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나치안츠의(329/330~389/390)

Gregorius, Nazianze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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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


성인. 가빠도기아 3교부의 한 사람. 동방 교회 4대 학 자 중 한 사람. 축일은 동방 교회에서는 1월 25일(혹은 30일), 서방 교회에서는 1월 2일. 그레고리오의 생애에 관한 중요한 문헌으로는 그 자신 의 편지와, 자서전적인 시 <자기 자신에 관하여>(De se ipso), 바실리오에게 보낸 편지 이외에 수다(Suda ; 사본 끝에 실린 사서류)를 통하여 전해진 전승, 예로니모의 위 인전 《De viris illustribus》 등이 있다. 그의 출생지가 가빠 도기아의 소도시 나치안츠인지 아니면 그곳에서 멀지 않 은 아버지의 그노시스가 있던 아리안조인지에 대하여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출생 연도는 그 자신의 진 술, 수다를 통해 전해진 전승, 예로니모의 진술 등을 종 합해 보면 329년이나 330년에 해당된다. 아버지 그레고 리오는 니체아 공의회 후에 나치안츠의 주교 레온시오에 게서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후계자로 45년 간 그곳의 주교로 활동하다가 374년에 사망하였다. 어머니인 성녀 논나(Nonna)는 유대교의 이교적 혼합 종파의 추종자였 던 자기 남편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으며, 기도와 사 랑의 실천으로 신앙적인 면에서 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 부부에게는 그레고리오 외에 딸 고르고니 아와 아들 가이사리오가 있었다. 그레고리오는 유년 시절에 가정에서 성서 읽기를 배웠 으며, 그 후에는 가빠도기아의 가이사리아, 팔레스티나 의 가이사리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받고, 마지막으로 아테네에서는 히메리오와 그리스도인인 프 로해레시오에게 사사했다. 356년까지 아테네에 머무르 는 동안 바실리오와 교제하였고, 장래의 황제 율리아누 스와 만났다. 358년(혹은 359년) 나치안츠로 돌아온 후 세례를 받은 그는 소박하고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추구 하여, 바실리오와 함께 폰투스(Pontus) 지방의 이리스 강 가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의 공동 작업 결과가 오리제네스의 작품 선집 《Philocalia》이다. 그러나 그곳에 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추측컨대, 362년 초에 그는 수도 생활을 계속하고 싶었으나 그의 뜻과는 달리 부친 이 교회로부터 서품받도록 권유받자 이것이 싫어서 도망 갔다가 같은 해 부활절에 나치안츠로 되돌아와 비로소 사제직을 받아들이고 《도피의 변명서》를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황제 발렌스가 가빠도기아 지방을 분할하였을 때, 바실리오는 축소된 영향력의 강화를 위해 그레고리 오를 사시마(Sasima)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레 고리오 자신의 반대와 분할 지방인 티아나 대주교의 교 회 행정력 강화로 말미암아 그는 주교직에 오르지 않았 다. 374년 봄 그레고리오는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잇도 록 나치안츠 주교로 임명되었지만 1년 후에 이사우리아 지방의 셀레우키아에 있는 수도원으로 떠났다. 따라서 이후 5년 동안 나치안츠의 주교좌는 공석으로 남게 되었 다. 378년 아리우스파인 발렌스 황제의 사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즉위는 교회뿐 아니라 그레고리오 자신의 생애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아리우스파의 아성인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압박당하고 있던 니체아 소수파의 강력한 요망에 따라 수도로 갔다. 그의 웅변은 테오도시 우스 1세의 공동 신앙 신봉령(380)과 아울러 마침내 정통 파 신앙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조그 만 공동체를 맡아 활동하다 381년 3월 콘스탄티노플 공 의회에서 이 도시의 주교로 인정받고, 안티오키아의 멜 레시오의 사망으로 공의회 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안티 오키아의 주교 후계자 선정 문제가 제기되고, 이집트의 주교들과 성령 신성 부인론자들이 주교좌 옮기기를 금하 는 교회법을 근거로 그의 콘스탄티노플 주교 임명에 대 한 논란을 격화시키자, 그는 모든 논쟁을 끝내기 위해 주 교직에서 물러났다. 379년부터 381년에 자서전의 중요 한 부분을 구성하는 많은 연설문을 저술하였다. 공의회 가 끝나기 전에 그는 유명한 고별사를 하고 나치안츠로 돌아가, 383년 사촌 에울랄리오가 후계자로 임명될 때 까지 나치안츠의 주교직을 맡았다. 그 후 저술 활동과 수 도 생활을 하고자 아리안조로 내려가, 생애의 마지막까 지 그곳에서 살았다. [저 서] 연설문 : 그레고리오 작품의 정수는 고전적 교 육과 그리스도교적 교육의 밀접한 연관성을 나타내고, 수사학적 기교를 전개한 44개의 연설문이다(or. 35는 진 본이 아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니체아 신앙 고백을 해설하고, 에우노미오파와 성령 신성 부인론자들 을 반박하며, 삼위 일체 교리를 변호한 5개의 신학적 연 설문(or. 27~31)과, 황제 율리아누스를 비평한 호교론적 인 연설문이다(or. 4~5). 대부분의 연설문은 그 자신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사제직에 관한 신학 적 논문으로서 요한 그리소스토모의 작품에 영향을 끼친 《도피의 변명서》(or. 2)와 콘스탄티노플에서의 고별사가 있다. 이외에도 축사, 교회 축제 관련 연설, 추도사(아버 지, 고르고니아와 가이사리오, 바실리오) 등이 있다. 시 : 대부분의 시는 그의 생애 말기에 쓰여졌다. 교의 적 · 도덕적 내용이 담긴 신학적 시, 저자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다루고 있는 역사시, 경구와 비문으로 구분된다.신학적 시는 대부분 운문의 형식을 갖추었다. 역사시 가 운데에서 가장 긴 <자신의 생애에 관하여>(De vita sua)는 출생에서 콘스탄티노플에서의 활동까지 포괄하는, 그의 생애에 관한 중요한 문헌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학에 서 자서전에 관한 새로운 형식을 개척한 효시로서도 가 치가 있다. 이 밖에 다른 자서전적인 시들로, 〈Querelade suis calamitatibus>, , 〈Lugubre pro sua anima>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삶 을 힘차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작품들은 아우구 스티노의 《고백록》과도 견줄 수 있다. 편지 : 그레고리오는 고르고니아의 손자 니코불루스의 요청에 의해 자신의 서한 전집을 최초로 출판한 사람이 다. 오늘날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편지는 모두 245편 에 이른다. 대부분의 편지는 개인적인 문제에 관한 내용 으로, 아리안조에서의 은거 기간(383~389/390)에 쓰여졌 다. 사제 클레도니오에게 보낸 편지(ep. 101, 102)와 자신 의 후계자 콘스탄티노플의 넥타리오에게 보낸 편지(ep. 202)는 교의 내용을 담은 신학적 편지로서, 아폴리나리 즘을 반박하거나 이 종파의 활동에 대해 경고하는 내용 을 담고 있다. 〔신학적 견해〕 그레고리오는 삼위 일체에 관한 그의 신학적 숙고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위격은 동체 (同體, homoousios)이며, 내적인 신적 관계에서 한 분의 하느님임을, 즉 세 위격의 동체성과 단일성을 강조하였 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개별적 특성에 의해 구별 되며, 세 위격을 함께 고찰해 보면 한 분의 하느님이다. 전자는 동체성(homoousiotes) 때문에, 후자는 단일성 (monarchia) 때문에" (or. 40, 41). "신격에 의해 셋은 하나 이며, 특성에 의해 하나는 셋이 된다"(or. 31, 9). 바실리 오가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성령의 특성을 표현하지 못한 것과는 달리, 그레고리오는 삼위의 특성을 매우 명확히 정식화하였다(or. 25, 16 ; 26, 19 ; 30, 19). 또한 삼위 일 체에 관한 개념에서는 실체(實體, ousia)와 위격(位格, hypostasis)은 명확히 구분하지만, 위(位, prosopon)와 위격 (位格, hypostasis) 개념은 동일시하였다. 그레고리오는 아폴리나리우스에 대한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두 성의 일치를 분명히 강조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영혼과 육체가 있듯이 (그리스도 안의) 두 성-하 느님과 인간-은 두 아들이나 두 하느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 간단히 말하자면 구세주는 두 요소로 이루어 져 있다. 왜냐하면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적인 것과 같지 않고, 영원한 것이 시간에 종속되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 이다. 그러나 그분은 서로 다른 주체가 아니다" (ep. 101). 그레고리오에게 있어서 두 성의 일치는 은총에 의한 것 이 아니라 존재에 의한 일치를 뜻한다(ep. 101). 그러나 그는 이 일치를 혼합의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두 성은 혼합에 의한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인간 이 되었고, 인간은 신격화되었다" (ep. 101). 하지만 그에 게 두 성의 혼합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신격화를 전제하 고 있고, 이 신격화를 완성시키는 데 있어서 그레고리오 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했다. "영적인 재생을 성취시키고 아들과 함께 부활을 실현시키는 분은 성령이다"(or. 41, 14). 또한 그는 오리제네스 이래로 성모 마리아에게 드 린 존칭 '하느님을 낳으신 분' (theotokos)을 매우 중요시 하여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을 낳으신 분' 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ep. 101)라 고 하였다. (→ 그리스 교부 ; 바실리오) ※ 참고문헌  J. Barbel Gregor, v. Nazi., Diejinftineologischen Reden, Diisseldorf, 1963/ J. Bernardi, La prédication des pères cappadociemmes, Paris, 1968/ 一, Grégoire de Nazi., Discours 1-3, 4-5 (Paris, 1978/ 83 [= SC 247-309/P. Gally, Grégoire de Nazi., Lettres théologiques (Paris, 1974 [= SC 208])/ 一, Grégoire de Nazi., Discours 27-31(Paris, 1978 [= SC 250]/ P. Gally . C. Moreschini, Grégoire de Nazi., Discours 32-37, 38-41 (Paris, 1985-90 [= SC 318/358])/ Ph. Haeuser, Grégor v. Nazi., Reden 1~20(Miunchen, 1928 [= BKV 59] Ch. Jungck, Grégor v. Nazi., De vita sua, Heidelberg, 1974/ Th. Michels, Grégorv. Nazi., Macht des Mysteriums, Diisseldof, 1956/ J. Mossay, Grégoire de Nazi., Discours 20-23, 24-26 (Paris, 1980/81 [= SC 270-284)/ 一, 《TRE》 14/ J. Planieux, Saint Grégoire de Nazianze. Théologien, Paris, 1951/ A. Tuilier, Grégoire de Nazi., La Passion du Christ. Tragédie(Paris, 1969 [= SC 149])/ C. Ullmann, Gregorius v. Nazianz der Theologe. Ein Beitrag zur Kirchenund Dogmengeschichte des 4, Jahrhundert, Gotha, 1866/ M. Wittig, Grégor v. Nazi., Briefe, Stuttgart, 1981/ 《RAC》 12. [河聖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