하지 않아 일관된 해석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중에서 종교 개혁에 관한 내용은 주로 역대기 하권에 많이 언급되고, 반면에 정치적 갈등과 전쟁에 관한 내용은 열왕기 하권과 이사야서에 주로 나온다.
즉위 당시 상황 : 선왕인 아하즈 왕 시대에 유대 왕국은 아람과 북이스라엘로부터 계속 위협받는 소국이었다. 아하즈는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으로 야기된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당시 근동의 최강국이었던 아시리아에 도움을 청하면서 스스로 봉신 국가가 되어, 결국 나라는 지켰지만 독립 국가의 위상을 잃게 되었다. 게다가 즉위 전이었든 재위 중이었든, 히즈키야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지켜보아야 하였다. 이런 엄청난 부담을 안고 즉위한 그는 유대 왕국의 재건과 정치적 독립을 꿈꾸게 되었다.
〔종교 개혁〕 역대기에 따르면 그는 즉위한 해 첫 달에 아버지 아하즈가 봉했던(2역대 28, 24) 성전 문을 열어 수리하고 성전 기구를 정화하였다(2역대 29, 3). 아마도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호세아, 이사야 예언자들의 외침에서 큰 자극을 받은 것 같다. 그는 국가의 기상을 쇄신하고 국력을 모으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제의를 집중하였다. 지방 성소의 사제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이는 한편(2역대 31, 15-19) 각 지방의 예배터였던 산당들을 철거하였다. 또 성소의 신성을 나타내었던 석상들을 부수었으며, 신의 현존을 의미하거나 야훼의 배우자인 듯한 아세라 여신의 목상들을 파괴하였다. 특히 모세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오랫동안 숭배의 대상이었던 구리 뱀상(느후스탄)을 산산조각내었다(2열왕 18, 4). 이러한 예배 행태는 유대 왕국에서 전통적으로 행하여 오던 토착 신앙들에 의해, 혹은 지역에 따라 변질된 채 깊이 뿌리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또 아시리아가 강제로 부과하진 않았지만 선왕 아하즈 때 도입한 이교 제의까지 뒤섞여, 한층 혼합 종교적인 모습을 띄고 있었다(2열왕 16, 10-18 2역대 28, 23-25 ; 이사 2, 6-8). 이런 상태에서 그가 시행한 종교 개혁의 강도는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는 야훼께 드리는 예배와 축제도 회복시켰는데, 북쪽의 므나세와 에브라임 지파에도 초대의 편지를 보내 과월절을 함께 지내고자 하였다(2역대 30, 1. 5-11. 18). 종교와 정치가 한 덩어리였던 고대 사회에서 이러한 종교 개혁이 왕권을 강화하고 수도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높이며, 민족주의적 성향을 되살리려는 정치적 의도와 연결된 것은 분명하다. 그는 야훼 종교를 부흥시키고 우상들을 척결한 치적으로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다"(2열왕 18, 3)라고 줄곧 칭송받았다. 비록 그의 개혁이 아들 므나쎄 왕의 시대에 모두 무너졌지만, 이스라엘 종교의 방향을 설정한 왕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 후대에 다시 종교 개혁을 시도하였던 증손자 요시야(기원전 640~609) 왕보다 신명기 정신에 더 충실하였던 왕으로도 평가된다.
〔정치적 관계〕 히즈키야가 왕으로 즉위하였을 때 유대 왕국은 아시리아의 봉신 국가였다. 당시 아시리아 왕인 사르곤 2세(Sargon II, 기원전 722~705)는 봉신 국가들을 단속하기 위하여 기원전 720, 716, 713년에 각각 유대 왕국 근처로 원정을 하였다. 기원전 714년에 아슈도드(Ashdod, 아스돗)의 아주리 왕이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봉기하였으나, 히즈키야는 여기에 가담하지 않은 듯하다(이사 20, 6 참조). 이 봉기는 기원전 712년에 진압되었다. 또 이 당시 므로닥발라단(Merodach-baladan)이 아시리아에 반역하여 바빌론을 장악하고 있었다(기원전 721~710). 아마 사르곤의 3차 원정에서 멀지 않았던 때에, 므로닥발라단의 사절이 유대 왕국을 방문하였던 것 같다(2열왕 20, 12-19). 이들은 유대 왕국의 국력을 살펴보고, 반아시리아 동맹을 모색하기 위해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2역대 32, 31).
히즈키야는 이러한 주변 상황을 주시하면서 조심스럽게 독립 전쟁에 대비하였다. 전쟁 준비는 장기간에 걸쳐 치밀하게 이루어졌다. 무기를 확보하고(2역대 32, 5-6), 군수품을 모았으며(2역대 32, 28-29), 라기스를 비롯한 지역의 행정 중심지와 요충지를 요새화하였다. 가장 중점을 둔 곳은 물론 수도 예루살렘(2역대 32, 5)으로, 예루살렘 성벽을 확장 · 보완하고 양식 창고를 짓는 등 장기간의 포위에 대비하였다. 가장 널리 알려진 대비책은 성 밖의 기혼 샘에서부터 성 안의 서쪽 언덕에 있는 실로암 샘까지 지하 암벽을 뚫어 수로를 판 일이었다(2열왕 20, 20 ; 2역대 32, 30). 당시 예루살렘은 북이스라엘에서 온 이주민들과(2역대 30, 25) 수도로 몰려든 지방민들 때문에, 솔로몬 시대에 비해 규모가 무려 4배나 커져 있었다. 브로쉬(M. Broshi)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당시 예루살렘 인구는 대략 25,000명으로 솔로몬 시대보다 다섯 배나 더 많은 숫자였다. 아울러 중앙에서 지방의 촌락과 성읍들을 강력하게 통제하였다는 것이 국경을 따라 발견된 1,200여 개의 왕실 항아리에서 입증되었는데, 포위당했을 때 사용하기 위해 마련된 이 곡물 저장용 항아리의 손잡이에는 '유대 왕,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의 것' 을 표시하는 왕실 직인이 찍혀 있다.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가 죽고난 뒤(기원전 705) 분열의 조짐이 보이자, 사방의 봉신 국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히즈키야는 이사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시돈, 아스클론, 에크론 등과 함께 기원전 704년에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왕위를 승계한 산헤립 왕은 재빨리 동부로 진격하여 바빌론의 므로닥발라단을 진압하고(기원전 701) 이어 곧바로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원정을 하여 페니키아 해안부터 블레셋 해안까지 진격하면서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엘테케에서 이집트 군대마저 꺾어 패권을 공고히 하였다. 히즈키야가 오랜 기간 대비하였지만, 아시리아의 위세는 훨씬 강하였다. 전승비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산헤립은 이때 라기스를 비롯하여 요새로 된 유대 왕국의 성읍 46개를 함락시키고 포로로 200,150명을 사로잡았다고 전한다(2열왕 18, 13 ; 2역대 32, 1 : 참조 : 이사 1, 7-9). 마침내 예루살렘을 포위한 산헤립은 특사를 보내 히즈키야에게 항복을 요구하였으나(2열왕 18, 17-19, 7 : 이사 36, 2-37, 7), 히즈키야는 이사야 예언자의 지지를 받으며 결코 투항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산헤립은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를 풀고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성서는 주님의 천사가 신비롭게 산헤립의 군사 185,000명을 죽였다고 기술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 역시 재앙이나 전염병 등 다양하다(2열왕 18, 13-19, 37 : 2역대 32, 1-22 ; 이사 36-37장 ; 헤로도토스, 《역사》 2, 14-141 :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0장). 히즈키야가 잘못을 인정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 포위를 풀게 하였다는 성서 내용(2열왕 18, 14-16)을 들어, 혹자는 이것이 산헤립의 두 차례 공격 중 앞의 경우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산헤립은 기원전 701년에 한 번 공격하였다고 본다. 따라서 아시리아 궁정의 반역 움직임과 예상보다 탄탄한 예루살렘의 방비 때문에 막대한 배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포위를 푼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아무튼 예루살렘이 극적으로 구조된 것으로 인해 이때부터 주님이 머무시는 예루살렘 도성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강화된 것 같다(시편 124 ; 참조 : 예레 7, 14). 그러나 이처럼 왕과 수도가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왕국은 독립하지 못하였음은 물론, 많은 영토를 주변 국가에 빼앗기고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국력이 크게 손실되었다.
〔문화 활동과 기타〕 히즈키야는 문화적 측면에서도 남다른 치적을 남겼다. 즉 신하들을 시켜 솔로몬의 잠언들을 모아 편찬하여(잠언 25-29장) 지혜 문학이 성장할 기반을 다졌다. 또 성전 예배용 노래와 시편들도 이때 한 차례 모아진 듯하며(2역대 29, 30 : 참조 : 시편), 그 자신도 빼어난 감사 찬미가 한 편을 남겨 놓았다(이사 38, 9-20). 일부 학자들은 신명기계 역사서의 가장 초기 판본이 히즈키야 시대 때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예언자 미가와 이사야가 이 시대에 활동하면서 예언 문학이 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히즈키야 시대를 성서 문학이 형성되기 시작한 가장 이른 시기로 추정할 수 있다. 랍비 전승에서는 히즈키야와 신하들이 "이사야, 잠언, 아가, 전도서"를 썼다고 전한다(Mishina, Bava Batra 15a). (→ 신명기 ; 아세라 ; 아시리아 ; 유대 왕국 ; 이사야서)
※ 참고문헌  H. Shanks ed., From Abraham 10 the Roman Destruction of the Temple, Revised and Expanded Edition, Biblical Archaeology Society, 1999(김유기 역, 《고대 이스라엘》, 한국신학 연구소, 2005)/ J. Bright, A History of Israel, Fourth Editi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0(엄성옥 역, 《이스라엘 역사》, 은성, 2002)/ M. Broshi, Estimating the Population ofAncient Jerusalem, BAR 4-2, pp. 10~15, 1978/ M. Cogan, Imperialism and Religion : Assyria, Israel, and Judah in the Eighth and Seventh Centuries B.C.E,, SBLMS 19, Missoula, MT, 1974/ J.H. Hayes · P.K. Hooker, A New Chronology for the Kings of Israel and Judah and Its Implications for Biblical History and Literature, Atlanta, 1988/ I. Proban, Hezekiah and the Books of Kings, BZAW 172, Berlin, 1988/ H. Spieckermann, Juda unter Assur in the Sargonidenzeit, FRLANT 129, Göttingen, 1982.〔李鎔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