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세기 후반부터 서기 25년경까지 활동한 힐렐(Hilllel the elder, ?~?)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학파로, 율법을 온건하고 융통성 있게 해석한 바리사이파(Pharisaei)의 양대 분파 중 하나. 샴마이 학파(schola Shammai)와 함께 유대교 사회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가믈리엘(Rabban Gamliel Ha-zaqen, 사도 5, 34-40)이 힐렐의 손자이다.
〔힐렐의 생애〕 힐렐은 예수의 공생활 직전에 유대인들의 정신적 · 신학적인 지주 역할을 하며 바리사이파를 이끌던 스승이었다. 탈무드(Talmud)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30년경에 명성을 얻었으며(bShab 15a), 예루살렘의 성전 파괴(서기 70) 후에 유대 사상의 주류가 되는 랍비-유대 사상을 정초한 인물이다(mHag 2, 2). 그러나 힐렐이 탈무드와 같은 유대 문학에서 랍비라는 호칭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아마도 본래부터 다른 호칭 없이 힐렐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오던 전승을 있는 그대로 전하려는 의도이거나, 또는 후대의 랍비들과 구별되는 힐렐의 특별한 사상적 위상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힐렐은 팔레스티나 출신이 아니라 바빌론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 토라(Torah)를 공부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왔으나, 바빌론을 떠날 당시 이미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고 한다(yPes 6, 1 ; 33a ; Sifra Tazriach 9, 16 ; tNeg 1, 16 등). 예루살렘에서 그는 셰마이아(Schemaia)와 아브탈욘(Avtalyon) 밑에서 수학하였다. 처음 공적으로 율법을 해석한 것은 안식일에 과월절 양을 죽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으며(yPes 6, 1 : 33a : tPes 4,13 : pPes 66ab), 아마도 이 해석을 통해 권위 있는 율법학자로 인정받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는 '힐렐의 7가지 미도트(middot)'라고 불리는 율법의 7가지 해석 법칙으로 유명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쉬운 것으로부터 어려운 것을 해석할 수 있다. 둘째, 유비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셋째, 한 율법의 해석은 연관된 다른 율법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넷째, 두 율법의 해석이 동일할 때에 그 해석은 일반화될 수 있다. 다섯째, 일반적인 것은 특별한 것에 의해, 그리고 특별한 것은 일반적인 것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 여섯째, 한 율법의 해석은 유사한 다른 율법의 해석에 사용될 수 있다. 일곱째, 한 율법의 해석은 인접한 문장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윗이 구약성서에서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힐렐은 유대 문학에서 가장 이상적인 현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그의 행적에 정확한 역사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러한 기록들이 역사를 왜곡하거나 조작하였다고 치부하기보다는 문학적 과장을 동반한 역사적 해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힐렐은 자주 삼마이(Shammai ha-Zaken, 기원전 50~서기 30)와 비교되면서 등장한다. 예를 들어 어느 개종자가 찾아와 자신이 한쪽 다리로 서 있는 동안, 즉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모든 토라를 배우고 싶다고 하자 샴마이는 그를 쫓아내지만 힐렐은 모든 토라의 내용을 황금률로 압축하여 설명해 주었다. 즉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너의 이웃에게 해서는 안 된다"(탈무드 bShab 31a). 이 이야기에서도 드러나듯이 힐렐은 샴마이보다 관대하고 지혜로우며 폭넓은 신학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또 힐렐이 어떤 노예를 시중드는 장면을 통해, 그가 신명기 15장 8절에 드러나는 토라의 정신에 얼마나 충실히 살고 있는지가 묘사된다(tPea 4, 10 : bKet).
힐렐의 율법 해석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안식년에 대한 해석이다. 율법(신명 15, 1-2. 10-11)에 따르면 안식년에는 서로에게 진 빚을 탕감해 주도록 되어 있었던 탓에 사람들이 궁핍한 이웃에게 꾸어 주는 것을 회피하자, 힐렐은 사람들이 안식년에 빚을 청구하지 않더라도 그 후 소급하여 빚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율법 해석을 제시하였다(SifDev 113 ; mShevi 10, 2-4). 이와 같이 힐렐이 한 것으로 전해지는 율법 해석들은 사회적 · 윤리적 지향성을 띤다. 미쉬나(Misha)의 제3부 9편 조상 · 조상의 어록(אבות)에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힐렐의 언사를 많이 전하면서, 그의 가르침이 갖는 윤리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힐렐에 대한 보도는 그의 언사에 걸맞게 이루어져 그를 모든 랍비들의 이상적인 전형으로 보여 주고 있다. 즉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좇으며 아론의 제자가 되어라" (mAv 1, 12), "내가 내 자신을 위해 있지 않다면 누가 나를 위해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해 있다면, 나는 과연 무엇인가?"(mAv 1, 14), "너를 공동체로부터 떼어 놓지 마라" (mAv 2, 4). 또한 "힐렐은 가난했기에 학교에 갈 비용을 마련할 수 없었지만 스승의 강의를 듣기 위해 눈보라가 치는 날에도 학교의 천장 창문에 매달릴 정도로 열심히 토라 연구를 하였다" (bYom 35b)라고 하였으며, 에즈라와 힐렐을 비교하면서 둘 다 "토라를 연구하기 위하여 바빌론에서 왔다" (bSuk 20a)라고 하였다. 힐렐도 모세처럼 120세를 살았고 마지막 40년 동안은 이스라엘을 이끌었다(SifDev 357)고 하며, 후대에 야브네(Jabneh, Jamnia)에서 랍비- 유대 사상을 정초한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는 힐렐의 제자였다(mAv 2, 8). 즉 요하난 벤 자카이로부터 출발하는 랍비-유대 사상의 정통성을 그가 힐렐의 제자라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을 정도로 유대에서 힐렐의 사상적 비중은 매우 크다.
〔힐렐 학파〕 유대 문학은 대부분 율법에 대한 토론과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초기의 할라카(הלכה) 논쟁에 있어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대립적인 학파가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이다. 두 학파의 논쟁이 유대 문학에 등장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샴마이 학파의 견해가 먼저 소개되고 힐렐 학파의 견해가 뒤이어 등장하여, 할라카는 힐렐 학파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샴마이 학파의 견해가 일방적으로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힐렐 학파의 견해가 선호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샴마이 학파의 견해는 ~하고 힐렐 학파의 견해는 ~한데, 할라카는 힐렐 학파의 견해이다"라는 식의 표현을 통해 샴마이 학파의 견해 역시 존중하고 있다. 추측하건대 서기 1세기경에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전에 두 학파가 학문적으로 대립하다가, 1세기 말에 균형이 점차 힐렐 학파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 유대 사상은 힐렐 학파의 제자들에 의해 주도되어 랍비-유대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 샴마이 학파 ; → 가믈리엘 ; 요하난 벤 자카이 ; 유대교 ; 할라카)
※ 참고문헌 W. Bacher, 《JE》 6, pp. 397~400/ I. Elbogen, Die Ueberlieferung von Hillel, FS Leo BAaeck, Berlin, 1938, pp. 67~78/E.M. Gershfield, Hillel, Shammai, and the three proselytes, 《CJud》 21, 1967, pp. 29~39/ A. Guttmann, Hillelites and Shammaites-A Clarification, 《HUCA》 28, 1957, pp. 115~126/ A. Kaminka, Hillel's Life and Work, 《JQR》 30, 1939, pp. 107~122/ Sh. Safrai, Bet Hilllel and Bet Shammai, 《EJ》 4, pp. 737~741/ I. Sonne, The Schools of Shammai and Hillel seen from within, FS Louis Ginzberg, New York, 1945, pp.275~291. [崔昇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