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Grego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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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1세 교황.
① 그레고리오 1세(540?~604) : 성인. 제64대 교황 (590~604). 교회 학자. 축일은 9월 3일. 이탈리아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이미 두 명의 교황, 펠릭스 3세(St. Felix Ⅲ, 526~530)와 아가페토 1세(St. Agapetus, 535~536)를 배출한 로마 귀족 가문이 었다. 법학을 포함하여 귀족 계층의 고등 교육을 받았고 573년경에 로마 시장이 되었다. 574년경에 아버지 구르 디아누스가 사망하자 로마 철리오 언덕에 있는 부모의 저택을 성 베네딕도 규율을 따르는 수도원(성 안드레아 수 도원)으로 만들고 이 수도원에 입회하여 오래 전부터 갈 망해 왔던 수도 생활을 시작했고 시칠리아에 있는 가족 토지에도 5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578년 교황 베네딕도 1세(575~579)에 의해 부제(로마의 7부제 중의 하나)로 서품 되었고, 579년 교황 펠라지오 2세(579~590)는 그를 콘 스탄티노플의 동로마 궁정에 교황 사절로 파견하였다. 여기에서도 그는 콘스탄티노플 교황 대사관 관사에서 몇 명의 수도자들과 함께 수도 생활을 하였다. 586년경 로 마로 돌아온 그는 다시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서 수도 생 활을 계속하면서 펠라지오 2세의 신임을 받는 측근으로 서 교황을 도와 삼장 논쟁(三章論爭)으로 발생된 교회 분규를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을 주도하였다. 590년 펠라지오 2세가 사망하자 수도자로서는 최초 이며, 유례없는 만장 일치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동로마 제국 황제 마우리치우스(582-602)에게 자신 의 교황 선출에 대한 황제의 동의를 보류하도록 요청하 는 편지를 보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590년 9 월 3일에 교황으로 착좌하였다. 그레고리오 1세는 교황 의 무거운 직책이 그의 영성 생활에 장애가 되고 있다고 고백할 만큼 신심 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론보다는 실천적 성향이 강하였고 출중한 행정 능력을 지니고 있 었으며 좋지 못한 건강에도 불구하고 중세 교황권의 창 시자로 평가될 만큼 활동적인 교황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는 주교의 선출과 임무 수행에 대한 법규를 제정하였고 성직자의 독신 생활을 강화하였다. 아프리카에서는 다시 일어나는 도나투스(Donatus) 이단에 대해 투쟁하여 로마 교회의 권위를 드높였다.
그레고리오 1세는 동로마 제국 황제와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했으나 마찰은 피할 수 없었다. 593년 롬바르드족이 로마를 침공하겠다고 위협했을 때에 로마를 보호할 의무를 지닌 동로마 제국에서 지원을 기대할 수 없자 자신이 직접 롬바르드족과 담판을 지었다. 이때에 교황은 이탈리아의 실질적 통치자가 되어 조약을 맺고 군대에게 봉 급을 지급하며 군 지도자들을 임명하였다. 이러한 행동 은 동로마 제국 황제권에 대한 월권이었지만 그에게는 평화를 유지하고 롬바르드족을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기 위한 의도였다. 또한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전교회의 총대주교 (Ecumenicalis Patriarchus)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 칭호는 이미 5세기부터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에게 사용되었고 6세기에 들어서 면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도 사용되었다. 그가 이 칭호의 사용을 반대한 이유는 교회 안에서 교황의 수위 군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는 견해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성직자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오만을 드러내는 표 현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신을 로마 교회 의 주교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전(全)교회의 교황' (Ecumenicalis Papa)을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하 느님의 종들 중의 종' (Servus Servorum Dei)이라고 지칭하 였다. 이런 태도는 그가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 라 봉사하는 특전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게 르만 민족의 개종, 게르만 교회와의 유대 강화, 영국의 앵글로 색슨족의 개종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에 로마에서 노예로 팔려온 앵글로-색슨 족 청년들을 보고 그들의 용모에 감탄한 나머지 이들을 영국인(Angli)이 아니라 천사(Angeli)라고 묘사하면서 선 교사로서 영국에 가려고 하였으나 심한 반대로 뜻을 이 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대신 교황이 된 후 597년에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 아우구스티노와 40여 명의 수 도자들을 영국 켄트 왕국에 파견하여 601년에는 영국에 요크 대교구와 캔터버리 대교구와 12개의 소속 교구를 설정하였다. 아울러 골(Gaul) 지방의 프랑크족과 스페인 의 서고트족 교회가 국가 교회적 성격을 띠고 있어서 로 마 교회로부터 이탈될 위험이 있자 이 교회들과도 밀접 한 관계를 지니도록 노력하였다.
그레고리오 1세는 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사목 지침 서》(Liber Regulae Pastoralis) 4권은 사목 직무를 받는 동기, 사목자에게 요구되는 덕목,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가르치는 방법, 사목자에게 필요한 양심 성찰의 방법들을 다 루고 있다. 이 책은 중세 주교들과 사제들이 꼭 읽어야 하는 교과서적 구실을 하였다. 《복음서에 대한 설교집》 (Homiliae in Evangelia)에서 전례 중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 하고 《에제키엘서에 대한 설교집》(Homiliae in Hiezechichelem Prophetam)에서는 그리스도, 교회, 신앙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가르치고 있다. <열왕기 1서 주 해서》(m Librum Primum Regum Expositionum Libri IV)와 《애 가에 대한 주해서》(Exopositio in Canticum Canticorum)도 저 술하였다.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 집》(Dialogi de Vita et Miraculis Patrum Italicorum)은 누르시아 (Nursia)의 성 베네덕도(Benedictus, 480~550)와 이탈리아 성 인들의 생애를 담고 있는데 평신도들의 신심을 위해 저술되었다. 그 외에 당시의 신학, 전례, 역사, 사회학의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서간집》(Registum Epistolarum)이 있다. 《그레고리오 전례서》(Sacramentarium Gregorianum)도 원본은 그가 집필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는 교회 성가의 다수를 재조정하고 그레고리오 성가도 제정하였다. 《욥의 윤리》(Moralia in Job, 595)는 욥기를 신학적 으로, 역사적으로, 신비적으로,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 다. 이는 중세기의 윤리 신학과 수덕 신학의 보고(寶庫) 가 되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자선 사업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굶주리는 시민들을 위해 식량과 필수품을 장만하는 데에 노력하였고 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그는 교 회 영토, 즉 교황청이 이탈리아, 골, 북아프리카에 소유 하고 있는 광대한 토지를 다시 정리하였고 일부 지역은 관리자를 임명하여 자신이 직접 운영하면서 교회 재산을 늘려 사회의 곤궁과 재난을 덜어 주었다. 동시에 이러한 교황청 부동산의 재편성은 나중에 교황이 예견하지 못했던 교회 국가(교황령)의 기초를 이루었고 중세 교황의 정 치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교황은 베네딕도 수도회의 발전에 관심을 두고 수도자들에게 교구 주교의 관할권을 제한하는 특권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베네딕도 수도회가 교황의 직접 관할권에 속하고 교구로부터 벗어나 면속구를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있는 그레고리오 1세의 재위 기간은 교황사뿐만 아니라 교회사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로 규정되고 있다. 고대에서 중세로의 서양 정신사의 전환기에서 그의 활동과 인품의 도의적 위대함 으로 인해 '대교황' 의 명칭에 부끄럽지 않은 인물이며 라틴 교부들 중 마지막 교부로서 중세 교회 문화의 형성 자로 평가되고 있다. ※ 참고문헌 Horace K. Mann, The Lives ofPopes in the Early Middle Ages, London, Routlledge & Kegan Paul, pp. 1902~1932/ Paolo Brezzi, The Papacy, translated by Henry J. Yannone from the Italian Edition : II Papato, Maryland : The Newman Press, 1958/ Wladimir D'Ormeson, The Papacy, London : Burns & Oates, 1959/ Walter Ullmann, Short History ofthe Papacy in the Middle Ages, London : Methuen, 1972/ Geoffrey Baraclough, The Medieval Papacy, Norwich : Jarrold and Sons Ltd., 2nd ed., 1979/ Patrick Granfield, The Papacy in Transition, New York Doubleday & Company Inc., 1980/ Michael Walsh, An Illustrative History ofthe Popes, New York : Bonanza Books, 1980/ Gillian Rosemary Evans, The Thought of Gregory the Great,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金聖泰〕 ② 그레고리오 7세(1022/1025~1085) : 성인. 제 157대 교황(1073~1085). 축일은 5월 25일. 원명 힐데브 란트(Hilderbrand). 1020년경 토스카나 지방의 소아나에 서 농부의 아들(몰락한 귀족 가문이라는 설도 있음)로 태어 났다. 어린 시절 로마로 가서 아벤티노의 성 마리아 수도 원의 원장이었던 삼촌 밑에서 성장하면서 지오반니 그라 시아노에게 교육을 받았다. 스승인 그라시아노가 후일 교황 그레고리오 6세(1045~1046)로 선출되었을 때 교황 비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046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1039~1056)가 교황청 분규를 해결하 기 위해서 그레고리오 6세를 폐위했을 때 교황을 수행하 여 쾰른으로 갔다. 그러나 이듬해 그레고리오 6세가 서 거했으므로 그 후 클뤼니 수도원에 체재했다는 설도 있 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1049년에 즉위한 교황 레오 9세 는 그를 다시 로마로 불러들여 차부제로 서품한 후에 교 회의 재정을 맡기고 성 바오로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 하여 수도회 개혁을 추진하게 하였다. 그는 레오 9세 이 후 5명의 역대 교황들의 고문과 특사로서 교황 중심의 교회 체제 실현과 국가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독립시키는 등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1046년 수트리 교 회 회의에서 교황 선출권이 신성 로마 황제로부터 로마 인에게 이양되는 대신, 선출된 교황은 대관식 이전에 황 제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함에 따라 1055년부터 역대 교 황들의 선임에서 황제와 주위 세속 군주들의 동의를 얻 어내는 데 공헌하였다.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1058~1061)에 의해 로마 교회의 대부제로 임명된 그는, 1073년 교황 알렉산델 2 세가 죽자 교황 선출권을 갖고 있던 주교 계층 추기경들 이 아니라 시민과 성직자들의 환호 속에 교황으로 옹립 되었다. 같은 해 6월 29일 평소 존경하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축일에 대관식을 갖고 그레고리오 7세로 즉위한 그는 자신이 전임 교황들을 도와 추진해 왔던 교 회 개혁을 자신의 중요한 임무로 생각하고 재위 기간 동 안 계속 추진하였다. 먼저 그는 1074년 로마 회의에서 성직 매매와 성직자의 결혼에 대한 금령을 다시 공포하 고 이듬해 이 교령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평신도의 성직 을 금하는 교령을 반포하였다. 또한 프랑스와 영국에 특 사를 파견하여 성직자의 결혼을 묵인하는 주교들에게 성 직 수행을 금지하고 성직자 생활 쇄신을 추진하였다. 그 는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를 인간에 비교하면서 교회와 교황을 영혼에, 그리고 국가와 국왕을 육신에 비유하여 영혼이 육신보다 우위에 있듯이 교회와 교황도 국가와 국왕에 우선한다고 주장하였다. 때문에 국왕도 평신도로 서 최고의 입법권과 사법권을 지닌 교황에 순종해야 한 다고 강조하였다. 이런 주장은 1075년 3월에 공포한 교 황령 제27조에 가장 명확히 나타나 있다. 즉 교황만이 정당하고, 교회의 주인이며,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고 주 교를 폐하거나 복직시킬 권능을 갖는다. 세속과의 관계 에서도 교황은 황제를 폐위할 자격을 가졌으며 또한 신 종(臣從)의 서약에서 신하를 해제시킬 힘도 갖고 있다. 요컨대 교황은 교회와 세계의 무조건적인 주인인 것이 다. 그의 이러한 견해와 개혁 정책은 서임권 문제를 둘러 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싸움을 야기시키게 되었다. 왜냐하면 거대한 세속적 세력을 거느리는 성직자 계층이 왕권의 지배 하에서 갑자기 독립한다는 것은 국가 기초 를 위협하는 중대한 결과를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실제 평신도 성직 서임에 대한 금령은 바로 주교를 임명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러한 그의 견해에 저항을 시도한 것이 하인리히 4세였다. 그 는 교황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공석 중인 밀라노의 주교 를 임명하였고 이어서 이탈리아의 스폴레토와 페르모 그 리고 신성 로마 제국에서 주교와 수도원장에 대한 서임 권을 행사하여 황제와 교황 사이에 공공연한 싸움이 시 작되었다.
1075년 12월에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의 이러한 행 동에 대하여 엄중한 경고 편지를 보냈지만 하인리히 4세 는 국내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보름스 회의를 개최(1076. 1), 반 교황적인 주교들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전통적 직권에 의거하여 그레고리오 7세의 폐위를 선언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교황도 로마에서 회의를 열어 하 인리히 4세를 파면, 파문하고 제국의 봉신들에게 황제에 대한 충성 선언과 복종 의무를 해제하였고 황제를 지지 한 주교들에게는 파문과 성직을 금지하는 처벌을 내렸 다.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도 1076년 10월 트리블에서 모임을 갖고 황제에게 1년 이내에 교황으로부터 파문 취 소를 받지 못하면 새 황제를 선출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마침내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한 하 인리히 4세는 북상(北上) 중인 교황보다 앞서 이탈리아 로 출발하여 카노사에 도착, 3일 동안(1077. 1. 26~28) 혹 한 속에서 무모(無帽), 맨발, 수도복의 복장으로 파문 해 제를 간청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레고리오 7세는 성직 서임권(聖職敍任權) 논쟁에서 승리하였고 황제권에는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를 입혔으며 서구 세계의 주도권 이 황제에게서 교황으로 넘어가, 세계의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실현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1083년 하인 리히 4세는 국내의 반대 세력을 무찌르고 다시 이탈리아 로 들어가 로마를 점령하였다. 이 사건에 앞서 1077년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은 교황의 승인을 받지 않고 스 바비아의 루돌프를 국왕으로 선출함으로서 3년(1077 ~1080) 동안의 내란이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중립적 태 도를 보인 그레고리오 7세는 루돌프의 승리를 계기로 1080년 3월에 회의를 소집하여 카노사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황제를 두번째로 폐위와 함께 파문에 처하고 루돌 프를 국왕으로 승인하였다. 그러자 하인리히와 제국의 일부 주교들은 6월 25일 브릭센에 모여 그레고리오 7세 를 폐위하고 라벤나의 대주교 구이베르트를 대립 교황 글레멘스(1080-1084)로 즉위시켰다.
한편 1080년 10월에 루돌프가 전사함으로써 상황은 교황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1082년 하인리히 4세가 로마를 점령하자 교황은 성 안젤로 성에 피신하였다. 이 때 사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축성되기 를 원했기 때문에 교황과 타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 황은 타협을 거부하였고 결국 황제는 제국의 주교들이 선출한 대립 교황 글레멘스 3세를 옹림하고 글레멘스 3 세도 하인리히 4세를 황제로 대관하였다. 1084년 교황 은 남부 이탈리아의 통치자이며 교황의 봉신(封臣)인 노 르만의 공작 로베르 기스카르에 의해 구조되지만 기스카 르 군대의 만행은 오히려 로마 시민들이 그레고리오 7세 를 적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교황은 할 수 없이 기스 카르를 따라 몬테카시노, 이어서 남이탈리아의 살레르노 로 피신하여 마침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부정을 미워했다. 그러기 때문에 유배지에서 죽는 것이다"였다고 전해진 다. 이러한 죽음은 일견 그를 패배자로 보이게 하지만 후 임 교황들이 속권에 대한 투쟁을 계속하여 그가 추진한 개혁들을 성취함으로써 승리자이기도 했다. 실제로 교회 사에서 11세기 중반부터 12세기 초반에 걸친 교회 내의 대개혁을 그레고리오 개혁이라고 하는데, 비록 그가 이 운동의 주창자나 완성자는 아니지만 교회의 자율성 회복 을 통한 교황권의 확립에 크게 기여한 업적의 비중 때문 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 성직 서임권 논쟁 ; 카놋 사 사건 ; 그레고리오 개혁) ※ 참고문헌 Horace K. Mann, The Lives ofPopes in the Early Middle Ages, London : Routlledge & Kegan Paul, pp. 1925~1934/ Paolo Brezzi, The Papacy, translated by Henry J. Yannone from the Italian Edition : II Papato, Maryland The Newman Press, 1958/ Wladimir D'Ormesson, The Papacy, London : Burns & Oates, 1959/ Walter Ullman, Short History of the Papacy in the Middle Ages, London Methune, 19721 Geoffrey Barraclough, The Medieval Papacy, Norwich : Jarrold and Sons Ltd., 2nd ed., 1979/ Patrick Granfield, The Papacy in Transition, New York : Doubleday & Company Inc., 1980/ Michael Walsh, An Illustrative History ofthe Popes, New York : Bonanza Books, 1980/ Ian Stuart Robinson, The Papacy 1073~1198,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金聖泰〕
③ 그레고리오 13세(1502~1585) : 제226대 교황 (1572~1585). 원명은 우고 본콤파니(Ugo Boncompagni) . 볼로냐의 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볼로냐 대학에서 법 학을 공부한 후 28세에 박사 학위를 받고, 1531년부터 모교에서 10년 간 법학을 가르쳤다. 그 후 평신도 법학 자로서 로마에서 교회직에 종사하다가 1558년 사제로 서품되고, 같은 해 주교로 성성되었다. 1561년부터 3년 동안 교회법 전문가로서 트리엔트,공의회에 참석한 그는 1565년 추기경으로 임명되어 같은 해 스페인의 교황 특 사로 파견되었다. 1572년 비오 5세가 사망하자 스페인 추기경 그란벨라(A.Granvella)와 필립 2세의 지지로 교황 으로 선출된 그레고리오 13세는 한때 르네상스 문화의 영향으로 품행이 좋지 않은 때도 있었으나 교황이 된 후 그의 생활은 매우 모범적이었다. 그는 항상 화해를 염두 에 두고 온건한 행정을 폈으며, 특히 트리엔트 공의회 (1545~1563)에서 시작되고 선임 비오 5세에 의해 추진된 교회 내의 개혁과, 잃은 영토를 되찾아 다시 가톨릭화하 려는 이른바 반종교 개혁을 꾸준히 또한 적극적으로 추 진하였다. 그러나 항상 옳은 판단에서 행하여진 것은 아 니었다. 그레고리오 13세는 즉위 초에 일어난 위그노파 전쟁 에서 프랑스 왕 앙리 3세를 지지하였으며, 1572년 8월 23일에 일어난 이른바 '바르톨로메오 밤의 학살' 소식 을 전해 듣고는 <성 암브로시오의 사은 찬미>(Te Deum) 을 노래하며 공적으로 축하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또한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에 대한 반란을 지원함으로써 도 리어 영국 가톨릭에 대한 박해를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 래하였으며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의 반종교 개혁을 지 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폴란드에서의 개입은 성공을 거두어 폴란드를 가톨릭으로 남게 하였고 러시아 교회와 의 일치 시도도 비록 실패하였으나 긴밀한 관계는 유지 할 수 있었다. 또 터키에 대한 그의 십자군 운동은 레판 토(Lepanto)의 승리에도 불구하고(1571) 실패로 돌아갔 다. 독일에 대한 각별한 관심으로 특별 추기경위원회를 설립하고 또한 독일의 여러 도시에 교황 대사관을 신설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레고리오 13세는 예수회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그 들이 진출한 모든 나라에 신학교를 설립할 수 있도록 후 원하였다. 또 현지인 성직자를 효율적으로 양성하고자 로마에 독일, 영국, 헝가리, 그리스, 아르메니아 등 각국 젊은이를 위한 고유한 신학원을 설립하였다. 1572년에 는 로마 학원을 재건함으로써 오늘날의 그레고리오 대학 의 제2의 창립자가 되었다. 또 인도와 중국, 일본,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서 해외 포교를 장려함으로써 포교 교황 의 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장려한 교회법전의 개정 작업을 추진하여 1582년 로마 공인판 을 출간하였으며 같은 해, 그때까지의 교회력을 그레고 리오력으로 개혁, 실시하였다. 그것은 처음에는 가톨릭 국가에만 도입되었으나 그 후 대부분의 국가들이 받아들 였다. 또한 수도회 개혁에도 직접 관여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는데 1575년 필립보 네리의 오라토리오회를 인 가하고, 1580년에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개혁 가르멜 수 도회를 승인하였다. 조직과 행정력이 뛰어났던 교황의 교황청 성성 증설 작업은 그의 후계자 식스토 5세로 하 여금 교황청 개편을 가능케 하였다. 또 로마를 확장하고 퀴리날 언덕에 궁전을 짓고,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 그레 고리오 소성당을 건립하는 등 건축을 통해 예술을 보호 하고 장려하였다. 그러나 이를 위한 막대한 지출은 교황 청 재정을 극도로 혼란시켜 계속 불안의 요인이 되었고 국내적으로도 소요가 일고, 도적의 침해가 점점 심해졌 다. 특히 그의 만년에는 로마와 교황령의 귀족들이 지지 하는 도상 강도들로 인해 큰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는 보수적이고 관용적인 교황으로서 질서를 회복시 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레 고리오 13세는 트리엔트 교령을 기반으로 반종교 개혁 과 교회 내부 개혁을 동시에 꾸준히 추진시킨 점에서 16 세기 후반의 위대한 개혁 교황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파란 만장하였던 그의 치세는 교황직이 전개 한 반종교 개혁의 결정적 단면을 보여 준다. 비록 그의 교황직이 선임 비오 5세와 후임 식스토 5세의 더 빛나는 교황직에 의해 오랫동안 그 빛을 잃었지만, 역사가들은 그 후 여러 세기 동안 정착하게 될 교황 군주 정치의 주 요 성격이 그레고리오 13세 때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의 견을 같이하고 있다. (-> 그레고리오력 ; 포교사) ※ 참고문헌 M.A. Ciappi, Compendio delle attioni et vita di Gregorio XIII, Roma, 1591/ L. Karttunen, Gregoire XIII comme politicien et souverain, Helsinki, 1911/G. Schwaiger, 《LThK》. Jacquemet, 《Cath》5.〔崔奭祐〕
④ 그레고리오 16세(1765~1846) : 제254대 교황 (1831~1846) 원명은 바르톨로메오 알베르토 카펠라리 (B.A.Cappellari). 1765년 북이탈리아의 벨루노에서 태어 나 18세에 가말돌리회 은수사회에 입회, 1787년 사제 서품과 동시에 신학 교수가 되었다. 1795년부터 로마에 체류, 1805년 철리오 성 그레고리오 수도원 원장, 1809 년 나폴레옹에 의해 수도회가 해산되자 무라노에서 다시 교수 활동, 1823년 가말돌리회 총장, 1826년 레오 12 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는 동시에 포교성성 장관으 로 재임하면서 정교 조약 체결을 위해 많은 협상에 임하 였다. 비오 8세(1829~1830)가 사망하자 로마의 반란으로 50일이나 걸린 어려운 교황 선거 끝에 선출되어 1831년 2월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개인적으로는 열심하고 수도자 출신인 만큼 생활도 아주 엄격하였다. 그러나 교회 통치에 서는 정치 경험이 없는 데다 너무나 세상을 몰랐다. 뿐만 아니라 이미 교황이 되기 전부터 교황의 세속 주권 옹호 자였던 그는, 교황이 되자 실제로 교황의 세속 지배권을 직접 행사하였다. 그는 재위 전 기간 동안 교황령 내의 분쟁과 대항하였다. 때는 격동기로서 혁명 사상의 여파 로 많은 급진 자유주의자들이 정부에 정치 체제의 변화 를 요구하면서 교회에도 같은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그 들의 요청에 대한 교회의 거절은 반성직자주의를 초래하 게 되었다.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북이탈리아 교황령에 서 독립을 요구하는 반란이 일어났으나 오스트리아 군대 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시킬 수 있었다. 한편 교황도 교 황령에서 어느 정도의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열강 대표들 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외교 각서를 보내어 더 많은 개혁 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건의는 수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개입은 프랑스로 하여금 안 코나를 수년 간 점령케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지만 1838 년에 이르러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두 나라 군대들이 모 두 철수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청년 이탈리 아당' (La Giovene Italia)이 비밀 결사들과 함께 교황령에 서의 공화제 실시를 요구하였고, '이탈리아 국가 통일 운동' (Risorgimento)도 같은 정치적인 요구를 하였다. 물 론 교황은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이에 폭동과 주 민들의 불만도 커져 더 이상 억제할 수 없게 되었고 1841년 교황의 순방 여행도 소용이 없었다.
본디 보수적인 그레고리오에게 자유주의적 시대 정신이 이해될 리 없었기에 그는 국가주의적인 모든 자유 사 상은 물론이고 심지어 라므네(Félicité de Lamennais)의 가 톨릭적 자유주의까지 배척하였고, 1832년 회칙vos>를 통해 자유주의적인 시대 요구들을 위시해서 라믈네 등의 시대적 요구들(양심과 언론의 자유 등)을 일갈 단죄하였다. 또한 그레고리오 교황은 정교(政敎)간의 문제로 여러 나라들과 충돌하였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에서는 벨기에 가톨릭이 요구하는 종교 자유와 독립 운동을 반대하였고(1831), 폴란드에서 일어난 같은 성격의 반란 때에도 오히려 그 지배자인 러시아의 니콜라스 1세 황제에게 복종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그 후 니콜라스와 로마에서 회견하게 되었을 때는 억압받는 폴란드 가톨릭에 대한 선처를 황제에게 솔직히 건의해야 하였다(1845).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도 보수파를 지지하였다. 혼종혼(混宗婚)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쾰른 사건(1837)에서는 프로테스탄트와의 혼종혼을 반대한 쾰른 대주교를 위시하여 여러 주교들을 체포한 프로이센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고 이에 관한 가톨릭의 기본 원칙을 명시함으로써 가톨릭이 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그레고리오는 이처럼 교황령과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세계 포교에서는 선견지명을 보였다.구체적으로 그리스, 중동, 이집트, 아프리카, 극동, 캐나 다, 미국 등에서 교구와 대목구를 많이 증설하고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장려함으로써 포교를 크게 촉진시켰다.특히 한국 포교지에 대한 그레고리오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는 전멸 직전에 있던 한국 포교지를 구출하는 데 결 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포교성성 장관으로 있을 당시, 더 이상 북경 교구 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으니 한국 포교지를 북경 교 구에서 독립시켜 수도회에 위임해야 할 것이라는 마카오 포교성 대표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1827년 파리 외방전 교회와 교섭을 시작, 수년 간의 끈질긴 협상 끝에 한국 포교지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바로 한국 신자들이 간절히 희망하던 선교사의 지속적인 파견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뿐더러 그는 교황 이 된 직후 한국 포교지를 대목구로 설정하고 성청에 직 속시켰다. 이로써 한국 교회의 기반은 더욱 확고해졌다.1838년 만주 요동 교구를 창설하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한 것도 사실은 한국 선교사의 입국을 용이하게 하 려는 조처의 일환이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수도회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새 수도회들을 많이 인가하였고 옛 수도회의 개혁 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그는 또 학문과 예술에도 기여 하였는데 이집트와 에트루리아 박물관을 건립하였고, 학 자들과 예술가들을 보호하였으며, 그레고리오 기사장이 란 교황 훈장의 창설자이기도 하다(1831). 1846년에 사 망한 그레고리오 교황은 그의 시대가 종교적, 사회적, 문 화적으로 격동기임을 깨닫지 못한 채 15년 이상 교회를 다스렸고 그 결과 국가 민족주의가 더욱 거세어지고 교 황령이 결정적인 위기를 맞게 될 제3의 혁명 직전에, 교 회를 매우 어려운 상황에 남겨 놓고 말았다. (-> 조선 교구) ※ 참고문헌 G. Schwaiger, 《LThK》 4/A. Simon, 《NCE》 6/J. Leflon, Grégoire XVI, Catholicisme 51 Andreas Choi, L'Erection du premier Vicariat Apostllique et les origines du Catholicisme en Corée, Suisse, 1961, pp. 68~84. [崔奭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