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00년대에 아나톨리아(Anatolia, 현재의 터키 영토 중 아시아 지역) 일대에 자리잡았던 고대 왕국.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헷" 이라고 번역하였다.
본래 흑해 북부 해안부터 카프카즈(Kavkaz) 산맥 남쪽의 구릉 지대에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히타이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의 신체적 특징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들은 기원전 3000년대 말에 아나톨리아의 남서 해안 또는 북쪽으로 들어왔던 것으로 보이며, 점차 아나톨리아 전역을 장악하고 기원전 1200년경까지 고대 근동의 강국을 이루었다.
히타이트라는 이름은 구약성서에서 한 '종족' 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히티' (חַהַּי, 복수 חַהַּים)에서 나왔고, '종족' 이라는 말은 쐐기 문자에 지명으로 나오는 '하티' (Hatt)에서 연유하였다. 이때 '아' 가 '이' 로 바뀐 것은 히브리어 음성 규칙에 따른 모음 변화이다. 본래 아카드어로 하티 땅은 아나톨리아 중부에서 크즐으르막(Kizilrmak)강이 크게 굽어드는 안쪽 지역을 가리켰고, 그래서 기원전 약 2500~1700년 이곳에 거주하였던 비(非)인도유럽어족을 '하티 사람' 이라고 불렀다. 이들을 정복하고 그 땅을 차지한 히타이트인들은 선주민의 문명을 대부분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나라와 수도 또한 하티라고 불렀다. 또한 자신들을 네샤인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네샤(Nesa, 현재의 퀼테페)는 초기 수도 중 하나였다. 히타이트의 영토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아나톨리아의 중앙 고원을 본거지로 하여 서부 해안을 제외한 아나톨리아 전역과 시리아 북부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역 사〕 히타이트의 역사가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834년 보아즈칼레(Bogazkale, Boghazköy)와 주변의 야즐르카야(Yazilikaya) 바위 성소가 발견된 뒤 20세기 들어서야 고고학적 발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출토된 자료는 많지만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아직도 상당히 어려운 형편이다(히타이트 왕들의 연대는 모두 추정 연도이며, 그것 역시 세 갈래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중간 연대를 소개하겠다).
고왕국(기원전 약 1650~1430) : 히타이트의 초기 왕조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히 밝혀진 바가 없다. 기원전 2000년대 초반에는 아나톨리아 중부에 여러 개의 도시국가들이 있었으나, 쿠사라(Kusara)에 도읍을 둔 푸루스 하툼만이 지속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18세기당시 상황은 이곳에서 교역하였던 아시리아 상인들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쿠사라의 왕 피타나가 네샤를 정복하였고 그의 아들인 아니타(기원전 18세기 중반 이후)왕은 네샤를 수도로 삼은 듯하다. 본격적인 히타이트 왕국은 시조로 추앙받는 쿠사라의 왕 라바르나(Labama, 또는 타바르나〔Tabarna〕, 기원전 1660년경)에게서 비롯되었다(이후 라바르나는 히타이트 왕들의 별칭이 되었다). 선대의 왕들은 불분명하지만 라바르나 이후는 분명한 히타이트인들이며, 그의 후계자인 라바르나 2세는 아나톨리아 중부를 평정하고 하투사(Hattusa, 현재의 보아즈칼레)를 수도로 재건하면서 이름을 '하투샤 출신' 이라는 의미의 하투실리 1세(Hattusilli I, 기원전 1650?~1620?)로 바꾸었다. 그는 길리기아 관문(Cilician Gate)으로 통하는 남동쪽의 키주와트나(Kizzuwatna) 왕국을 병합하고 나아가 시리아 북부의 여러 도시 국가들을 장악하였으며,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신생 국가인 미타니 왕국(Mitani)까지 공격하는 등 급속히 세력을 키웠다. 무르실리 1세(Mursili I, 기원전 1620~1590)는 알레포(Aleppo)를 함락하고 후리족(Hurrian)과 싸웠으며 바빌론까지 공격하여 바빌로니아 제1 왕조를 무너뜨렸으며(기원전 1595), '법률' 을 제정하고 선대부터의 중요한 사건들을 기록한 '역사서' 를 편찬하는 등 내치에도 힘썼다. 그가 암살된 뒤 왕위 계승권을 놓고 혼란이 찾아오자, 텔레피누(Telepinu, 기원전 1525~1500)는 칙령(기원전 1500년경)을 반포하여 왕위 계승 원칙을 정하였다. 기록이 거의 없지만, 그 뒤로 대략 여섯 명의 왕이 다스린 듯하나 국력은 쇠퇴하였다. 이 시기를 중왕국(대략 기원전 1500~1430)으로 따로 떼어서 구분하기도 한다.
신왕국/제국(기원전 약 1430~1180) : 새로운 왕조로 추정되는 투달리야 1세(Tudhaliya I, 기원전 1430~1410) 때 히타이트는 다시 서쪽 해안과 유프라테스 강 동편으로 세력을 뻗쳐 알레포와 미타니를 함락하여 남-동 교역로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집트와 연합한 동쪽의 아르자와(Arzawa)와 북쪽의 유목민 카쉬카족의 위협으로 두 번째 번영기는 짧게 끝났다. 세 번째로 중흥기를 이룬 왕은 수필룰리우마 1세(Suppiluliuma I, 기원전 1370~1330)로, 왕위를 찬탈한 뒤 탁월한 군사적 · 외교적 능력으로 아나톨리아 중부를 장악하고 동편의 후리족 국가인 미타니를 정복하였다. 또 이집트 제18 왕조(기원전 1550~1295)로부터 시리아 해안의 우가리트와 아무루를 빼앗아 병합하는 등 카데쉬까지 세력을 넓혔으며, 후리족이 개발한 병거를 개선하고 철제 무기를 처음으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등 제국의 기틀을 닦았다. 이집트의 투탄카멘(Tutankhamen, 기원전 1333~1323) 왕이 죽은 후 그의 왕비로부터 결혼할 히타이트 왕자를 보내달라는 서신을 받은 왕도 수필룰리우마 1세이다.
무와탈리 2세(Muwattallli Ⅱ, 기원전 1295~1282)는 남서부의 강국인 아르자와 왕국을 정복한 뒤 속국으로 병합하였고, 이어 동편의 시리아를 놓고 이집트 제19 왕조(기원전 1295~1186)의 라므세스 2세(Ramesses Ⅱ, 기원전 1279~1213)와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오론테스 강변의 카데쉬(קדֵ שׁ)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 대해서는 서로 승리를 주장하나 히타이트가 시리아를 계속 장악한 것으로 보아 사실상 히타이트의 승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북방의 유목민인 카쉬카족이 수도까지 침략해 오자, 무와탈리 2세는 부득이 수도를 하투샤에서 타르훈타샤(Tarhuntasa, 현재의 콘야 평원 소재)로 옮겼다. 그의 동생 하투실리 3세(Hattusili Ⅲ, 기원전 1275~1245)가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 우리 테습(Urhi-Tesub, Mursili Ⅱ)을 몰아낸 뒤 카쉬카족을 물리치고 하투샤를 되찾았다. 또한 라므세스 2세와 평화 조약을 맺고(기원전 1269) 아시리아에 공동으로 대응하였다.
히타이트는 수필룰리우마 2세 때인 기원전 1190~1180년경, 에게 해 연안으로부터 해안을 타고 동쪽으로 밀려 들어온 발칸족과 '바다 사람들' 의 침략이 주된 계기가 되어 갑자기 멸망하였다. 에게 해와 아나톨리아 일대의 큰 가뭄으로 인한 식량 위기 때문에 주변 민족들이 대거 이동하면서 국제 무역로가 붕괴되고, 히타이트 역시 이때 주변 민족들이 사방에서 일제히 밀어닥쳐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후기 히타이트(기원전 1180~700) :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루비족과 후리족, 기원전 14세기 말부터 존속하던 북서 셈족 등 인종의 구성은 다양하지만 히타이트-루비(Hittite-Luwian) 전통을 이어가면서 자신들의 왕국을 '하티 땅' 이라 부르고, 자신들을 '하티인' 이라고 부르는 소국들이 아나톨리아 남동부와 시리아 북부에 생겨났다. 이 소국의 왕들 중에는 무르실리 등 유명하던 히타이트 왕들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예가 많았다. 이들은 기원전 10세기에는 아람족과, 기원전 9세기에는 북서쪽으로 밀고 올라오는 아시리아와 부딪치면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기원전 710년경에는 아나톨리아 서부의 프리기아(Phrygia)와 동편의 우라르투(Urartu, Ararat)를 제외하고 모두 아시리아에 병합되었으며, 페르시아의 정복 이후에는 히타이트 관련 국가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기원전 1000년대의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 기록에는 지중해 연안의 시리아 북부 지역이 여전히 '하티 땅' 으로 언급되어 있다.
〔경제와 사회〕 히타이트의 경제는 봉건적 농경 사회로 목축이 혼합되어 있었다. 농부들은 대지주(왕궁과 신전)에 종속되어 있거나 토지를 소유하여 자영하였다. 농토는 양도할 수 있었으며 토지 대장에 따르면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었다. 왕은 최고의 대지주였으며 왕실 토지는 농경지, 원예지, 목축지로 구분되었고 원예지는 다시 포도원과 과수원, 삼림으로 나누어졌다. 농경지는 거주하는 농부들이 노예들을 거느리고 경작하였으며 소(경작용), 염소(젖), 양(털), 돼지와 당나귀 등을 보유하였다. 주된 곡물은 보리와 밀이었다. 상거래는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극히 일부 생필품만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히타이트는 철과 구리, 아연과 주석이 풍부하고 제철 기술이 매우 발달하여 숯을 통해 세계 최초로 철에 탄소를 입혀 탄소강을 만든, 진정한 철기 시대를 연 주인공이었다. 청동 제품의 필수 재료인 주석은 바빌론에서 에게 해에 이르기까지 널리 거래되었는데, 히타이트는 이 핵심 교역로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하여 무척 힘썼다. 이 밖에도 섬유 다루는 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왕은 만신전의 가장 중요한 남신인 폭풍 신의 지상 대리자, '통치자' 로 불렸으며, 왕비는 만신전의 우두머리 여신인 태양 여신 아린나(Arina)와 연결되었다. 즉 히타이트의 왕은 지상에서 신들을 구현하는 존재로 여겨졌으며, 죽은 뒤에 그 신이 된다고 믿었다. 초기에는 각 지역의 연합체로 존속하며 왕권도 다른 근동 국가보다 덜 전제적이었으나, 차츰 중앙 집권적 왕국으로 변하였다. 왕권이 약할 때는 귀족들의 모임이 권력을 갖기도 하였으며, 제국이 된 후에는 복속한 국가들을 봉신 국가로 삼았다. 왕과 귀족 외에 농부와 상인, 장인들이 자유민이었고 노예가 있었다. 가정은 가부장제 사회였다.
〔문화와 종교〕 히타이트 문화는 매우 복합적이다. 토착민이었던 하티족에게서 종교, 왕실 의례, 미술 도상(圖像) 전통을 이어받았으나 그릇과 인장, 석조 부조물을 제외하면 눈에 띄는 예술품은 적다. 신왕국 시대부터는 후리족의 영향이 커졌다. 히타이트인들은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을 신의 뜻으로 여겨 다양한 기록을 남겼는데,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역사 기술과 법률이다. 무르실리 2세의 연대기 등 최초로 왕실 연대기를 창안하였으며, 하투실리 3세와 라므세스 2세의 평화 조약 등 각종 조약과 서간 형태의 외교 문서를 많이 작성하였다. 현재 이들의 조약 양식과 구약성서의 계약 양식 사이의 유사성이 많이 연구되고 있다. 또 기원전 14세기에 200항목에 걸친 법전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법률 부분도 발달하였다. 법전의 대부분은 형사법인데, 살인자의 처리를 피해자 가족의 뜻에 따라 처형과 보상 중에서 선택하게 하는 등 주변 국가보다 선진적인 보상 위주의 법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노예의 매매와 양도는 가능하였지만, 노예 역시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법의 보호를 받았다. 근친 결혼은 금지되었으나 수혼법은 시행되었다. 문학으로는 '쿠마르비(Kumarbi) 설화' 가 유명하다.
왕실 문서고에서 출토된 대략 만 개의 토판에 적힌 언어가 여덟 가지나 되는 것으로 보아 히타이트의 행정 체제는 다른 근동 국가들보다 덜 획일적이고 덜 경직된 것으로 보인다. 1915년에 흐로즈니(B. Hrozny, 1879~1952)가 해독한 히타이트어는 아나톨리아 중부에서만 쓰였고, 남쪽과 서쪽에서는 주로 루비어, 북부에는 할라어, 남동쪽 특히 유프라테스 강 동편에는 후리어가 신히타이트 시대까지 줄곧 사용되었다. 하티어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팔라어와 루비어, 후리족과 연관된 인도 아리안 계통의 언어도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1600년경에 히타이트어를 적기 위해 도입한 쐐기 문자와 루비어를 적는 독창적인 히타이트 상형 문자가 함께 쓰였다. 쐐기 문자는 수도 주변에서만 쓰였다가 제국이 멸망하면서 사라졌다. 신히타이트 시대에는 히타이트 상형 문자가 주로 쓰였고, 페니키아 알파벳 등도 일부 사용되었다.
히타이트에서는 수천 명의 신을 모셨다. 처음에는 토착민이었던 하티족의 신과 히타이트의 신을 섬겼으나, 팔라이트족과 루비족 등 정복한 주변 종족의 신도 점차 받아들였다. 이어서 메소포타미아에 기원을 둔 후리 신들, 북서 셈족의 신들도 포함되었다. 신들은 서열화되었고, 가장 중요한 신은 하티의 폭풍 신과 태양 여신인 아린나였다. 이 신들은 장소보다 제의와 연관되어 숭배되었다. 히타이트 땅은 그 자체로는 신성하지 않지만 전통에 따라 제의가 집행될 때 신성해진다고 여겨졌다. 적절한 제의가 번영의 조건이라고 믿었기에, 최고 사제인 왕이 국가 제의력에 따라 연중 제의를 거행하였다. 그중에서 봄 축제(Antahsum, 최장 38일간 진행)가 가장 컸고, 다음이 가을 축제(Nuntariyasha, 21일간 진행)였다. 수도 하투사는 '신들이 뽑은 도시' 이자 국가 성소로, 언덕에는 현재 확인된 것만 31개 이상의 신전이 있었다. 네릭(Nerik)이나 지팔란다(Zippalanda) 같은 주요 성지는 물론, 각 도시마다 자체적으로 만신전(萬神殿, pantheon)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원전 13세기 중반부터 후리족의 영향을 크게 받아 후리 만신전이 세워져 공식화되었고, 투달리야 4세(Tudhaliya IV, 기원전 1245~1215)가 죽은 뒤 그를 모시는 제의와 연관하여 수도 하투샤에서 2km 떨어진 야즐르카야에 바위 성소가 마련되었다. 여기에는 후리 신들이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남신의 우두머리인 테습(Tesub) 신과 여신의 우두머리인 헤파트(Hepat) 신이 50여 신들의 행렬을 이끌고 있다. 이 밖에 주술과 해몽도 널리 행해졌다.
〔구약성서에서의 언급〕 히타이트의 영토가 팔레스티나까지 미친 적은 없었지만 구약성서에서 히타이트와 관련된 내용은 두 종류로 소개된다. 하나는 헷(Het) 사람들이다(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에서 발간한 성경에는 '히타이트' 로 표기되어 있다). 헷, 즉 히타이트는 함족에 속하는 가나안의 아들로 소개되며(창세 10, 15 ; 1역대 1, 13), 이 계보에서 드러나듯 히타이트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이 이주하기 이전부터 가나안에 살던 종족 중의 하나로 소개되었다(창세 15, 20 : 느헤 9, 8). 성서는 이스라엘이 정주하기 전에 흔히 7개 종족이 가나안에 살았다고 소개하는데, 그중 히타이트족은 첫째(6번 언급)나 둘째 자리(9번 언급)를 차지하였다. "히타이트족, 기르가스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프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 (신명 7, 1). 아브라함은 히타이트 사람 에브론에게서 막벨라 동굴을 매입하였고(창세 23장), 에사오가 히타이트 여인과 혼인하자 야곱과 리브가는 못마땅해 하였다(창세 26, 34 ; 27, 46). 이러한 예를 보면 히타이트족은 헤브론과 브엘세바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티나 남부의 산악 지대에서 주로 살았으며(민수 13, 29 : 여호 1, 4 ; 9, 1 : 11, 3) , 일부는 중부의 베델과 예루살렘에까지 올라온 것 같다(판관 1, 26 참조).
성서는 그들을 섬멸할 것을 요구하지만(신명 20, 16-17) 그들은 결코 없어지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눌려 살면서 줄곧 공존하였다(여호 23, 4-5 ; 판관 3, 5 참조). 그래서 히타이트 사람은 용병으로 또는 징집되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싸웠는데, 가령 다윗의 부하였던 아히멜렉(1사무 26, 6)과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던 우리야(2사무 11, 3 : 1역대 11, 41)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셈족에 동화된 듯, 그들의 이름은 대개 셈어에 속한다. 또 그들은 강제 노역에도 동원되었으며(1열왕 9, 20 ; 2역대 8, 7), 히타이트 여인과의 혼인은 금지되었지만 사실상 후궁으로도 들어갔다(1열왕 11, 1). 그리하여 예언자 에제키엘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할 때 "너의 어머니는 히타이트 여자다"라고 지적하는 것이다(에제 16, 3. 45). 그러나 기원전 5세기인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시대에도 히타이트 여인과의 혼인은 계속 고발되고 있다(에즈 9, 1-3 ; 느헤 9, 8). 이와 같이 '히타이트 사람' 이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구분되는 고대 팔레스티나의 이방 부족의 하나로 주로 개인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반면 이들과 다른 부류의 히타이트 사람들도 언급된다. 가령 솔로몬(Salomon, 기원전 972~933)은 이집트에서 병거와 말을 수입하여 히타이트 왕들에게 판매하였는데(1열왕 10, 29 ; 2역대 1, 17), 이때의 히타이트는 시리아 북부에 존속하던 신히타이트이거나 또는 아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가 쳐들어와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있을 때 하느님이 개입하는 소리를 들은 시리아군은 히타이트 왕들이 돈을 받고 공격해 온 것으로 믿었는데(2열왕 7. 6), 이 경우도 여러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던 신히타이트 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성서는 이때 복수형 “히팀”(חַחַּים)을 사용하였다. 시리아 북부를 히타이트(하티)의 땅이라 불렀던 고대 근동의 예에 따라, "히타이트의 땅" (여호 1, 4 ; 판관 1, 26)이라는 표현이 신히타이트의 영역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 헷족)
※ 참고문헌 Philo H.J. Houwink ten Cate, Hittite History, 《ABD》3, pp. 219~225/ Gregory Mcmahon, Hittite in the OT, 《ABD》 3, pp. 231~233/ Hans G. Güterbock, 《EJ》 8, pp. 786~790/ 이희철, 《히타이트》, 리수, 2004/ 비르기트 브란다우 · 하르트무트 쉬케르트, 장혜경 역, 《히타이트》, 중앙 M&B, 2002/ J.G. Macqueen, The Hitttites and their contemporaries in Asia Minor, revised and enlarged edition, Thames and Hudson, 1986/ A. Kempinski, Hittite in the Bible : What Does Archaeology Say?, 《BAR》5, pp. 21 ~451 A. Kuhrt, The Ancient Near East, vols. 1~2, Routiledge, 1995/ O.R. Gurney, The Hittites, 2nd ed, 1981/ J. Puhvel, Hittite Etymological Dictionary, 1984/ E. Akurgal, Art of the Hittites, CAH 2, vols. 1~2, 1962 〔李鎔結〕
히타이트족
— 族
〔히〕חַהַּי · 〔그〕Χεττιιν · 〔라〕Hetthei, Hethaei · 〔영〕Hittites, Heth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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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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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히타이트족을 묘사한 조각상(기원전 8세기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