힉소스

〔그〕Υκσως · 〔영〕Hyks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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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7세기에 나일 강 유역으로 점차 침투해 들어와 하(下) 이집트를 다스리게 된 셈족과 아시아인들의 혼합 집단.
〔역사적 실재성〕 힉소스처럼 성서에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으면서 고대 이스라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민족은 매우 드물다.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이스라엘 고대사에서 힉소스는 직접적으로는 야곱, 요셉을 비롯한 후기 족장들과 관계되어 있고, 간접적으로는 출애급 사건의 역사적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 힉소스는 요세푸스(F. Josephus, 37/38?~100?)가 인용하였던 기원전 3세기의 이집트 제사장 마네토(Manetho)의 《이집트 역사》(Aegyptiaca)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이래 구약시대의 특정한 인종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에 따라서 힉소스를 히타이트족이나 후리족(Hurrians) 또는 이와 유사한 인도-유럽어족의 한 부류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이는 요세푸스가 힉소스를 '우리의 조상' 이라고 지칭한 사실을 간과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언어학적으로 희소스 단어에서 후리족적인 요소가 발견된다는 것과 중기 청동기 Ⅱ시대의 독특한 축성(築城) 방식이나 말을 이용한 전차의 개발, 새로운 형태의 청동제 무기 등을 힉소스와 연관시키기도 하였지만, 이것은 이집트의 아바리스(Avaris)가 발굴되기 이전, 즉 1960년대 이전의 낡은 해석에 속한다. 1960년대 이후 진행된 꾸준한 연구와 특히 힉소스 시대의 수도로 알려진 아바리스 발굴 및 그 결과에 대한 해석을 통해 힉소스를 서부셈족과 직접 연관시키는 등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아바리스 발굴이 마무리된 이후 힉소스는 더 이상 불확실한 수수께끼의 민족이 아니라, 구체적인 물질 문명과 그들의 지리적 기원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주인공으로 탈바꿈하였다.
〔역사적 1차 자료〕 비록 힉소스의 고유한 기록은 린드(A.H. Rhind)가 발견한 기원전 1700년경의 수학 파피루스와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몇 개의 스카라브(scarab) 도장들이 전부이지만, 최근 이집트 학자들이 집중적으로 그들에 관한 이집트인들의 기록을 수집한 결과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부분 이집트 원주민들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힉소스를 조명하는 데 어느 정도 관점의 차이를 고려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현존하는 역사 자료로 힉소스를 재구성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주인공들에 대한 기록은 미미하고, 힉소스 통치로 피해 의식을 느꼈던 이집트인들의 시각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크눔호텝 2세 무덤 벽화 : '힉소스' 는 고대 이집트어 '헥카우-하숫트' (hk3w-h3swt)의 그리스어 표기로서 '외국 땅의 통치자들' 이라는 의미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헥카우-하수트는 기원전 2000년경 제11 왕조 시대(기원전 2125~1985)에 삼각주 동부 지역으로부터 이주해 온 유목민들의 우두머리를 지칭하였다. 힉소스에 관한 유일한 그림 자료는 중부 이집트의 베니 하산(Beni Hassan)에 위치한 크눔호텝 2세(Khnumhotep Ⅱ)의 무덤 벽화이다. 크눔호텝 2세는 제12 왕조 아메넴헤트 2세(Amenemhet Ⅱ, 기원전 1901~1866) 시대에 오릭스(Oryx) 주의 주지사를 지내다가 다음 왕인 세소스트리스 2세(Sesostris Ⅱ, 기원전 1868~1862) 시대에는 고위 관직인 '동부 광야의 감독관' 으로 임명된 인물이다.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에는 슈(Shu) 지방 출신인 37명의 아무(Amu)인들이 눈 화장품을 팔러 이집트로 온 사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들의 우두머리는 아비샤(Abisha)로 불리는 자로서 그를 '헤카 하세트' , 즉 힉소스로 표기하고 있다. 이집트 기록에서는 일반적으로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거주민들을 '아무' 라 불렀는데, 힉소스의 경우 이러한 '아무' 집단 중에서도 통치자들을 지칭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비록 희소스가 외국 땅의 통치자들을 총체적으로 지칭하지만 남쪽의 누비아인들이나 서쪽의 리비아인들까지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자료의 힉소스를 제15 왕조(기원전 1650~1550)의 힉소스와 직접 연관시키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시대적으로 약 250년 정도 차이가 있고, 베니 하산 자료 이후에는 희소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1 ~12 왕조 시대에 단편적으로 힉소스가 언급된 것은 문자 그대로 외국 땅의 우두머리를 지칭한다는 것일 뿐, 더 이상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없다. 단지 도상학적으로 이집트인들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머리 모양과 의복, 그리고 무기류 등을 통해서 외국인들 중에서도 시리아-팔레스티나 출신들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힉소스 왕의 명단 : 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자료로 재구성될 수 있다.
첫째,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파피루스 기록인 토리노 왕 명단이다. 이 명단의 중요성은 힉소스 시대 이후에 기록된 현존하는 4개의 왕 명단 중에서 유일하게 제2 중간기(제13~17 왕조)의 왕들을 수록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다른 왕 명단의 경우에는 이방인들이 통치하였던 제2 중간기의 왕조를 의도적으로 삭제하였다. 약 300명의 파라오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토리노 왕 명단에도 제15 왕조 앞부분은 훼손되어 있기 때문에 마지막 왕 카무디(Kamudi)만 확인할 수 있으며, 이 왕조의 통치 기간이 모두 108년이고 모두 6명의 파라오들이 존재하였다는 기록만이 보존되었다.
둘째, 스카라브와 기타 이집트 기록 등에 등장하는 희소스 왕들의 이름으로 모두 3명(키안, 야네스, 이페피)이다. 풍뎅이 모양의 스카라브는 고대 이집트의 대표적인 부적과 장신구인 동시에 실용적인 도장으로 활용되었다. 희소스 왕조의 스카라브는 누비아의 케르마(Kerma)와 이스라엘의 텔 엘-파라(남), 텔 엘-아줄, 예리고, 바르카이 등지에서 발견되었으며, 지금까지 밝혀진 6명의 희소스 왕들 중에서 초기의 왕인 쉐시와 야쿱-헤르가 나타나는데, 함께 출토된 토기를 통하여 이들이 기원전 17세기의 인물임이 확인되었다. 한편 1969년 이스라엘 북부의 고대 항구 도시였던 쉬크모나(Shiqmona)에서 발견된 야곱 스카라브는 그 주거층이 기원전 18세기에 속하기 때문에 다른 힉소스 스카라브보다 적어도 100년 정도 앞선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이 야곱은 이스라엘의 지역 통치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셋째, 마네토의 《이집트 역사》에 나오는 6명의 힉소스 왕들의 이름이다. 하지만 이 왕 명단은 너무 후대에 기록되어서 그 순서나 이름 표기가 기존의 역사 기록과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힉소스 왕 명단을 재구성하는 자료로 활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네토가 당시 현존하던 왕 명단을 참고하였다는 전제하에, 이를 토대로 힉소스 왕조를 구성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토리노 파피루스와 마네토의 기록을 참고로 할 때, 제15 왕조의 전체 통치 기간은 각각 108년과 103년이고, 힉소스 왕들의 숫자는 둘 다 6명으로 일치한다. 힉소스 왕조의 왕 명단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이 중에서도 1966년 아바리스 발굴 이후 새로 드러난 고고학적 증거들을 토대로 힉소스 왕 명단을 가나안적 관점에서 집중 조명한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의 켐핀스키(Aaron Kempinski)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평가된다. 특히 셈어적인 발음을 통해 힉소스 왕들의 원래 이름을 추적하였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카모세 석비와 카르나르본 서판 : 이 두 자료에 힉소스가 어떻게 이집트로 들어왔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기원전 16세기의 힉소스 통치 상황을 이집트인 관점에서 증언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특히 힉소스 추방에 직접 나서서 전투에 참여하였던 제17 왕조의 마지막 왕 카모세(Kamose, 기원전 1555~1550)가 세운 전승 기념 석비와 이 내용을 나무판에 베낀 카르나르본(Carnarvon) 서판이 있다. 카르나크의 아문 대신전에 세워졌던 두 개의 석비에는 카모세의 대힉소스 전투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기록 시기는 통치 제 3년경으로 나타난다. 이 자료를 통해서 당시 힉소스가 헤르모폴리스(Hermopolis)까지 점령하였고 남쪽 이집트 원주민과는 쿠아세(Cuase)를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공식적인 전승비이지만 아무인들을 무찌른다는 파라오의 의지가 매우 강하게 나타난 점으로 미루어 그동안 힉소스의 통치 때문에 상당히 곤욕을 치른 듯하다. 결국 카모세는 힉소스 격퇴에 나서서 헤르모폴리스 북쪽에 위치한 네프루 시를 공격하면서 승기를 잡기 시작하였다.
스페오스 아르테미도스 비문 : 기원전 1460년경 제18왕조의 하트셉수트(Hatshepsut, 기원전 1479~1457) 여왕은 중부 이집트의 스페오스 아르테미도스(Speos Artemidos)에 건설된 한 신전 벽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하였다. 이 중에서 과거에 아무인들에 의해 파괴된 이집트를 자신이 회복했다는 구절(35~39줄)에서 힉소스의 역사를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하게 된다.
"들어라, 모든 민족들아! 나는 내 마음의 조언대로 이 일을 행하였다. 나는 잊지 않았고 잠들지 않았으며 파괴된 것들을 복구하였다. 이전에 아무인들이 삼각주 땅의 아바리스에 거주하며 그중의 유목민들이 기존의 건물들을 무너뜨렸지만 나는 파괴된 것들을 다시 세웠다. 그들은 라(Ra) 없이 통치하였으며 나의 통치 이전까지는 신들의 명령 없이 행동하였다. 나는 이제 라의 보좌를 세웠다. 나는 특정한 기간 동안 타고난 정복자라고 예견되었다." 이 비문을 통해서 힉소스의 파괴적인 정복자 모습이 실제 사건이 발생한 지 수 백년이 지난 시점까지 파라오들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희소스가 이집트를 파괴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아포피스와 세케넨레의 다툼—살리어(Sallier) 파피루스 제1권 : 이집트적 관점에서 이방 민족인 힉소스와의 대결 이야기는 가장 널리 알려진 무용담이었다. 이집트 학자들에 의해 '아포피스와 세케넨레의 다툼' 이라 명명된 이 파피루스 기록에는 기원전 1570년경 남쪽 상 이집트의 수도 테베에 근거를 둔 제17 왕조의 파라오 세케넨레(Seqenenre)와 북쪽 하 이집트의 아바리스에 정착한 제15 왕조의 파라오 아포피스(Apophis) 사이의 심리적 갈등이 우회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살리어 파피루스는 실제 사건보다 350년 정도 이후인 기원전 1210년경 메렌프타(Merenptah, 기원전 1213~1203) 시대에 서기관인 펜타웨르에 의해 기록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어느 정도 왜곡, 과장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16세기에 희소스가 이집트의 주도 세력이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힉소스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2차 자료로서 그 중요성이 있다.
"이집트 땅에 한때 재앙이 닥쳤고 왕이나 통치자가 없었다. 남쪽의 도시에서 세케넨레가 통치자로 있을 때 라(Ra)의 도시에 재앙이 닥쳤다. 왕자 아포피스는 아바리스에 거주하면서 삼각주의 좋은 산물을 생산하는 북쪽 땅을 포함한 온 땅에 세금을 부과하였다." "어느 날 힉소스 왕 아포피스는 남쪽 이집트의 원주민 왕에게 사신을 파견하였다. 세케넨레가 사신에게 방문한 이유를 묻자 그는 자신이 갖고 온 힉소스 왕의 편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다. 밤낮으로 나의 수면을 방해하기 때문에 도시의 동쪽에 있는 하마의 연못을 제거하라. 그러자 남쪽의 왕자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는 아포피스의 사신에게 어떠한 답변도 할 수 없었다. 남쪽 도시의 왕자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의 주인은 도시의 동쪽에 있는 하마의 연못에 관해 누구에게서 들었는가? 사신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일부 훼손) 그 때문에 내가 파견되었다.' 그러자 남쪽의 왕자는 아포피스 왕의 사신에게 고기와 과자를 비롯한 훌륭한 식량을 제공하면서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내가 시행하리라고 전하여라.' 아포피스의 사신이 돌아간 후 테베의 궁정에는 아무도 이러한 힉소스의 조롱에 관해 대비책을 내놓은 자들이 없었다."
파피루스의 뒷부분이 훼손되어서 이 이야기의 결말은 알 수 없지만, 다른 증거를 통하여 세케넨레의 비극적인 종말을 알 수 있다.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된 세케넨레의 미라는 두개골에 여러 군데의 무기 자국이 있는데, 이는 분명히 사후에 의도적으로 가까이에서 둔기로 내리친 결과이다. 만일 살리어 파피루스의 내용을 역사적인 것으로 인정한다면 아마도 학소스의 조롱 섞인 편지에 분노한 세케넨레가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쳐들어갔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비극적인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 본 그의 아들 카모세는 본격적인 해방 전쟁을 주도하였고, 드디어 힉소스의 수도 아바리스를 점령하였다. 이 이야기는 분명히 역사 기록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문학적인 해학이 엿보인다. 400여년이 지나서야 이집트인들이 수치스럽게 여겨 드러내고 이야기하기를 꺼려하였던 힉소스 침공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신화와 전설로 미화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2차 자료〕 1천 년 이상 잊혀졌던 힉소스는 마네토의 《이집트 역사》를 통해 정리되면서 헬레니즘 시대에 반유대주의 논쟁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서기 1세기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자주 발생하였던 원주민과 그곳에 자리잡은 유대인 공동체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아피온(Apion)의 《유대인 반박》(Contra Iudaeonem) 발표로 이어졌다. 아피온은 마네토의 《이집트 역사》를 인용하면서 과거 이집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나병 환자들이었기 때문에 추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격분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Contra Apionem)에서, 이집트에서 유대인을 추방하였던 사실보다 오히려 한때 유대인들이 이집트인들을 통치하였다는 희소스 왕조의 기억을 강조하며 상기시켰다. 아마도 요세푸스는 이집트 상형 문자 원본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어로 기록된 마네토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을테지만, 결론적으로 그의 요점은 마네토 같은 권위 있는 이집트 역사가도 유대인들의 조상이 한때 이집트를 통치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아피온 : 알렉산드리아의 아피온은 총 5권으로 된 자신의 저서 《이집트 역사》 3~4권에서 유대 민족에 관해 언급하였다. 이 저서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타시아노(Tatianus, 120/125?~?),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Clemens Alexandrinus, 150?~215?), 아프리카누스(Sextus Julius Africanus, 180?~250?), 요세푸스 등의 작품에 단편적으로 인용되어 전해진다. "최고의 명성을 떨치고 있는 문법학자 아피온은 그의 이집트 역사 제4권에서 아모시스가 아르고스의 이나코스 시대에 아바리스를 파괴시켰다고 언급하였다" (Tatianus, Oratio ad Graecos, 38).
한편 요세푸스는 아피온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이집트의 원로들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헬리오폴리스 출신의 모세는 자기 나라의 관습을 존중하여 헬리오폴리스의 여러 장소에 동쪽으로 향하는 여러 채의 성소들을 건설하였다. 그는 오벨리스크 장소의 배 모형 받침 위에 기둥들을 세웠고 꼭대기의 신상의 그림자가 아래에 비치면서 태양의 궤도를 나타내었다"(《아피온 반박》 Ⅱ. 10-11). 아피온의 관심은 이스라엘 민족이 몹시 병에 걸렸기 때문에 추방되었다는 출애급 사건의 부정적 인식이었다. 하지만 요세푸스는 아피온의 언급 중에서도 모세가 히브리 율법에서 금지하는 우상을 세웠다는 것에 결정적인 분노를 느끼고 이에 대한 반박문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카이레몬 : 카이레몬(Chairemon)은 서기 1세기 중엽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사서였던 스토아 철학자로 후에 네로(Nero, 54~68) 황제의 개인 교사가 되었다.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카이레몬의 주장을 인용하며 비판하였다. “그(카이레몬)는 언급하기를, 이시스 여신이 꿈 속에서 아메노피스에게 나타나 전쟁 중에 그녀의 신전이 파괴된 것에 대해 꾸짖었다. 거룩한 서기관 프리토바우테스는 만일 그가 이집트로부터 오염된 사람들을 쫓아낸다면 더 이상 경고를 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왕은 25만 명의 병자들을 모아서 추방시켜 버렸다. 그들의 지도자는 서기관들이었는데, 그중에는 모세와 요셉도 있었다"(《아피온 반박》 I. 289-290). 카이레몬의 경우 전염병에 걸린 자들을 추방하였다는 것은 비슷하나 추방 인원을 25만 명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특히 추방자들의 지도자 중에서 모세와 함께 요셉을 언급한 것이 특징적이다. 요셉은 히브리 민족에게는 흔한 이름이어서 별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힉소스와의 연관성을 고려한다면 창세기의 족장 요셉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요세푸스가 인용한 마네토의 견해에 따르면 힉소스는 이집트를 침공하였던 특정한 집단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힉소스를 민족으로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힉소스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집트적 관점에서 주변 국가나 지역에서 유입된 외국의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칭호로 바뀌었기 때문에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즉 희소스는 특정 민족 집단이 아니라 이방 통치자 개인들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리시마코스 : 기원전 10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리시마코스(Lysimachos)는 유대인들이 난치병에 걸린 상태에서 이집트로부터 쫓겨 나갔다고 주장하였다. "이집트의 왕 보코리스(Bocchoris) 통치 기간 중 문둥병과 괴혈병 그리고 다른 질병에 걸린 유대인들은 신전들을 피난처 삼아 구걸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질병의 피해자들이 많아졌고 온 이집트에는 기근이 닥쳤다. 보코리스 왕은 수확의 실패에 관해 아문 신의 신탁을 구하려고 사람을 보내었다. 신은 그에게 말하기를 불결하고 불경스러운 사람들로부터 신전을 정화시켜야 하며 나병 · 괴혈병 환자들을 멸절시키기 위해 그들을 광야로 쫓아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한 자들이 살아있다는 것에 태양신 '라' 가 매우 분노하고 있기 때문에, 신전들을 정화시킨 후에야 땅에서 소출이 증대하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탁을 받은 보코리스는 제사장들과 신하들을 제단으로 불러놓고 부정한 자들의 명단을 작성한 후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광야로 몰아내어 나병 환자들을 납으로 만든 철판으로 말아 바다에 빠뜨리도록 명령하였다. 나병 환자들과 괴혈병 환자들이 익사한 후 남은 자들은 한데 모아 멸절시키기 위해 광야로 몰아내었다"(《아피온 반박》 I. 305-308).
아프리카누스 : 예루살렘 출신의 교회사가인 아프리카누스는 저서 《연대기》(Chronographia)에서 힉소스의 지리적 기원을 페니키아로 보았다. 이러한 힉소스의 페니키아 기원설은 아바리스 발굴 결과 연대 및 지리적 분포의 시금석이 되는 텔 엘-예후디야 토기가 비블로스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과 연관성이 있다. 따라서 아바리스의 발굴자 비탁(Manfrd Bietak)은 제12 왕조 말기인 기원전 1800년경 비블로스 출신의 페니키아인들이 이집트 아바리스에 무역 공동체를 설립했다고 주장하였다. 나일 강의 펠루시움 지류에 위치한 아바리스가 일종의 무역항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비록 아직 기록물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역사적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이집트는 이미 고왕국 시대부터 백향목(cedar wood)을 구하기 위해 비블로스와 무역을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요세푸스 : "투티마이오스(Τουτιμαιος. 그의 통치 기간 중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신의 분노가 우리에게 닥쳤다.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한 민족이 동쪽에서부터 예고 없이 우리 나라로 쳐들어와서 전투도 치르지 않고 쉽게 정복해 버렸다. 통치자들을 제압한 후 그들은 도시를 무자비하게 불태워 버렸고 신전들을 약탈했으며 주민들을 매우 잔인하게 다루어 일부는 학살하고 나머지 부녀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잡아갔다"(《아피온 반박》 I. 75-76).
마네토의 왕 명단 중 투티마이오스가 과연 어느 왕인지 확실치 않다. 투티마이오스를 음절로 분석해 볼 때 '투 티마이오스' (του Τιμαιος)로 볼 수 있다. 또한 투티 마이오스는 토리노 왕 명단에 등장하는 제드-헤테프-라(Dd-htp-r') 데두-메스(Ddw-ms)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떤 경우이든 이 인물은 하 이집트의 코이스(Xois)에서 통치하였던 제14 왕조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76명의 통치자 중 마지막 왕으로 추정된다.
과연 힉소스의 이집트 진출은 마네토의 말처럼 단번에 파괴적으로 끝난 군사적인 정복이었는가? 한편으로는 마네토의 해석이 아마도 후시대에 아시리아(기원전 671, 666, 663), 바빌로니아(기원전 600, 567), 페르시아(기원전 525, 343), 알렉산드로스(기원전 332) 등의 이집트 원정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힉소스를 바라보는 전통적인 이집트 시각은 부정적이어서, 카모세 석비나 하트셉수트 기록 등에서는 그들이 이집트를 파괴시킨 장본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결국 그들 중 하나인 살리티스(Σαλιτις)를 왕으로 삼았다. 그는 멤피스에 거주하면서 상 · 하 이집트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방어에 적합한 지역마다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특별히 그는 장차 막강해질 아시리아가 그의 영토를 탐내서 공격할 것에 대비하여 동쪽 국경을 안전하게 지켰다. 그는 부바스티스 지류 동쪽에 위치한 사이스 주의 고대 신학 전승에서 아와리스(Αυαρις)라 불리는 한 곳을 선정하여 성벽을 쌓아 요새를 만든 다음 변방을 지키기 위한 24만 명의 수비대를 설치하였다. 그는 해마다 여름이면 이 곳을 방문하여 군인들에게 식량과 봉급을 주었고 외국인들을 위협하기 위하여 군사 훈련을 시켰으며, 19년간 통치한 후 죽었다. 두 번째 왕 브논(Bvov)이 그 뒤를 이어 44년을 통치하였다. 그의 후계자 아파크나스(Απαχνας)는 36년 7개월을 통치하였다. 그 다음 아포피스(Απωφις)는 61년, 안나스(Ιαννας)는 50년 1개월,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시스(Ασσις)는 49년과 2개월을 통치하였다" (《아피온 반박》 I. 75-78)
요세푸스는 마네토를 인용하여 힉소스의 어원을 '목자 왕' 으로 보면서 나름대로 자세한 언어학적 해설을 덧붙였다. "그들 모두의 인종은 힉소스, 즉 '목자 왕' 이라불렸는데, 거룩한 언어로 힉(hyk)은 '왕' 을 뜻하며 소스(sos)는 일반적으로 '목자' , 또는 '목자들' 을 의미한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아랍 민족이라고 한다. 다른 자료에서는 힉(hyk)이 '왕'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포로가 된 목자' 를 지칭한다. 실제로 이집트어 '힉' 이학(hak)으로 발음될 때는 곧 '포로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설이 더욱 설득력이 있고 고대 역사와도 잘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아피온 반박》 I. 82-83).
요세푸스는 오경에 나타난 대로 야곱 · 요셉을 기점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체류와 모세의 출애급이 힉소스의 이집트 침공 및 추방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전제하에 힉소스의 어원을 '포로' 와 연관시키고 있다. "그 후 테베(Thebes)와 이집트의 나머지 왕들이 목자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큰 전쟁이 일어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미스프라그무토시스(Μισφραγμουθωσις) 왕 때에 목자들이 패전하여 이집트 전 지역에서부터 쫓겨나가 1만 아루로스(αρουρως) 면적의 아바리스에 한정되었다. 마네토에 의하면 목자들은 그들의 재산과 전리품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지역을 거대하고 견고한 성벽으로 쌓았다. 미스프라그무토시스의 아들 툼모시스(Θουμμωσις)는 성벽에 48만 명의 군대를 집결시켜 포위함으로써 그들을 항복시켰다. 그의 목표 달성에 자포자기한 그들과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의하면 모두가 이집트를 떠나 편안히 살 장소로 나가는 것이었다. 이 조건들에 의해 모든 가족과 재산을 포함한 24만 명 정도의 인원이 이집트를 떠나서 광야를 지나 시리아로 향하였다. 그 후 아시아의 강자인 아시리아 민족의 군사력에 억눌려 그들은 유대 지역에 그들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한 도시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예루살렘이라 불렀다"(《아피온 반박》Ⅰ. 85-90) .
추방된 희소스가 왜 아시리아의 위협을 받았는지 마네토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전말을 알 수는 없다. 어떤 학자들은 아시리아를 시리아 민족, 또는 일반적인 가나안 민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요세푸스는 마네토의 기록을 근거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로 들어갔고 트로이 전쟁 1천 년 전에 이집트를 떠났다고 하였다. "이것이 마네토의 언급이다. 그가 열거한 햇수를 합하면 우리의 조상인 목자들은 다나오스(Danaos)가 아르고스로 오기 393년 전에 이집트를 떠나서 이 땅에 정착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르고스 사람들은 그를 가장 고대의 인물로 여기고 있다. 마네토는 이집트 문헌으로부터 두 가지 중요한 점에 관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우리는 어디에서인지 모르나 이집트로 들어갔고, 둘째, 우리는 트로이 전쟁 1천 년 전 까마득한 옛날에 이미 이집트를 떠났다"(《아피온 반박》 I. 103-104).
〔물질 문명〕 주거 분포 : 만일 힉소스를 기원전 17~16세기에 이집트를 통치하였던 특정 민족 집단으로 규정한다면 그들의 주거 분포는 힉소스의 수도였던 아바리스를 비롯한 하 이집트, 즉 나일 삼각주에 한정될 것이다. 하지만 인종적으로 그들의 원래 고향인 가나안 지역과 연관시킨다면 오늘날 이스라엘 지역도 당연히 힉소스의 지리적 영역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들의 동질성을 드러내는 토기 중에서도 비교적 보존성이 뛰어난 텔 엘-예후디야 토기를 기준으로 고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힉소스 민족의 분포는 하 이집트와 이스라엘 지역에서 거의 동일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집트에서는 아바리스(텔 엘-다바)를 비롯해서 피톰(텔 엘-마스쿠타), 레온토폴리스(텔 엘-예후디야) 등이 힉소스의 중심지로 밝혀졌다.
요새 건축 : 희소스 시대 요새의 가장 큰 특징으로 손꼽히는 토성(earthen embankment)과 경사면(glacis, rampart) 건설은 중기 청동기 II 시대(기원전 2000~1550)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에 걸친 광범위한 축성 현상이기 때문에 힉소스의 고유한 축성술로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의 힉소스 시대인 제2 중간기(기원전 1650~1550)에 토성과 경사면 건축이 절정에 달하였기 때문에, 이집트를 침공하여 정권을 잡았던 힉소스의 방어 전략과 연관시킬 수도 있다. 토성과 경사면 축성은 전차 부대의 도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기보다는 성벽 기초 부분을 뚫거나 특히 공성퇴의 접근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으며, 그 흔적은 시리아의 카르케미쉬, 카트나, 에블라, 이스라엘의 하초르(하솔), 아쉬켈론, 이집트의 텔 엘-예후디야, 헬리오폴리스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① 토성 : 기존의 도시를 대규모로 확장하고자 할 때, 단순히 평지에 성벽을 건설하는 것의 취약점을 보강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즉 기존의 도시는 대부분 주변 지역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성벽은 그 자체로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 되지만, 평지의 성벽은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먼저 거친 돌을 이용하여 도시의 윤곽을 따라 성벽의 핵심을 갖춘 다음 많은 양의 흙을 그 위에 덮어 대규모의 토성을 쌓는다. 토성에 필요한 흙을 파낸 지점은 성벽 바깥으로 자연스럽게 해자를 이루어서 방어력을 더욱 확고하게 해 준다. 경우에 따라서는 좀 더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토성 위에 별도의 성벽을 건설하기도 한다.
② 경사면 : 경사면은 성벽을 보강하기 위해 만들어지는데, 먼저 바깥쪽 바닥에 옹벽(revetment wall, retainment wall)을 세우고 이를 토대로 성벽 지점까지 흙과 돌을 채워 경사면을 만든다. 붕괴를 최소화하기 위해 흙과 돌을 경사면에 평행하게 차례로 덧입히는 이른바 '테르 피세'(terre pisée)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경사면의 표면은 우기의 비바람으로 인한 훼손을 방지하기 위하여 석고 처리하였으며, 경사면은 35도 이상의 기울기로 만들어진다.
토기 : 전통적으로 힉소스는 텔 엘-예후디야 토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토기는 대부분 향유병이나 물병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모양에 따라 서양배 향유병과 원통형 향유병으로 양분된다. 특히 이 토기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짙은 암갈색 표면에 흰색 가루가 들어간 작은 구멍들이 파여 있어서 매우 독특하기 때문이다. 1905년 영국의 고고학자 페트리가 이집트 북부의 희소스 유적지로 알려진 레온토폴리스, 즉 텔 엘-예후디야의 무덤을 발굴하였을 때 주목을 받게 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토기는 페니키아, 가나안, 그리고 이집트 삼각주 지역 등에 널리 퍼져 있으며, 주로 중기 청동기 IIB-C 시대인 기원전 1800~155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중왕국 시대와 신왕국 시대 사이의 과도기인 제2 중간기(제13~17 왕조)에 주로 발견된다. 아바리스의 발굴자인 비탁은 이곳에서 발견된 가나안 항아리와 텔 에-예후디아 토기류, 그리고 키프로스산 구리 제품 등의 유물 분석을 근거로 당시 이 도시에 페니키아, 므기또 등의 이스라엘 북부 지역, 그리고 키프로스 출신의 외국인들이 거주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바리스 : 힉소스의 수도인 아바리스(텔 엘-다바)는 지난 1966년 이후 집중적인 발굴을 통해 힉소스 물질 문명의 성격을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지로 자리잡았다. 아바리스는 기원전 2100년경 이집트 북동부 지역을 수비하기 위한 방어 요새로 처음 건설되었다가 기원전 2000년경 중왕국 시대가 시작되면서 대규모로 확장되었고, 가나안 출신의 이주민들을 수용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이집트인들에게 고용된 용병, 선원, 장인들이었다. F 구역의 d/1 주거층에서 발견된 무덤에는 당나귀의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시리아 스타일의 통도장, 그리고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권에서 제작된 토기와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기원전 18세기부터 아바리스는 이집트적인 도시였으며, 국제적인 물질 문명의 유입 흔적이 있다. 아바리스에서 발견된 가나안적인 토기들은 대부분 남부 가나안 지역의 것과 유사하며, 가자 지구의 샤룩헨(텔 엘-아줄), 페니키아의 비블로스, 그리고 시리아의 에블라에서 같은 시기에 출토된 유물과 유사성이 있다. 아바리스의 경우 제13 왕조 시대부터 제15 왕조 시대로 넘어가면서 가나안을 비롯한 인근 외국 지역의 물질 문명을 받아들여 급격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는 바로 여러 지역으로부터 이주민들이 아바리스에 들어와 정착한 결과라고 해석된다.
기원전 1800~ 1530년까지 약 270년 동안 아바리스는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중기 청동기 Ⅱ 시대의 문명과 거의 동일시될 정도로 물질 문명의 유사성을 보여 주고있다. 기원전 1720년경 제13 왕조의 소벡호텔 4세(Sobekhotep IV, 기원전 1712~1705) 시대부터 이집트 왕정이 불안해지면서 삼각주 지역에 아바리스가 새로운 정권 중심지로 떠올랐다. 따라서 F 주거층인 기원전 1700년 경부터 아바리스에는 대규모 저택들이 많이 건설되는 등, 이전과는 다른 대도시의 모습을 보여 준다. 아마 이때부터 힉소스의 중심 도시로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타니스(산 엘-하가르)에서 발견된 기록물에 의하면, 이 시기에 이미 힉소스의 주신인 세트(Seth) 숭배가 확립되었으며, '아바리스의 주인인 세트 신의 사랑하는 자'라는 인명이 등장한다. 세트 숭배는 헬리오폴리스의 구신계 중 오시리스와 대비되는 이집트 고유의 세트 신 숭배에 시리아의 폭풍우의 신 하다드/바알-차폰 신 숭배가 혼합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후 세트도 이집트의 폭풍우 신으로 여겨지지만, 일 년 중 거의 폭풍우 현상이 없는 이집트의 지리적인 현상과는 동떨어진 기능이다. 제15 왕조 시대의 아바리스의 면적은 약 4km²로 제13 왕조 시대의 2배에 달하며 약 15만 명의 인구를 수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560년경 서쪽 지역에 새로운 요새와 함께 성벽이 보강된 것으로 미루어 점점 강력해진 남쪽 테베의 제17 왕조 세력에 대비하였던 듯하다. 아포피스 통치 제33년인 기원전 1555년경 수학 문제를 다룬 린드 수학 파피루스가 기록되었다. 힉소스 시대 아바리스의 가장 특징적인 예술적 업적은 동쪽 구역에서 발견된 수백 점에 달하는 채색 벽화 조각들이다. 들소 사냥, 황소 뛰어넘기, 소싸움, 기계 체조, 사냥, 사슴을 덮치는 사자와 표범 등의 소재는 이 벽화가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권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또한 장미꽃 무늬와 미로 무늬 등은 크노소스 궁전의 벽화 주제를 그대로 보여 주는 것들이다. 아바리스는 시리아-팔레스티나뿐만 아니라 키프로스와도 국제 무역을 시도하였으며, 카모세 석비에 의하면 전차, 말, 선박, 목재, 금, 은, 청동, 라피스 라줄리, 터키옥, 청동제 도끼, 올리브 기름, 향, 기름, 꿀 등의 특산품을 수입한 것으로 나타난다.
〔힉소스 전승〕 이집트 역사 기록을 통해서 밝혀진 사실은 '아무'라 불리는 가나안 출신의 셈족들이 기원전 17~16세기에 걸쳐 약 1백 년 동안 이집트를 독자적으로 통치했으며 제17 왕조의 카모세 군대가 궁극적으로 힉소스의 중심지 아바리스를 점령함으로써 그들을 추방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힉소스에 관한 역사 전승은 사건 발생 약 1 ,200년 후 마네토에 의한 희소스 추방 사건의 자의적 해석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마네토는 역사상 최초로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희소스와 연관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마네토의 언급은 1966년 이후 힉소스의 중심 도시였던 아바리스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결과 그 물질 문명이 동시대 이스라엘 지역과 거의 일치한 결과를 통해 재차 확인되었다. 이집트 역사에 있어서 힉소스는 성서의 다른 민족과는 달리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항상 이집트인들의 시각에서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힉소스의 위상은 비교적 초기인 중왕국 시대에는 이집트를 방문하였던 이방민족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보통 명사였지만, 기원전 18세기부터 삼각주 지역에 유입되는 이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나아가 기원전 1650년경 아바리스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왕조를 형성한 이상 힉소스를 문자 그대로 '외국 땅의 통치자들' 로만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후시대의 마네토나 요세푸스의 견해처럼 한때 이집트를 점령하였다 추방된 가나안 민족의 특정한 집단으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1890년대부터 삼각주의 대표적인 힉소스 거주지로 알려진 피톰(텔 엘-마스쿠타)과 텔 엘-예후디야가 부분적으로 발굴되고, 특히 1966년 이후 힉소스의 수도인 아바리스가 집중적으로 발굴되어 힉소스의 물질 문명을 비교 분석한 결과 남부 가나안 민족의 한 부류임이 밝혀짐으로써 더욱 분명해졌다. 최근의 연구 경향은 힉소스를 이름만 달리한 가나안 민족의 한 부류로 여기고 있다. 희소스는 가나안과 이집트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창세기의 야곱 · 요셉 전승과 출애급 모세 전승의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적 배경의 기원이 된다는 점에서 좀 더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 라므세스 2세 ; 모세 ; 야곱 ; 요세푸스 ; 요셉 ; 이스라엘 ; 이집트 ; 출애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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