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개혁
改革
[라]Reformatio Gregoriana · [영]Gregorian Ref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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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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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령을 탈환한 오토 1세.
넓은 의미에서는 1049년 4월에 교황 레오 9세(1049 ~1059)가 교회 개혁을 선언한 때부터, 교황청과 신성 로 마 제국이 체결한 보름스(Woms) 정교 조약이 인준된 1123년까지 이루어진 개혁을 뜻한다. 좁은 의미로는 그 레고리오 7세가 평신도(세속 군주)의 성직 서임(聖職敍 任)을 금지함으로써 서구 그리스도교를 개혁한 운동을 지칭한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의 이름을 따 서 이렇게 호칭되는데, 비록 그가 이 운동의 주창자나 완 성자는 아니지만 그의 개혁으로 상실되었던 교황권의 회 복과 함께 성직자의 생활 쇄신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의 재위 기간은 교회 개혁 운동이 절정에 다다른 시기였 으며, 교황사에 있어서 16세기의 종교 개혁과 18세기의 프랑스 대혁명에 비교될 만큼 중요한 시기로서 '그레고 리오' 라는 이름을 개혁 운동에 붙이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세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는 교황 레오 9세부터 알렉산델 2세(1061~1073)에 이르는 그레고리오 전 시대(1049~1073)이고 둘째는 그레고리오 7세가 개혁을 전개한 그레고리오 시대(1073~1085)이며, 셋째는 그레고리오 7세 이후의 개혁 교황들이 추진한 그 레고리오 후 시대(1085-1123)이다. 〔그레고리오 전(前) 시대〕 교황사에 있어서 교황 니콜 라오 1세(858~867)의 사망 이후 레오 9세의 등장에 이르 는 180여 년, 특히 요한 12세 사망까지의 100여 년은 교황권이 쇠약한 시대였다. 754년에 폰티온(Ponthion)에 서 교황청과 우호 동맹을 맺고 로마 교회의 보호자가 된 카롤링거의 프랑크 왕국이 국력이 약화되면서 로마를 둘 러싸고 있던 정치 세력들이 교황청을 지배하였다. 9세기 말에 로마 교회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스폴레토(Spoleto) 공국(公國)의 지배자들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세기에 이르는 투스쿨룸(Tusculum)의 테오필락투스(Theuphylac-tus)는 스폴레토 공작 가문 및 토스카나(Tosana)의 백작 가문과 계약 결혼을 통하여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면서 50여 년 동안 로마 교회를 지배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측근들을 교황으로 선임하였고, 나중에는 자기 가문에서 교황 요한 11세(931~935)와 요한 12세(955~963)를 선출 하여 교황직을 장악하였다. 교황 요한 12세는 961년 이브레아(Ivrea)의 베렝가리 오 2세(Berengario Ⅱ)가 이탈리아의 왕이라고 자칭하면 서, 로마의 침공을 위협하고 있었을 때에 동프랑크 삭소 니아(Saxonia)의 왕 오토 1세(936~973)에게 군원을 요청 하였다. 오토 1세는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점령된 교황령 을 탈환하였고 교황은 감사의 뜻으로 오토 1세를 성 베 드로 대성전에서 황제로 축성하였으며 이로써 신성 로마 제국이 창설되었다. 오토 황제는 '오토 특허장' 을 공표 하여 로마 교회에 이탈리아 영토의 3/4을 부여하는 대신 에 교황 피선자에게 임직 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 대해 충성 선서를 하도록 요구하였다. 교황과 로마인들 은 이탈리아 귀족들의 지배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들의 의 도와는 달리 교황령의 해방자가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 였음을 뒤늦게 깨닫고 황제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오토 황제는 963년에 로마에 돌아와서 반대파 를 진압한 후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교황 요한 12세를 폐위하고 자기 측근을 레오 8세(963~965) 교황으로 임명 하였다. 아울러 그는 로마인들에게 앞으로는 황제의 동 의 없이 교황을 선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강요하였다. 오토 황제가 로마를 떠난 후에 요한 12세는 로마에 돌아 와 레오 8세를 축출하고 사망하였다. 로마인들은 새 교 황으로 베네딕도 5세(964)를 선출하였으나 다시 로마에 온 오토 1세는 레오 8세를 복권시켰다. 이후로 황제들은 그들의 임의대로 교황을 임명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정통 교황과 대립 교황의 등장으로 내분에 휩싸였다가 1046년 수트리(Sutri) 교회 회의에서 분규가 해결되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교황뿐만 아니라 독일의 주교들도 이탈리아 교구에 임명하여 신성 로마 제국과 동등한 행정 기구를 마련함으로써 이탈리아 를 통치하려고 하였다. 교황 레오 9세(1049~1054)는 비록 하인리히 3세(1039 ~1056)에 의해 임명되었으나 즉위한 1049년 4월에 로마 에서 첫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성직 매매의 방법으로 주 교가 된 성직자들을 해임하고 이러한 주교들에게 신품성 사를 받은 신부들도 처벌하였다. 교황은 5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에 유럽을 여행하면서 지역 교회 회의들을 소 집하여 성직자들에게 교황청의 교회 개혁에 대한 결정을 알리고, 주교와 수도원장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선출해 야 하며 교황은 보편 교회 위에서 유일한 수위권을 지니 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나중에 그레고리오 7세가 된 힐데브란트(Hildebrand, 1020~1185) 외에 므와엥무티에 (Moyenmoutier)의 훔베르토(Humbeto, +1061), 베드로 다 미아니(Pieto Damiani, 1007~1072)와 같이 탁월한 인물들 을 교황청에 불러들여 그들의 자문을 들었다. 이로써 12 세기 교황권의 전성 시대를 예고하는 개혁이 시작되었 다. 빅토리오 2세(1055~1057)도 교회 개혁에 관심을 두고 1055년 6월 4일에 황제와 함께 피렌체(Firenze) 교회 회 의를 소집하여 성직 매매를 단죄하고 성직자의 독신 생 활을 명령하였다. 스데파노 9세(1057~1058)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개입이 없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이 미 레오 9세의 개혁 그룹에서 교황을 도와 개혁 운동에 참여하였고 비록 짧은 재위 기간 동안이었지만 다미아니 와 훔베르토와 같은 개혁가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여 교 회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는 1057년에 밀라노 에서 성직 매매를 반대하고 성직자의 독신 생활을 요구 하던 급진적 개혁 운동 그룹인 파타레니(Patareni)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훔베르토가 작성한 '성직 매 매자들을 반박함' 이라는 개혁서를 발표하여 개혁 의지를 보여 주었다. 훔베르토는 성직 매매를 이단으로 규정하 고 성직 매매에 의한 서품과 이러한 서품을 받은 이들이 집전한 성사와 모든 서품들도 무효이며, 교회법에 의한 선거의 완전한 회복은 교회가 평신도 지배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니콜라오 2세(1058~1061)는 교황권의 독립을 위해 1059년 4월 13일에 라테란 교회 회의에서 교황 선거에 관한 교령을 반포하였다. 그 내용에 의하면, 로마의 주교 계층의 추기경들이 의견을 수렴한 다음에 토론, 심의하 여 후보를 지명하면 다른 계층의 추기경들이 인준하고 나머지 성직자들과 신도들은 그를 교황으로 받아들이며 황제는 교황 선출에 대한 형식적 승인권만을 지니는 것 이다. 교황은 로마 교회의 성직자들 중에서 선출되어야 하나 적당한 인물이 없으면 로마 밖의 교회에서도 지명 될 수 있다. 교황 선거는 로마에서 실시되어야 하나 로마 가 안전하지 못할 때에는 다른 곳에서 실시할 수 있으며 대관식은 로마에서 거행해야 한다. 니콜라오 2세는 이탈 리아 남부 지방을 점령하고 있던 노르만족과 동맹을 맺 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통치자로 승인하면서 교 황 선거의 안전한 실시를 보장받았다. 1059년에 라테란 교회 회의는 부도덕한 성직자의 미 사 봉헌과 신자들이 그러한 성직자들의 직무를 도와주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 회의는 차부제품을 받은 성직자들 에게 독신 생활의 의무를 부과한 라틴 교회의 전통적 규 율을 상기시켰다. 로마의 귀족들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 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교령은 1060년 4월에 열린 라테란 교회에서 확인 · 강화되었다. 이로써 교황 선거에 대한 속권의 정치적 개입을 막고 교황청은 교회 모든 개 혁의 전제 조건인 독립권을 회복하였다. 니콜라오 2세는 레오 9세의 성직 매매와 성직자 독신 생활에 대한 교령 을 갱신하였고 사도적 생활을 실천하는 참사회를 설립하 는 교령을 반포하였다. 교황은 성직 매매에 의해 서품된 성직자들을 해임하는 강경한 정책보다 그들을 다시 서품 하자는 베드로 다미아니의 온건한 현실적 주장을 따랐 고, 성직자들이 평신도(제후)들로부터 본당을 받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레고리오 시대〕 그레고리오 7세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개혁가로서 신자들과 제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황 수위권의 신수설(神授說)을 주창하였다. 1075년에 교황은 교황 수위권과 무류권을 강조하는 27개 항목의 개혁 지침서 <교황 훈령>(Dictatus papae)을 발표했는데 주 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로마 교회는 하느님에 의해서 설 립되었고(1항) 교황은 보편 교회의 우두머리로서(2항) 교 회 회의를 소집하지 않고서도 주교를 임명하거나 해임하 고 전임시킬 수 있다(3, 13, 25항). 교황의 권한이 없이는 어떠한 규정도 교회법적 효력을 가질 수 없으며(17항) 교황의 명령이 없이는 어떠한 공의회나 교회 회의도 소 집될 수 없다(16항). 교황의 결정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 도 취소될 수 없고(18항) 로마 교회는 절대로 오류를 범 할 수 없으며(22항) 교회의 중요한 문제는 교황청에 보 고하여 그 결정에 따라야 한다(21항). <교황 훈령>에 근거한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정책은 룻가(Lucca)의 안셀모(Anselm)가 편찬한 《법령 수집본》 (Collectio)과 데우스데딧(Deusdedit)의 《법령 수집본》 (Collectio)과 같은 시기에 편찬된 법령들에 의해 강화되 었다. 이 개혁 법령은 교황의 수위권을 옹호, 교황의 입 법 및 사법권의 행사,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의 배격, 성 직자의 독신 생활의 강조, 성직 매매의 엄금을 주요 목표 로 편찬되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교회 개혁의 구현을 노력하였다. 1074년에 교황은 로마 에서 사순절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전임 교황들이 내세 웠던 성직 매매 금지와 독신 생활의 준수와 같은 성직자 의 생활 쇄신을 강조하였고, 1075년에 로마 교회 회의 에서는 1074년의 교령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평신도의 성직 서임을 금지하는 교령을 반포하였다. 그레고리오 7 세는 특사들을 파견하여 지역 교회에서 교회 회의를 소 집하여 교회 개혁을 구현하게 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은 강력한 반대 때문에 제한된 성공을 이루었지만 교황사에서 중요한 이정표였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1056~1106)의 성직 서임에 반대하여 일어난 카놋사(Canosa) 사건에서 그레 고리오 7세가 승리함으로써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 도권이 황제에게서 교황으로 넘어갔다. 그레고리오 7세 와 그의 개혁 운동을 이은 교황들은 서구 그리스도교 세 계의 지배 체제를 세우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제 교황은 교회의 우두머리일 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을 단합시키는 세력으로 부상하여 인노천시오 3세(1198~1216) 시대에 이르러 교황의 영향력은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그레고리오 후(後) 시대〕 그레고리오 7세가 전개한 개혁은 우르바노 2세(1088~1099)로 이어졌다. 그는 그레 고리오 7세의 개혁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하였지만 재위 초기(1088~1094)에는 당시의 정치 및 종교적 상황 때문 에 신중하게 개혁을 수행하였다. 로마에는 그레고리오 7 세를 반대하여 등장한 대립 교황 글레멘스 3세(1080 ~1110)의 추종자들이 하인리히 4세의 보호 아래 지배 세 력을 형성하고 있어 로마에 상주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르바노 2세는 1089년에 멜피(Melfi)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성직 매매와 평신도의 성직 서임 권에 대한 금령을 재확인하면서도 시행에 있어서 예외 경우를 두었다. 그는 황제에 의해서 서임되고 교회의 승 인을 받지 않은 주교라도 성직 매매의 방법을 이용하지 않았거나 서품 주교의 성직 매매를 통하지 않고 정통 교 회에서 신품을 받은 신부들의 경우에는 교황 관면권을 사용하여 그들의 서품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1092년 이탈리아에서 하인리히 4세의 세력이 약화되고 1093년 말에 우르바노 2세가 로마에 상주하면 서 교황의 위치가 견고해지자 강경한 개혁 정책을 시행 하였다. 1095년 3월에 교황은 피아첸차 교회 회의를 주 재하여 파문당한 글레멘스 3세와 그의 추종 주교들과 정통 교회의 교구를 찬탈한 주교들이 집전한 모든 서품을 무효로 선언하였다. 또한 이 교회 회의는 성직 매매에 의한 서품을 엄금, 무효화하였고 성직자의 독신제를 천명하였다. 1095년 11월에 우르바노 2세는 클레르몽(Clermont) 교회 회의에서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에 대한 금령과 함께 성직자의 세속 군주에 대한 충성 서약도 금지함으로써 교권의 완전한 자율권을 요구하는 교령을 선포하였다. 1099년에 교황은 로마 교회 회의에서 멜피 교회 회의 결정을 확인하면서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 금령을 더욱 엄격하게 규정하여 서임한 세속 군주의 서임 대상자, 그리고 서임 대상자를 서품하는 주교를 파문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르바노 2세는 교황권의 강화를 표시하려는 의도에 서 봉건 군주국의 통치 조직을 본따 강력한 중앙 집권 체 제의 정부를 조직하기를 원하여 교황청을 '라테란 성궁' (Sacrum palatium Lateranense) 대신에 세속 국가의 최고 통 치 기관인 궁정을 뜻하는 꾸리아(curia)라는 라틴어 단어 를 교회의 중앙 정부 공식 명칭으로 채택하였다. 이후로 꾸리아는 교황청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꾸리아의 채택은 교황청에 세 가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첫 째로 최고 통치 기관으로서의 꾸리아 설립은 교황청을 세속 봉건 국가와 대등한 위치에 올려 놓았다. 둘째로 꾸 리아라는 새로운 개념은 교황청에 사법권을 갖게 하였 다. 왜냐하면 세속 국가에서 꾸리아는 국왕의 법정도 뜻 하기 때문이었다. 셋째로 로마의 성직자를 중심으로 운 영되던 체제는 그리스도교 전체를 통치하는 군주 체제의 정부 기구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로 교황은 전 체 교회에 대해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을 행사했다. 파스칼 2세(1099~1118)가 교황에 선출된 지 1년 후인 1100년에 영국에서 헨리 1세(1100~1135)가 등장하면서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 논쟁이 일어났다. 영국 국왕은 켄 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모(Anselm, 1033~1109)에게 영국의 전통인 국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요구하였다. 대주교가 교회의 결정을 지적하면서 서약을 거부하자 헨리 1세는 이에 대한 교황의 관면을 받기 위해 1103년에 안셀모를 로마에 파견하였다. 교황은 영국 국왕의 요구를 거절하 였고 국왕은 안셀모의 입국을 불허하였다. 결과적으로 파스칼 2세는 국왕에 의해 서임된 영국 성직자들을 파문 하였다. 이러한 파문은 국왕과 대주교의 화해를 촉진하 여 1107년에 런던에서 지방 영주와 고위 성직자들이 모 인 회의에서 국왕은 성직 서임권을 포기하는 대신에 교 황청은 주교가 축성되기 전에 국왕에게 충성 서약하는 것을 약속하였다. 이 회의에서 안셀모 대주교는 성직자 의 독신 생활을 강조하였다.
파스칼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성직 서임권 논쟁에서도 양보하지 않았다. 1102년에 교황은 로마 교회 회의에서 평신도의 성직 서임에 대한 금령을 선언하였고 황제를 파문하였다. 그는 새 황제인 하인리 히 5세(1106~1125)가 다시 성직 서임권을 요구하였을 때 에 구아스탈라(Guastala) 교회 회의, 트로이에(Troyes) 교 회 회의, 베네벤토(Benevento) 교회 회의에서 하인리히 5 세를 단죄하였다. 그러나 1111년 2월에 파스칼 2세는 수트리 종교 협약을 통하여 황제의 성직 서임권의 포기 를 받아내고 신성 로마 제국 교회의 재산과 권리를 황제 에게 양도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황제와 교황 양측 의 심한 반발이 일어나 황제는 합의를 기각하고 교황을 구금하여 서임권을 황제의 특권으로 승인하도록 강요하 여 받아냈으나, 교황은 추기경단의 항의로 1116년에 라 테란 교회 회의에서 이 특권의 무효를 선언하였다. 갈리스도 2세(1119~1124)는 황제와 화해하기 위해 특 사를 스트라스부르크(Strasburg)에 파견하여 하인리히 5 세와 잠정적 합의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쟁점이 되는 문 제에 있어서는 잠정적 합의문을 명백하게 규정하지 못하 였다. 갈리스도 2세는 황제에게 성직 서임권과 교회 재 산에 대한 포기를 요구하였고 하인리히 5세는 재산을 부 여하는 조건으로 성직 서임권과 성직자들의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을 원하였다. 결과적으로 교황과 황제가 만나 기로 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1121년에 하 인리히 5세는 독일 제후들을 교황청과 평화 협정을 시작 하도록 위임하였고 교황도 동의하여 3명의 추기경을 독 일에 파견하였다. 뷔르은 의미에서는 1049년 4월에 교황 레오 9세(1049 ~1059)가 교회 개혁을 선언한 때부터, 교황청과 신성 로 마 제국이 체결한 보름스(Woms) 정교 조약이 인준된 1123년까지 이루어진 개혁을 뜻한다. 좁은 의미로는 그 레고리오 7세가 평신도(세속 군주)의 성직 서임(聖職敍 任)을 금지함으로써 서구 그리스도교를 개혁한 운동을 지칭한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의 이름을 따 서 이렇게 호칭되는데, 비록 그가 이 운동의 주창자나 완 성자는 아니지만 그의 개혁으로 상실되었던 교황권의 회 복과 함께 성직자의 생활 쇄신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의 재위 기간은 교회 개혁 운동이 절정에 다다른 시기였 으며, 교황사에 있어서 16세기의 종교 개혁과 18세기의 프랑스 대혁명에 비교될 만큼 중요한 시기로서 '그레고 리오' 라는 이름을 개혁 운동에 붙이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세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는 교황 레오 9세부터 알렉산델 2세(1061~1073)에 이르는 그레고리오 전 시대(1049~1073)이고 둘째는 그레고리오 7세가 개혁을 전개한 그레고리오 시대(1073~1085)이며, 셋째는 그레고리오 7세 이후의 개혁 교황들이 추진한 그 레고리오 후 시대(1085-1123)이다.
〔그레고리오 전(前) 시대〕 교황사에 있어서 교황 니콜 라오 1세(858~867)의 사망 이후 레오 9세의 등장에 이르 는 180여 년, 특히 요한 12세 사망까지의 100여 년은 교황권이 쇠약한 시대였다. 754년에 폰티온(Ponthion)에 서 교황청과 우호 동맹을 맺고 로마 교회의 보호자가 된 카롤링거의 프랑크 왕국이 국력이 약화되면서 로마를 둘 러싸고 있던 정치 세력들이 교황청을 지배하였다. 9세기 말에 로마 교회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스폴레토(Spoleto) 공국(公國)의 지배자들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세기에 이르는 투스쿨룸(Tusculum)의 테오필락투스(Theuphylac-tus)는 스폴레토 공작 가문 및 토스카나(Tosana)의 백작 가문과 계약 결혼을 통하여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면서 50여 년 동안 로마 교회를 지배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측근들을 교황으로 선임하였고, 나중에는 자기 가문에서 교황 요한 11세(931~935)와 요한 12세(955~963)를 선출 하여 교황직을 장악하였다. 교황 요한 12세는 961년 이브레아(Ivrea)의 베렝가리 오 2세(Berengario Ⅱ)가 이탈리아의 왕이라고 자칭하면 서, 로마의 침공을 위협하고 있었을 때에 동프랑크 삭소 니아(Saxonia)의 왕 오토 1세(936~973)에게 군원을 요청 하였다. 오토 1세는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점령된 교황령 을 탈환하였고 교황은 감사의 뜻으로 오토 1세를 성 베 드로 대성전에서 황제로 축성하였으며 이로써 신성 로마 제국이 창설되었다. 오토 황제는 '오토 특허장' 을 공표 하여 로마 교회에 이탈리아 영토의 3/4을 부여하는 대신 에 교황 피선자에게 임직 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 대해 충성 선서를 하도록 요구하였다. 교황과 로마인들 은 이탈리아 귀족들의 지배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들의 의 도와는 달리 교황령의 해방자가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 였음을 뒤늦게 깨닫고 황제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오토 황제는 963년에 로마에 돌아와서 반대파 를 진압한 후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교황 요한 12세를 폐위하고 자기 측근을 레오 8세(963~965) 교황으로 임명 하였다. 아울러 그는 로마인들에게 앞으로는 황제의 동 의 없이 교황을 선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강요하였다. 오토 황제가 로마를 떠난 후에 요한 12세는 로마에 돌아 와 레오 8세를 축출하고 사망하였다. 로마인들은 새 교 황으로 베네딕도 5세(964)를 선출하였으나 다시 로마에 온 오토 1세는 레오 8세를 복권시켰다. 이후로 황제들은 그들의 임의대로 교황을 임명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정통 교황과 대립 교황의 등장으로 내분에 휩싸였다가 1046년 수트리(Sutri) 교회 회의에서 분규가 해결되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교황뿐만 아니라 독일의 주교들도 이탈리아 교구에 임명하여 신성 로마 제국과 동등한 행정 기구를 마련함으로써 이탈리아 를 통치하려고 하였다. 교황 레오 9세(1049~1054)는 비록 하인리히 3세(1039 ~1056)에 의해 임명되었으나 즉위한 1049년 4월에 로마 에서 첫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성직 매매의 방법으로 주 교가 된 성직자들을 해임하고 이러한 주교들에게 신품성 사를 받은 신부들도 처벌하였다. 교황은 5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에 유럽을 여행하면서 지역 교회 회의들을 소 집하여 성직자들에게 교황청의 교회 개혁에 대한 결정을 알리고, 주교와 수도원장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선출해 야 하며 교황은 보편 교회 위에서 유일한 수위권을 지니 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나중에 그레고리오 7세가 된 힐데브란트(Hildebrand, 1020~1185) 외에 므와엥무티에 (Moyenmoutier)의 훔베르토(Humbeto, +1061), 베드로 다 미아니(Pieto Damiani, 1007~1072)와 같이 탁월한 인물들 을 교황청에 불러들여 그들의 자문을 들었다. 이로써 12 세기 교황권의 전성 시대를 예고하는 개혁이 시작되었 다. 빅토리오 2세(1055~1057)도 교회 개혁에 관심을 두고 1055년 6월 4일에 황제와 함께 피렌체(Firenze) 교회 회 의를 소집하여 성직 매매를 단죄하고 성직자의 독신 생 활을 명령하였다. 스데파노 9세(1057~1058)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개입이 없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이 미 레오 9세의 개혁 그룹에서 교황을 도와 개혁 운동에 참여하였고 비록 짧은 재위 기간 동안이었지만 다미아니 와 훔베르토와 같은 개혁가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여 교 회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는 1057년에 밀라노 에서 성직 매매를 반대하고 성직자의 독신 생활을 요구 하던 급진적 개혁 운동 그룹인 파타레니(Patareni)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훔베르토가 작성한 '성직 매 매자들을 반박함' 이라는 개혁서를 발표하여 개혁 의지를 보여 주었다. 훔베르토는 성직 매매를 이단으로 규정하 고 성직 매매에 의한 서품과 이러한 서품을 받은 이들이 집전한 성사와 모든 서품들도 무효이며, 교회법에 의한 선거의 완전한 회복은 교회가 평신도 지배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니콜라오 2세(1058~1061)는 교황권의 독립을 위해 1059년 4월 13일에 라테란 교회 회의에서 교황 선거에 관한 교령을 반포하였다. 그 내용에 의하면, 로마의 주교 계층의 추기경들이 의견을 수렴한 다음에 토론, 심의하 여 후보를 지명하면 다른 계층의 추기경들이 인준하고 나머지 성직자들과 신도들은 그를 교황으로 받아들이며 황제는 교황 선출에 대한 형식적 승인권만을 지니는 것 이다. 교황은 로마 교회의 성직자들 중에서 선출되어야 하나 적당한 인물이 없으면 로마 밖의 교회에서도 지명 될 수 있다. 교황 선거는 로마에서 실시되어야 하나 로마 가 안전하지 못할 때에는 다른 곳에서 실시할 수 있으며 대관식은 로마에서 거행해야 한다. 니콜라오 2세는 이탈 리아 남부 지방을 점령하고 있던 노르만족과 동맹을 맺 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통치자로 승인하면서 교 황 선거의 안전한 실시를 보장받았다. 1059년에 라테란 교회 회의는 부도덕한 성직자의 미 사 봉헌과 신자들이 그러한 성직자들의 직무를 도와주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 회의는 차부제품을 받은 성직자들 에게 독신 생활의 의무를 부과한 라틴 교회의 전통적 규 율을 상기시켰다. 로마의 귀족들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 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교령은 1060년 4월에 열린 라테란 교회에서 확인 · 강화되었다. 이로써 교황 선거에 대한 속권의 정치적 개입을 막고 교황청은 교회 모든 개 혁의 전제 조건인 독립권을 회복하였다. 니콜라오 2세는 레오 9세의 성직 매매와 성직자 독신 생활에 대한 교령 을 갱신하였고 사도적 생활을 실천하는 참사회를 설립하 는 교령을 반포하였다. 교황은 성직 매매에 의해 서품된 성직자들을 해임하는 강경한 정책보다 그들을 다시 서품 하자는 베드로 다미아니의 온건한 현실적 주장을 따랐 고, 성직자들이 평신도(제후)들로부터 본당을 받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레고리오 시대〕 그레고리오 7세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개혁가로서 신자들과 제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황 수위권의 신수설(神授說)을 주창하였다. 1075년에 교황은 교황 수위권과 무류권을 강조하는 27개 항목의 개혁 지침서 <교황 훈령>(Dictatus papae)을 발표했는데 주 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로마 교회는 하느님에 의해서 설 립되었고(1항) 교황은 보편 교회의 우두머리로서(2항) 교 회 회의를 소집하지 않고서도 주교를 임명하거나 해임하 고 전임시킬 수 있다(3, 13, 25항). 교황의 권한이 없이는 어떠한 규정도 교회법적 효력을 가질 수 없으며(17항) 교황의 명령이 없이는 어떠한 공의회나 교회 회의도 소 집될 수 없다(16항). 교황의 결정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 도 취소될 수 없고(18항) 로마 교회는 절대로 오류를 범 할 수 없으며(22항) 교회의 중요한 문제는 교황청에 보 고하여 그 결정에 따라야 한다(21항). <교황 훈령>에 근거한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정책은 룻가(Lucca)의 안셀모(Anselm)가 편찬한 《법령 수집본》 (Collectio)과 데우스데딧(Deusdedit)의 《법령 수집본》 (Collectio)과 같은 시기에 편찬된 법령들에 의해 강화되 었다. 이 개혁 법령은 교황의 수위권을 옹호, 교황의 입 법 및 사법권의 행사,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의 배격, 성 직자의 독신 생활의 강조, 성직 매매의 엄금을 주요 목표 로 편찬되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교회 개혁의 구현을 노력하였다. 1074년에 교황은 로마 에서 사순절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전임 교황들이 내세 웠던 성직 매매 금지와 독신 생활의 준수와 같은 성직자 의 생활 쇄신을 강조하였고, 1075년에 로마 교회 회의 에서는 1074년의 교령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평신도의 성직 서임을 금지하는 교령을 반포하였다. 그레고리오 7 세는 특사들을 파견하여 지역 교회에서 교회 회의를 소 집하여 교회 개혁을 구현하게 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은 강력한 반대 때문에 제한된 성공을 이루었지만 교황사에서 중요한 이정표였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1056~1106)의 성직 서임에 반대하여 일어난 카놋사(Canosa) 사건에서 그레 고리오 7세가 승리함으로써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 도권이 황제에게서 교황으로 넘어갔다. 그레고리오 7세 와 그의 개혁 운동을 이은 교황들은 서구 그리스도교 세 계의 지배 체제를 세우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제 교황은 교회의 우두머리일 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을 단합시키는 세력으로 부상하여 인노천시오 3세(1198~1216) 시대에 이르러 교황의 영향력은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그레고리오 후(後) 시대〕 그레고리오 7세가 전개한 개혁은 우르바노 2세(1088~1099)로 이어졌다. 그는 그레 고리오 7세의 개혁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하였지만 재위 초기(1088~1094)에는 당시의 정치 및 종교적 상황 때문 에 신중하게 개혁을 수행하였다. 로마에는 그레고리오 7 세를 반대하여 등장한 대립 교황 글레멘스 3세(1080 ~1110)의 추종자들이 하인리히 4세의 보호 아래 지배 세 력을 형성하고 있어 로마에 상주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르바노 2세는 1089년에 멜피(Melfi)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성직 매매와 평신도의 성직 서임 권에 대한 금령을 재확인하면서도 시행에 있어서 예외 경우를 두었다. 그는 황제에 의해서 서임되고 교회의 승 인을 받지 않은 주교라도 성직 매매의 방법을 이용하지 않았거나 서품 주교의 성직 매매를 통하지 않고 정통 교 회에서 신품을 받은 신부들의 경우에는 교황 관면권을 사용하여 그들의 서품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1092년 이탈리아에서 하인리히 4세의 세력이 약화되고 1093년 말에 우르바노 2세가 로마에 상주하면 서 교황의 위치가 견고해지자 강경한 개혁 정책을 시행 하였다. 1095년 3월에 교황은 피아첸차 교회 회의를 주 재하여 파문당한 글레멘스 3세와 그 의 추종 주교들과 정통 교회의 교구 를 찬탈한 주교들이 집전한 모든 서 품을 무효로 선언하였다. 또한 이 교 회 회의는 성직 매매에 의한 서품을 엄금, 무효화하였고 성직자의 독신 제를 천명하였다. 1095년 11월에 우르바노 2세는 클레르몽(Clermont) 교회 회의에서 평신도의 성직 서임 권에 대한 금령과 함께 성직자의 세 속 군주에 대한 충성 서약도 금지함 으로써 교권의 완전한 자율권을 요 구하는 교령을 선포하였다. 1099년 에 교황은 로마 교회 회의에서 멜피 교회 회의 결정을 확인하면서 평신 도의 성직 서임권 금령을 더욱 엄격 하게 규정하여 서임한 세속 군주의 서임 대상자, 그리고 서임 대상자를 서품하는 주교를 파문하기로 결정하 였다. 우르바노 2세는 교황권의 강화를 표시하려는 의도에 서 봉건 군주국의 통치 조직을 본따 강력한 중앙 집권 체 제의 정부를 조직하기를 원하여 교황청을 '라테란 성궁' (Sacrum palatium Lateranense) 대신에 세속 국가의 최고 통 치 기관인 궁정을 뜻하는 꾸리아(curia)라는 라틴어 단어 를 교회의 중앙 정부 공식 명칭으로 채택하였다. 이후로 꾸리아는 교황청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꾸리아의 채택은 교황청에 세 가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첫 째로 최고 통치 기관으로서의 꾸리아 설립은 교황청을 세속 봉건 국가와 대등한 위치에 올려 놓았다. 둘째로 꾸 리아라는 새로운 개념은 교황청에 사법권을 갖게 하였 다. 왜냐하면 세속 국가에서 꾸리아는 국왕의 법정도 뜻 하기 때문이었다. 셋째로 로마의 성직자를 중심으로 운 영되던 체제는 그리스도교 전체를 통치하는 군주 체제의 정부 기구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로 교황은 전 체 교회에 대해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을 행사했다. 파스칼 2세(1099~1118)가 교황에 선출된 지 1년 후인 1100년에 영국에서 헨리 1세(1100~1135)가 등장하면서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 논쟁이 일어났다. 영국 국왕은 켄 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모(Anselm, 1033~1109)에게 영국의 전통인 국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요구하였다. 대주교가 교회의 결정을 지적하면서 서약을 거부하자 헨리 1세는 이에 대한 교황의 관면을 받기 위해 1103년에 안셀모를 로마에 파견하였다. 교황은 영국 국왕의 요구를 거절하 였고 국왕은 안셀모의 입국을 불허하였다. 결과적으로 파스칼 2세는 국왕에 의해 서임된 영국 성직자들을 파문 하였다. 이러한 파문은 국왕과 대주교의 화해를 촉진하 여 1107년에 런던에서 지방 영주와 고위 성직자들이 모 인 회의에서 국왕은 성직 서임권을 포기하는 대신에 교 황청은 주교가 축성되기 전에 국왕에게 충성 서약하는 것을 약속하였다. 이 회의에서 안셀모 대주교는 성직자 의 독신 생활을 강조하였다.
파스칼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성직 서임권 논쟁에서도 양보하지 않았다. 1102년에 교황은 로마 교회 회의에서 평신도의 성직 서임에 대한 금령을 선언하였고 황제를 파문하였다. 그는 새 황제인 하인리 히 5세(1106~1125)가 다시 성직 서임권을 요구하였을 때 에 구아스탈라(Guastala) 교회 회의, 트로이에(Troyes) 교 회 회의, 베네벤토(Benevento) 교회 회의에서 하인리히 5 세를 단죄하였다. 그러나 1111년 2월에 파스칼 2세는 수트리 종교 협약을 통하여 황제의 성직 서임권의 포기 를 받아내고 신성 로마 제국 교회의 재산과 권리를 황제 에게 양도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황제와 교황 양측 의 심한 반발이 일어나 황제는 합의를 기각하고 교황을 구금하여 서임권을 황제의 특권으로 승인하도록 강요하 여 받아냈으나, 교황은 추기경단의 항의로 1116년에 라 테란 교회 회의에서 이 특권의 무효를 선언하였다. 갈리스도 2세(1119~1124)는 황제와 화해하기 위해 특 사를 스트라스부르크(Strasburg)에 파견하여 하인리히 5 세와 잠정적 합의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쟁점이 되는 문 제에 있어서는 잠정적 합의문을 명백하게 규정하지 못하 였다. 갈리스도 2세는 황제에게 성직 서임권과 교회 재 산에 대한 포기를 요구하였고 하인리히 5세는 재산을 부 여하는 조건으로 성직 서임권과 성직자들의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을 원하였다. 결과적으로 교황과 황제가 만나 기로 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1121년에 하 인리히 5세는 독일 제후들을 교황청과 평화 협정을 시작 하도록 위임하였고 교황도 동의하여 3명의 추기경을 독 일에 파견하였다. 뷔르츠부르크(Würzburg) 예비 회 담이 개최되어 양측의 의견이 합의를 보고 1122년 9월 23일에 보름스 교회 회의에서 정교 조약이 체결되었다. '갈리스도 조약' 이라고도 불리는 보름스 정교 조약은 황제가 교황과 교회에 양보하는 부분과 교황이 황제에게 양보하는 부분의 조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교황의 양보 사항은 하인리히 5세에게 국한되어 있어 그의 사망과 함 께 효력이 소멸되는 것이었다. 황제는 성직 서임권을 포 기하고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 교회법에 의한 주교와 수 도원장의 선출과 자유로운 주교 성성을 보장하였고 교황 은 하인리히 5세에게 황제가 주교 선출 장소에 입회하여 의견이 합치되지 않을 때에 선택권을 부여하였고 황제로 부터 재산과 권리를 부여받은 주교는 황제에게 봉사하는 임무를 수행할 임무를 갖게 하였다. 이 정교 조약은 독일 에서는 밤베르크(Bamberg) 제국 의회에서 인준되었고 교 회에서는 제1차 라테란 공의회(1123)에서 추인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갈리스도 2세는 부르즈 교회 회의(1119), , 랭스(Reims) 교회 회의(1119), 루앙(Rouen) 교회 회의 (1119)에서 강조한 성직 매매에 대한 금령과 성직자의 독신 생활의 준수를 재천명하였다.
[그레고리오 개혁의 구현] 수도회의 개혁 활동 : 10세 기 초에 창설된 클뤼니(Cluny) 수도원은 창립 헌장과 교 황 특권을 통해서 자율권 즉 자유 선거를 통한 수도원 총 장 선출과 세속 제후와 교구 주교로부터 치외 법권을 보 장받았다. 이 수도원은 이제까지 세속 사회에 초연한 자 세를 견지했던 수도회들과 달리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갖고 교회가 세속화의 위험에 놓여 있을 때에 개혁에 나섰다. 클뤼니 수도원은 훌륭한 역대 총장 들의 영도 아래에 개혁 운동을 확산시키면서 명성을 떨 쳤다. 많은 수도원들이 클뤼니 수도 회칙을 채택하여 개 혁하거나 클뤼니 수도회에 합병하였다. 클뤼니 개혁은 그레고리오 개혁의 길을 열어 주었고 후원하였다. 그레 고리오 7세와 베드로 다미아니와 같은 개혁 교황들과 개 혁가들이 클뤼니 개혁 정신을 체득하였다. 클뤼니 수도 자들은 역대 교황들과 긴밀하게 열성으로 협력하여 그레 고리오 개혁 운동을 확산시키고 교황의 수위권 강화에 이바지하였다.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으로부터 시작된 수도회의 교회 개혁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탈리아 지방에 있어서 로무알도(Romualdo, 951~1027)는 젊은 시절을 피레네 (Pyrenees) 산맥에 위치한 국사(Cuxa)의 클뤼니 개혁 수 도원에서 보내다가 고향에 돌아와 은수 생활과 공주 생 활이 혼합된 수도 공동체를 창설하였다. 이 수도 단체 중 에서 가말돌리(Camaldoli) 수도원은 열렬한 개혁가들을 배출하였다. 닐로(Nilus, +1005)는 로마 근교에 바실리오 수도원을 세웠고, 괄베르토(Gualberoto, 990~1073)는 피렌 체(Firenze) 근교에 영성 훈련소를 설립했다. 은수자들인 아브레섹(Abressec)의 로베르(Robert, 1047~1117)와 사비 니(Savigny)의 비탈리스(Vitalis, 1063~1122)는 순회 설교 가로서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에서 속죄의 강론을 하 면서 사도적 생활을 실천하였다. 수도회는 교회 개혁뿐만 아니라 수도회 자체의 개혁도 시도하였다. 1084년에 퀼른(Köln)의 브루노(Bruo, 1030 ~1101)는 랭스의 주교직을 사임하고 6명의 동료와 함께 그르노블(Grenoble) 근처 산악 지방에 카르투지오회를 창 설하였다. 브루노는 수도자들에게 침묵 속에 노동을 하 면서 독방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묵상 기도를 바치도록 명령하였다. 이 수도회는 회원들이 성무 일도와 미사 그 리고 축일의 식사 때에만 형제들을 만날 수 있을 만큼 엄 격한 관상 수도회였다. 1098년에 몰렘(Molesme)의 로베 르가 20명의 동료와 함께 프랑스 시토(Citeaux) 광야에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엄수하는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시토 수도회는 사도적 청빈, 엄격한 단식과 침묵, 기도와 규칙적 노동을 강조하고, 부유함을 가져오는 수도회의 봉건적 구조 질서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수도회 이상을 실현한 인물이 부르군디(Burgundy) 귀족 출신의 베르나르도(Bernardo, 1090~1153)였다. 그는 시토 수도회 에 입회한 이후 교회의 신앙 부흥과 수도자의 성화를 위 해 클레르보(Clairvaux) 수도원을 세웠다. 성직자의 생활 쇄신 : 11~12세기에 주교좌 성당의 참사 회원들의 개혁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 운동의 목적은 성직자들에게 그리스도교적 사목 정신을 각성시 키는 것이었다. 초기 교회에서 대부분 성직자들은 주교 좌 성당을 중심으로 모여 생활하면서 성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규율을 정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아우구 스티노도 자기와 함께 생활하는 성직자들을 위해 규칙서 를 작성하였다. 당시 참사 회원의 생활은 사도들을 본받 아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지향하여 공동체의 질서 와 규칙을 준수하고 주교에게 순명할 의무를 지니고 있 었다. 그러나 이들은 수도자와는 달리 개인 재산과 보다 많은 자유가 허용되어 타락의 위험이 많았다. 9세기에 이르러 주교좌 성당의 재산이 성직자의 성직록으로 분산 되고 참사 회원의 공동체 생활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바로 과거의 성직자 공동 생활 제 도를 회복시키는 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1059년 로마 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는 모든 주교좌 성당의 성직자들 에게 사유 재산을 포기하고 엄격한 규율에 따라 생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 따른 성직자는 수도 참사회 원(Canon regulars)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아우구스티노 규칙을 준수하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노 참사회원이라고 불렸다. 아우구스티노 참사회는 성직자들의 성화와 성사 적 사제직과 교회에서의 사제의 위치를 새롭게 강조함으 로써 성직자의 내적 쇄신을 전제로 하였다. 참사회가 제 시한 새로운 성직자상은 사도적 청빈, 독신 생활, 교회 지도자(주교)에 대한 복종, 신학 연구, 교계 체제에 대한 인식과 개인의 성화에 중점을 두었다. 4,500여 개의 참 사회 중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참사회는 산튼(Xanten) 의 참사회 사제인 노르베르토(Norbert, 1080~1134)가 프레 몽트레(Prémontré)에서 창설한 '프레몽트레(Praemonstratenses) 참사회' 였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교황권 특히 교황 수위권(首位權)의 강화, 수도회의 개혁, 성직자의 생활 쇄신, 교회의 자유 즉 세속 제후들의 지배로부터 교회의 자유이다. 이 중 교회의 자유는 교회가 속권과의 대립에서 특히 성직 서임권 투쟁에서 승리하여 교권의 확립을 쟁취한 것을 지칭한다. 사실 과거에는 그레고리오 개혁을 설명할 때 교회와 국가의 대립 즉 평신도의 성직 서임에 대한 논쟁에 중심을 두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도덕적 · 행정적 개혁 및 교회 규율의 개혁으로서 교황청과 성직자뿐만 아니라 유럽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친 개혁 운동이다. (→ 성직 서임권 논쟁 ; 카놋사 사건 ; 클뤼니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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