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몽, 쟝-조셉 드 (1736~1812?)
Grammont, Jean-Joseph 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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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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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랑몽 신부가 르통달 신부에게 보낸 1790년 6월 23일자 서한.
프랑스 예수회 회원. 중국 선교사. 중국명은 양동재 (梁棟材).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의 영세 신부이다. 프 랑스 오슈(Auch) 근처 그랑몽 성(城)에서 출생하였다. 1750년 예수회에 들어가 제노바에서 수련하고 1770년 에 서원한 그는,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768년에 중 국에 도착하였다. 이어 궁정(宮廷) 수학자 자격으로 북 경에 보내졌고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의 포교 본부인 북당(北堂)에 정착하였다. 학문 활동 외에도 만주어를 배워 통역도 하였으며, 예수회를 지원하거나 성직을 지 망하는 중국 젊은이들에게 라틴어도 가르쳤다. 또한 훌 륭한 음악가로서 바이올린을 즐겨 연주하였고 축일이면 그것으로 성가 반주도 하였다. 그런데 1775년 예수회의 해산령이 유럽에 이어 중국에도 선포되었으므로, 프랑스 예수회 회원들은 모두 북당을 떠나야 하였다. 그러나 그 랑몽 신부를 비롯한 방타봉(de Ventavon) 등 6명의 예수 회원은 1785년까지 북당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그 결 과 그랑몽 신부는 이승훈이 1784년 초에 북당을 찾아와 영세를 청하였을 때 그에게 영세를 줄 수 있었다. 이때 방타봉 신부가 그 장면을 목격하였고 서양의 동료 신부 들에게 이승훈의 영세 경위를 자세히 보고하였다. 한편 1789년 말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낸 이승훈의 편 지에 의하면, 1784년 말 밀사(密使) 편에 그랑몽 신부에 게 편지를 보내 교회 서적을 보내 주도록 요청하였고, 그 밀사는 그랑몽 신부로부터 회신과 서적을 받아 가지고 귀국하던 중, 서울에서 일어난 박해의 여파로 1785년 4 월(음) 국경에서 체포되었다. 사형은 면하였으나 그랑몽 신부의 회신과 책은 모두 압수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에 쓴 그랑몽 신부의 편지(1790. 6. 23)에는 그런 내 용이 없다. 다만 1790년 초에 윤유일이 이승훈의 편지 를 가지고 북당으로 그를 찾아왔을 때, 떠났다는 말을 듣 고는 울음을 터뜨렸다는 내용만 나와 있다. 실제로 이승 훈이 그랑몽 신부에게 1784년 말에 편지를 보냈다면, 물론 그랑몽 신부가 1785년 정확히 몇 월에 북경을 떠 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프랑스의 성 라자로회 선교 사들이 프랑스 예수회원들을 대신하여 북당에 부임한 것 을 4월 이후로 볼 때 이승훈의 편지를 받았을 것이 확실 하다. 그는 1785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황제의 승락하에 광동성(廣東省)의 광주(廣州)로 갔다. 그는 광주에서도 궁정 수학자란 영직 때문에 지방관들로부터 최고의 존경 과 대우를 받았으며, 그것을 이용하여 추방당한 선교사 들을 최대한으로 보호하고 돌보았다. 이후 그는 유럽으 로 돌아가려 할 때 1790년 북경으로 돌아오라는 황제의 명을 받았다. 그가 북경으로 돌아간 것은 1790년 말이 었을 것이다. 건강상 선교사들과 공동 생활을 할 수 없었 기 때문에 400냥의 연금으로 하인들을 거느리고 따로 살았던 그는, 1802년 예수회에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 의 사망 장소와 사망 연도는 확실하지가 않다. 마카오에 서 1808년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1812년 이전에 북당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 러나 그의 묘는 북경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가 남긴 서한은 20여 편이 되지만 한국 교회와 관련된 것으로는 그가 광주에 있을 때, 즉 파리 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 의 르통달 신부에게 보낸 1790년 6일 23일자 서한 한 통뿐이다. (-> 이승훈) ※ 참고문헌 Louis Pfister, Notices biographiques et bibliographiques sur les Jesuites de l'ancienne Mission de Chine 1552~1773, t. 2. Chang-Hai, 1934, n. 433, pp. 958~962. [崔奭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