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주교. 라틴 교부. 교회 학자. 아리우스주의(Arianismus)에 반대하여 '서방 교회의 아타나시오' 라고 불리는 인물. 축일은 1월 13일.
〔생 애〕 힐라리오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예로니모(Hieronymus, 347~419)가 《명인록》(De viris illustribus, 393)에서 언급한 그의 작품들에서 생애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힐라리오는 310~320년 사이에 현재 프랑스 중서부 푸아티에(Poitiers)의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자서전적인 가치를 지니지는 않지만 문학적인 어투로 쓰여진 《삼위 일체론》(De Trinitate)의 서론(I, 1-14)에서 자신이 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는지 설명하고 있다. 즉 쾌락 생활의 한계와 철학자들의 모순에서 환멸을 느꼈고, 그가 갈구하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목마름을 성서 안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그는 살아 있는 하느님을 찾으려 노력하였고 결국 성서 안에서 사람이 되신 말씀을 알게 되었으며, 바오로 서간들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묵상을 통해 그의 신앙은 더욱 견고해졌다.《삼위 일체론》에서 그는 이교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자신의 영적 여정을 철학적 삶의 의미와 신 존재 문제에서 성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가 뛰어난 수사학적 · 철학적 · 문학적 교육을 받았음을 알 수 있지만,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힐라리오는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았고, 350년경 푸아티에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아리우스주의와의 갈등 :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Athanasius Alexandrinus, 295?~373)가 트리어(Trier)로 추방되고(334) 콘스탄틴 대제(306~337)가 사망한 뒤, 아리우스 논쟁은 서방 제국에서 점차 확산되어 제국의 절반이 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트리어와 로마(Roma)에서는 아타나시오의 신학적 · 교회 정치적 노선이 많은 지지를 얻었으나, 콘스탄틴 대제의 세 아들이 벌인 정치적 권력투쟁 속에서 근본적인 신학 논쟁은 점점 과열되어 갔다. 서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는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니체아 공의회(325)의 정통 신앙보다는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355년의 밀라노 교회 회의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신학 논쟁의 결론을 이끌어 내려는 황제와 제국 정치와 타협하고 있었던 서방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압력으로, 니체아 정통 신앙파의 버팀목이었던 아타나시오는 이집트 사막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서방 세계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으나, 아리우스주의자들은 과격한 태도를 서슴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힐라리오가 공개적으로 교회 회의의 결정에 반대하게 된 동기인 듯하다. 그는 제1차 니체아 공의회에서 사용한 "동일 본성"(όμοούσιος)이라는 용어를 들어 본 적이 없었으나, 밀라노 교회 회의의 결정에 반대함으로써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갈리아에서 영향력 있는 아리우스주의자이던 아를(Arles)의 주교 사투르니누스(Saturninus)는 356년 봄의 베지에(Béziers) 교회 회의에서 힐라리오를 단죄하였으며, 부제(副帝, Caesar) 율리아누스(361~363)는 그를 프리기아(Phrygia)로 추방하였다.
유배 생활 : 4년에 걸친 유배 생활은 힐라리오가 문화적 · 신학적으로 크게 성장하도록 해 주었으며, 서방 교회의 주교로서 동방 교회에 머물며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학 논쟁, 특히 아리우스 논쟁의 문제점을 알게 된 결정적인 시기였다. 그는 상당히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갈리아 지역의 주교들과도 꾸준히 편지를 주고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테르툴리아노(Q.S.F. Tertullianus, 155?~230/240?)의 영향을 받았던 유물론적 잔재를 버리고 플라톤적 영성으로 돌아섰으며, 그리스어로 기록된 그리스도인 저술가들의 작품을 접하였고, 특히 그 자신의 영성과 성서 이해에 감명을 준 오리제네스(Origenes, 185~253)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아시아에서 우세하던 유사 본질파(ὁμοιούσιος), 반아리우스파와 반니체아파들과도 접촉하면서 아리우스 논쟁의 핵심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는 문제점과 지향이 서로 다른 두 이단, 곧 서방 교회에서 다소 미미하였던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us)의 위험을 안고 있는 극단적 니체아주의(반아리우스파)와 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질을 완전히 부정하는 비유사 본질파(반니체아파) 사이에서, 니체아 공의회에서 사용하였던 '동일 본성' 이란 신학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삼위 일체에 대한 정통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신학적 중도를 추구하였다.
힐라리오가 유배된 시기 동안 시르미움(Sirmium, 357), 리미니(Rimini, 359), 셀레우치아(Seleucia, 359. 9) 교회 회의가 개최되었다. 특히 시르미움 교회 회의는 정치적으로나 교회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다루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버지 콘스탄틴 대제 이후 제국을 다시 통일하였으며, 아리우스주의에 대해 불굴의 정신으로 대응한 아타나시오를 평화 교란자로 여겨 단죄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인 콘스탄틴 대제가 이전에 니체아 공의회에서 행한 것처럼 통일된 신학으로 제국과 교회의 이상적 일치를 회복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신지두눔(Singidunum)의 주교인 우르사치우스(Ursacius), 무르사(Mursa)의 주교 발렌스(Valens), 시르미움의 주교 게르미누스(Geminius)를 조언자로 두고 교회 회의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시르미움 교회 회의는 성자가 성부께 명백히 종속됨을 천명하고, 특히 동일 본질과 유사 본질 개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신학 선언(제2차 시르미움 정식)을 결의하였다. 교황 리베리오(352~366)와 코르도바의 호시오(Hosius de Cordubensis, 256/257?-357/358?) 주교도 이 정식에 서명한 듯하며, 힐라리오만이 《발렌스와 우르사치우스 논박 제1서》(Liber primus adversus Valentem et Ursacium)를 저술하여 이 선언을 단죄하였다.
삼위 일체 논쟁 : 이에 대한 반응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인물, 즉 336년 안치라(Ancyra)의 주교 바실리오 (Basilius, ?~363?)에게서 나타났다. 그는 358년 부활절 이전 안치라에서 12명의 주교만 참석한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들은 성부와 성자가 전혀 비슷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과격한 아리우스파( '비' 유사파)에 반대하는 동시에 니체아 신앙 고백의 '동일 본성' 대신에 '유사'(類似) 개념을 새로 끌어들여 중용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 '유사 본질파' 는 황제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안티오키아(341)와 시르미움(351) 교회 회의의 결의를 증거로 358년 시르미움 교회 회의에서 비유사파의 지도적 인물인 아에티우스(Aetius, ?~365)와 에우노미우스(Eunomius, 325?~394)를 단죄하였으며, 힐라리오에게 유사 본질파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힐라리오는 《교회 회의론》(De synodis)에서 갈리아 지방의 주교들에게 유사 본질파 신학을 니체아 신앙 고백의 정통적인 해석으로, 아울러 동방과 서방의 일치 정식으로 제안하였다. 그는 이 제안에서 동방의 니체아 신앙 고백을 통찰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359년에 개최하기로 계획한 제국 교회 회의를 준비하며 서방의 반아리우스파였던 니체아파와 동방의 반아리우스파인 반니체아파 사이에 일치된 공동 전선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동방과 서방의 분열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 그의 이러한 노력은 무산되고 말았다.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는 359년 서방에서는 리미니 교회 회의를, 동방에서는 셀레우치아 교회 회의를 동시에 개최하여 성자와 성부는 "성서 말씀에 따라 비슷하다" (유사파)라는 모호한 결론을 내려 버린 것이다. 힐라리오는 《콘스탄티우스 논박서》(Contra Constantium Augustum Liber)에서 황제의 이중 교회 회의 조치에 대해 신랄하게 논박하고, 그를 네로(54~68)와 데치우스(249~251) 황제보다 더 나쁜 독재자라고 비난하였다. 이 작품은 황제가 서거한 후에 서방 주교들에게 전달되었다.
359년의 교회 회의가 끝나자 유사 본질파와 아리우스파들은 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황제가 거주하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olis)로 향하다가, 리미니 교회 회의에 참석하였던 서방 주교들이 황제의 압력에 굴복해 아리우스파의 신앙 고백에 서명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에 동요한 힐라리오는 황제에게 리미니 교회 회의에 참석한 사투르니누스와의 공개 토론을 요청하였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말년의 활동 : 주교의 직무에 복직되지 않고 귀환하는 것만을 허락받은 힐라리오가 갈리아로 돌아왔을 때, 아리우스 논쟁에서 중립을 유지하면서 반아리우스파의 권리 회복을 지지하던 율리아누스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새로운 정치적 상황, 곧 콘스탄티우스 2세가 361년 11월 3일 서거하고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그를 계승하여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기 때문에, 힐라리오는 서방에서 자신의 신학적 노선을 교회 정치적으로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360/361년의 파리 교회 회의에서 교의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도 중립을 유지하면서 유사 본질파와 비유사 본질파의 화해 정책에 따라 리미니와 셀레우치아 교회 회의의 결정을 파기하려고 활발히 활동하였다. 또한 서방의 아리우스파 주동자들만 단죄하였고, 리미니와 다른 교회 회의에서 압력 때문에 이단에 굴복하였던 많은 주교들에게는 충분한 이해와 관면을 베풀었다. 이에 따라 갈리아에서는 곧 아리우스주의의 잔재가 청산되어 다른 지역의 주교들에게 균형과 중용의 모범을 보여 주게 되었다. 364년에 힐라리오는 베르첼리(Vercelli)의 주교인 에우세비오(Eusebius, +370/371?)와 함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364~375)를 통해 355년부터 밀라노의 주교였던 아리우스주의자 아욱센티우스(Auxentius)를 축출하려고 노력하였다. 결과적으로 그 노력은 좌절되었지만, 갈리아와 북이탈리아 지역을 반아리우스 교회로 다시 조직하기 위해 활동하면서 그들의 영향력은 매우 커졌다.
힐라리오는 생애 말기에 신학 작품을 저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례에 찬가를 도입하였고, 그의 제자이자 후에 투르의 주교가 된 마르티노(Martinus Turonensis, 316?~397)와 함께 갈리아 지방에서 수도원 제도를 장려하였다. 367년 또는 368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1851년 5월 13일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그에게 '교회 학자'(Doctor Ecclesiae)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교의 신학적 작품〕 《삼위 일체론》 : 힐라리오의 주저는 총 12권으로 이루어진 《삼위 일체론》이다. 이 책의 원제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예로니모는 《아리우스주의자 논박》(Adversus Arrianos)으로 전하고 있고, 다른 이들은 《신앙론》(De fide)이라고 알고 있으며, 훨씬 오래된 필사본들은 제목 없이 전해지고 있다. 10권 4절의 표현에 따르면 이 책은 유배 기간(356~360) 중에 집필되었다. 힐라리오는 작품 초반에 사벨리우스주의나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하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설명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프리기아에서의 유배 기간동안 비유사파들과 만났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야 가능한 것이며, 12권의 마지막 부분(55~56장)을 살펴보면 이 작품이 유배 기간을 마치고 갈리아로 되돌아오기 전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앞서 다룬 주제들과 무관하게 이 부분만이 12권에 첨가된 부록 형식으로 되어 있고, 성령에 대한 오류 반박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마지막 부분은 360년경 동방교회에서 시작된 성령론 논쟁의 첫 조짐과 이후에 서방교회에서 발생하게 될 새로운 문제에 대해 동방 교회에 머물렀던 힐라리오만이 알고 있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삼위 일체론》은 아리우스주의와 벌인 논쟁에서 동방과 서방의 신학을 결합한 서방 교회 최초의 작품이다. 힐라리오는 세례 신앙과 성서 해석을 토대로 정통 삼위 일체론을 변론하고 더 나아가 삼위 일체의 신학 원칙을 전개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학을 주로 테르툴리아노와 노바시아누스(Novatianus, 200?~?)의 삼위 일체에 관한 신학 작품 및 유사 본질파 신학에 바탕을 두었지만,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도 제시하였다. 특히 반대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한 구체적인 유추를 뛰어넘는 높은 수준의 추상 개념을 사용하면서 성서를 주석하였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권은 입문서이다. 1~14장은 서론으로 인간의 철학에서 성서의 신앙으로 하느님의 진리를 찾는 방법을 다루고 있으며, 15~16장에서는 정통적인 가르침을 해치는 이단자들을 열거하고, 17~19장에서는 정통 신앙을 이해하는 원칙을 열거한다. 20~36장에서는 나머지 11권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설명하며, 37~38장은 기도로 끝맺는다. 제2~3권에서는 정통적인 삼위 일체 신앙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며, 제4~12권에서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이 비판하는 삼위 일체 신앙을 변론한다. 특히 제4~6권에서는 아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데르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반박의 글을 실었으며, 아리우스의 주요한 논거(성자의 신성과 영원성의 부인, 성자가 피조물이라는 주장)는 제4권 12~13장에서 인용되었다. 힐라리오는 반대 논증을 위해 특히 구약성서의 예를 많이 들었는데, 이 경우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성자의 가변성과 피조물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논거로 드는 구약성서의 현현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성자를 변화시키지 않듯이, 이는 탄생의 예시와 현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잠언 8장 22절에 따라 성자는 "주님께서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창조되었다. 따라서 그는 육화로 창조되지 않았고, 구약성서에서는 창조 이전의 상태로 나타났다고 하였다. 제7권에서는 설득력 있는 성서 구절을 다시 인용하면서 성자와 성부의 동일 본질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성서 구절에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다"(요한 5, 18),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요한 10, 30),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 19)이 있다. 제8~12권에서는 성자가 지닌 본성의 종속성에 바탕을 둔 아리우스주의의 중심적인 근본 원리를 반박하였다. 즉 성부와 성자의 일치는 본성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의지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8권), 작용 · 덕 · 명예 · 권능 · 영광 · 생명은 성부와 마찬가지로 성자에게도 속한다(9권),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수난의 의미(10권), 성자가 성부께 영원히 복종(1고린 15, 28)하는 것은 패배나 약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치와 동일함을 상징으로 나타낸 것이다(11권), 잠언 8장 22절에 따라 성자가 창조 이전에 태어났다(12권)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인간의 모든 생각이나 개념을 뛰어넘는 하느님께 드리는 긴 기도로 끝난다(12권 52~57장).
《교회 회의론》 : 힐라리오는 359년 초에 리미니와 셀레우치아 교회 회의를 준비하는 동안 《삼위 일체론》을 저술하면서 갈리아 주교들과 근접한 지역의 주교들과 동방의 반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보내는 《교회 회의론》 역시 함께 집필하였다. 이 작품 첫 부분(1~65장)에서 힐라리오는 357년의 '제2차 시르미움 정식' 에서 실마리를 얻고, 341~357년까지 동방의 주교들이 공포하고 서방 주교들이 아리우스적인 신앙 표현이라고 간주한 다양한 신앙 고백 정식들을 검토하였다. 그는 가장 극단적인 357년의 '제2차 시르미움 정식' 을 아리우스 신앙 정식이라고 단죄하였으며, 다른 신앙 정식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서방 신학과의 양립 가능성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둘째 부분(66~92장)에서는 동일 본질과 유사 본질을 비교하면서, 이 두 용어는 정통적으로나 이단적으로 모두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이 작품은 동 · 서방 교회를 가르는 용어의 차이점을 뛰어 넘어 동 · 서방의 신학적 차이점을 최소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반아리우스주의자들과의 화해를 목적으로 저술한 것이었다. 즉 서방에서는 처음으로 동방 교회의 총체적인 실재에 대한 충만한 이해를 보여 주는 작품이었지만, 이 《교회 회의론》은 서방 교회의 극단주의자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엄격주의자인 칼리아리(Cagliari, Caralis)의 루치페로(Luciferus, ?~370/371?)는 이 작품이 반니체아적인 동방 교회 신학에 너무 관용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비난하였다. 이 작품은 힐라리오가 루치페로의 비난에 대해 변론하는 짧은 부록에 덧붙여져 전해지고 있다.
〔역사적 작품〕 <콘스탄티우스에게 보낸 첫 번째 서간> : <콘스탄티우스에게 보낸 첫 번째 서간>(Ad Constantium Augustum Liber Primus)은 오랫동안 두 개의 본문이 합성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아마도 《역사적 단편들》(Fragmenta historica)로 알려진 선집에 속하는 것인 듯하다. 첫째 본문은 세르디카의 교회 회의에 모인 서방 주교들이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보낸 서간으로 니체아 신앙의 옹호자들에게 가하는 박해를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다. 둘째 부분은 힐라리오의 해설 본문으로 밀라노 교회 회의(355)가 아타나시오와 베르첼리의 에우세비오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하면서 그 무효를 언급하고 있다. 이 서간은 356년의 유배 이전, 사건이 전개된 직후에 쓰여졌다.
<콘스탄티우스에게 보낸 두 번째 서간>과 《콘스탄티우스 논박서》 : <콘스탄티우스에게 보낸 두 번째 서간>(Ad Constantium Augustum Liber Secundus)은 35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쓰여졌다. 힐라리오는 셀레우치아 교회 회의 후에 콘스탄티노플에 머물고 있던 아를의 아리우스파 주교 사투르니누스와의 공개 토론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또한 리미니에서 공포된 신앙의 새로운 정식을 받아들이지 말고 니체아 공의회에서 축성된 세례 신앙으로 되돌아오기를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의 요청은 어떠한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결국 황제가 아리우스 주의적인 신앙을 옹호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리미니(359)와 콘스탄티노플(360)의 사건들에 분개한 힐라리오는, 《콘스탄티우스 논박서》라 불리는 소책자 안에서 잔인한 독설로 황제를 비난하였다. 드러내놓고 처벌하는 것 이상으로 상대를 복종시키기 위해 겉으로는 상냥한 척하면서 기만하는 황제가, 터놓고 상대해야 할 네로나 데키우스보다 더 나쁘다는 것이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을 반대하는 통례적인 비난들은 힐라리오가 참여했던 셀레우치아 교회 회의에 관계된 중요 사항으로 기록되었다. 예로니모는 《명인록》에서 힐라리오가 이 소책자를 콘스탄티우스가 죽은 후에 저술하였다고 언급하였으나, 이 소책자를 쓴 시기에 힐라리오가 여전히 유배 중이었던 것으로 보아 콘스탄티우스도 생존해 있던 시기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아욱센티우스 논박> : <반아욱센티우스 논박>(Liber contra Auxentium)은 힐라리오와 베르첼리의 에우세비오가 밀라노의 아리우스파 주교인 아욱센티우스를 파면시키려고 한 이후인 364년에 쓰여졌다. 가톨릭 주교들과 신자들에게 보낸 짧은 서간 형식으로 밀라노(Milano)에서 있었던 일들, 자신들의 리미니 신앙 정식에 대한 공격과 활동에 대한 아욱센티우스의 교활한 반응을 기록하였다.
《역사적 단편들》 : 아리우스 논쟁에 관계된 문헌들을 수집하여 1598년(《PL》 10)에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1916년(《CSEL》 65)에는 페더(A. Feder)가 보다 많은 사본들을 바탕으로 새롭게 단장한 제목과 배열로 재출판되었다. 첫 부분은 서문과 함께 세르디카 교회 회의에 관계된 다양한 문서들을 통합하였고 해가 지남에 따라 힐라리오의 폭넓은 설명이 첨가되어 있는 문헌들도 포함되었다. 이른바 <콘스탄티우스에게 보낸 첫 번째 서간>이 포함되어 있다. 둘째 부분은 리미니 교회 회의에 관계된 문헌들을 다루며 리베리오 교황의 서간들도 첨부되어 있으며, 셋째 부분은 359년 이후 366년까지의 후대 문헌들을 포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서간은 343~366년까지 서방 교회에서 진행되었던 아리우스 논쟁을 파악하기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작품이다.
〔성서 주석 작품〕 《마태오 복음 주석》(Commentarii in Matthaeum)은 몇몇 신학적 주제의 고대성과 인간학적인 환경에 약간의 물질주의적인 색채가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유배 이전(356)에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시편 주석》(Commentarii in Psalmos)이나 《신비론》에는 오리제네스의 영향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태오 복음 주석》 : 유배 이전에 기록되었으며 아주 단편적인 작품으로, 마태오 복음서 안에 언급된 주요 사건들을 짧게 또는 더 확대한 주석으로 설명하였다. 힐라리오의 다른 두 편의 성서 주석 작품들처럼 이 작품도 앞서 행했던 강론들의 흔적을 나타내지 않는 연속적인 작품(Opera continuum) 형태로 소개되고 있다. 힐라리오는 문자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영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우의적 해석 방법을 선호하였으며, 마태오 복음서의 영적인 의미를 보다 체계적이고 동일한 방법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영적 의미는 본문의 문자에 이미 잘 표현된 사실들을 발전시키고 그곳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결과들에 비추어 예수의 언어와 행위들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것들 안에서 새로 탄생하는 교회와 비교하여 낡은 율법의 폐지, 이방인들에게 메시지 선포, 유대인들의 적대감에 대한 예표를 식별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여전히 불완전한 삼위 일체론을 소개하며 인간학적 물질주의(예를 들면 영혼의 육체성)를 보여 주고 있다.
《시편 주석》 : 유배 기간 동안 오리제네스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플라톤적 영성주의로 전환한 힐라리오가 유배 이후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50장 이상의 시편 주석이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은 분명 내용이 더욱 확대된 것이나, 힐라리오가 일반적으로 시편 전체를 설명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예로니모는 미완성된 이 작품을 알고 있었다. 힐라리오가 간혹 문자적으로, 또는 의미적으로 오리제네스의 시편 주석을 많이 모방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을 비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일부분만 비슷할 뿐 나머지 부분은 힐라리오가 더욱 발전시켰기 때문에 전체 작품은 전형적으로 오리제네스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즉 힐라리오가 전체적으로 원형에 아주 가까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신비론》 : 이 작품은 유배 이후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며, 1887년 아레초의 필사본을 토대로 출판되었다. 서문에서 힐라리오는 모든 성서는 사실과 언행으로 그리스도의 육화를 표현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성서 주해 기준은 구약성서의 해석에도 적용되었다. 이 작품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다루었던 몇몇 유명한 일화 등을 알렉산드리아의 전형적인 취향으로 해석하고 있다.
《찬가》 : 힐라리오는 서방 교회에서 찬가 활동을 증언해 주는 최초의 인물이다. 비교적 완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아레초 필사본의 세 찬가는 당시 라틴 시의 고전적인 규칙에 따라 다양한 서정시 음율로 구성된 절과 복잡한 형태로 다양한 주제, 즉 삼위 일체(Ante saecula), 세례(Fefellit saevam), 그리스도(Adae carnis)에 대해 다루고 있다. 힐라리오의 찬가 활동은 아리우스 논쟁의 맥락 안에서 접목되었다. (→ 교부 ; 교부학 ; 교회 학자 ; 라틴 교부 ; 아리우스주의 ; 아타나시오, 알렉산드리아의 ; 호시오)
※ 참고문헌 A. Di Berardino, Patrologia, vol. Ⅲ, Marietti, Casale Monferrato, 1992/ —, Dizionario Patristico e di Antichita' Cristiane, Marietti, Casale Monferrato, 1994/ A. Hamman, Dictionnaire des Pères de l'Eglise, Desclée De Brouwer, Paris, 1977/ H.R. Drobner, Lehrbuch der Patrologie, Herder, Freiburg im Breisgau, 1994/ C. Kannengiessen, 《DSp》 7, pp. 466~499/ E. Rapisarda, 《EC》 6, pp. 1614~1616/ H.C. Brennec
ke, 《TRE》 15, pp. 315~322/ J. Doignon, 《RAC》 15, pp. 139~ 167/ M. Durst, 《LThK》 5, 1996, pp. 100~102/ R. Gazeau, 《Cath》 5, pp. 735~736/ S.J. Mckenna, 《NCE》 6, pp. 1114~1116/ X. Le Bachelet, 《DTC》 6, pp. 2388~2462. 〔安奉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