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개혁

改革

[라]Reformatio Catholica · [영]Catholic Reform

글자 크기
1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 시작되고, 종교개혁의 반동에서 성장하고, 트리엔트 공의회와 그 개혁령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가톨릭 교회 자체의 자발적이고 독자적인 교회의 내적 개혁을 말한다. 가톨릭 개혁이 바로 '반종교개혁' 은 아니다. 반종교 개혁이란 말은 처음으로 독일 역사가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가 사용한 이래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가들에 의해 널리 받아들여 졌는데, 그러나 곧 그것이 잘못된 개념이며, 지칭(指稱)인 것이 입증되었다. 왜냐하면 가톨릭 개혁을 순전히 종교개혁의 반동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톨릭 개혁은 종교개혁과는 상관 없이 그 이전에 시작되었으므로 자발적인 것이고 또 그것은 잃은 지역을 다시 가톨릭화하려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반종교 개혁과는 구별되는, 교회 자체의 개혁 즉 내적 개혁이라는 긍정적이고 고유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하면서 '가톨릭 개혁'이란 말을 사용한 사람은 오히려 프로테스탄트 역사가 마우렌브레허(Wilhelm Maurenbrecher, 1838~1892)였다. 물론 가톨릭측에서도 유명한 교황사가인 파스토르(Ludowig Freigherr von Pastor, 1854~1928)도 '가톨릭 부흥' 이라는 비슷한 개념으로 같은 주장을 하였다.
가톨릭 개혁은 대략 4단계로 구분된다. 개혁 공의회로부터 1527년 '로마 약탈' 까지 : '머리와 지체의 개혁' (Reformatio in capite et membris)은 이미 콘스탄스와 바젤 공의회(1414~1418, 1431 이후)에서 거론되었다. 그러나 공의회 우위설의 주장자들이 교황을 도외시하고 개혁을 공의회에 일임하려 하였으므로 교황들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세기의 교황들은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문예 부흥기의 교황들은 개혁을 실행하기에는 종교적으로 힘이 너무 약했다. 물론 그들에게도 개혁의 시도가 없지 않았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렇게 되자 주교와 수도회, 평신도들이 스스로 개혁 운동에 나섰다. 말하자면 지체들에 의한, 밑으로부터의 개혁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유럽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특히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집중되었다. 구체적으로 이탈리아에서는 사보나롤라(G. Savonarola, +1498) 같은 위대한 속죄 설교가가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구 수도회들의 개혁에 이어 새로운 개혁 수도회들이 잇따라 창립되었다. '신애회' (神愛會, Oratory of Divine Love)는 벌써 1497년에 창립되어 개혁가들의 묘상(苗床)이 되었다. 이어 1524년에는 테아티노회(Theatini)가, 다음해에는 카푸친회(Capuccini)가 창립되었고 스페인에서는 히메네스(Ximénez de Cisneros, 1436~1517) 추기경이, 네덜란드에서는 '공주 생활 형제회' , 에라스무스(Erasmus) 등 인문주의자들까지 개혁 운동에 나섰다.
'로마 약탈' 에서 트리엔트 공의회가 열리기까지 : 첫 단계의 개혁자들은 개별적인 그룹에 불과했지만 곧 머리인 교황들에게 받아들여져서 하나의 큰 조류를 이루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로마 약탈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르네상스의 종말을 초래한 로마 점령은 교황 바오로 3세(재위 1534~1549)로 하여금 그것을 하느님의 경고로 생각하여 회심하고 개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는 가장 필요한 추기경단의 개혁부터 시작하여 콘타리니, 가라파, 체르비니, 폴 등 일련의 개혁 투사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한편 그들로 개혁 위원회를 구성하고(1536) 개혁안을 제출케 하였다. 또 그는 테아티노회, 카푸친회 등 개혁 수도회를 장려하고, 특히 예수회를 인가하여(1540) 개혁의 투사가 되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공의회 개최를 위해 성실하게 노력하였다. 그는 칼 5세와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합의가 되었으나 프랑스와 1세의 방해로 두 번이나 실패한 후 마침내 1545년 공의회를 트리엔트로 소집하는 데 성공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 이 공의회는 두 번의 중단에도 불구하고 18년 간 지속되면서 한편으로는 종교 개혁가들에 의해 부인된 성서, 은총, 원죄, 의화, 성사 등에 관해 가톨릭 신조를 명확히 정의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간 이완되고 남용된 교회의 규율을 개혁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령을 선포함으로써 교회 개혁과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이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최고 교도직의 대답이며 가톨릭 신앙 교리에 대한 명확한 선언으로서 교회의 내적 개혁이요 참된 종교개혁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오면서 점차 강화된 교회 개혁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후 지속되어 완성을 보게 될 개혁의 매우 중요한 도구 구실을 하게 되었다.
트리엔트 개혁령의 실천 : 성공적인 공의회에 이어서 비오 5세, 그레고리오 13세, 식스토 5세 같은 3명의 위대한 개혁 교황이 출현하여 공의회 개혁 법령들의 수행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가톨릭 개혁을 성취시켰다. 그것은 주로 1605년 글레멘스 8세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외적이고 제도적인 개혁은 때마침 성인들이 많이 등장하는 시대적 분위기와 수도회의 전성기를 맞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뒷받침되면서 활력을 회복하고 교회 생활을 꽃피게 하였다. 사목 주교의 모범으로 가롤로 보로메오, 베드로 가니시오, 프랑스와 드 살 등을, 그리고 위대한 성인으로는 필립보 네리,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요한 등을 들 수 있다. 교황은 개혁의 정상에 서서 개혁을 직접 조종하였고, 그 결과 교황의 종교적 정신적 권위가 더없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의 미사 전서(1570), 하나의 그레고리오력(1582), 하나의 라틴어 성서(Vulgata, 1590) 등을 통해 로마가 세계 교회의 통일적 규범이 되는 새로운 형태의 중앙 집권주의를 형성하였고, 또한 로마에 각국의 신학원을 세워 현지 성직자를 양성하게 함으로써 또 다른 의미에서 로마를 세계 교회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가톨릭 교회는 가톨릭 개혁에서 힘을 얻어 14~15세기의 여러 문제점들과 16세기의 신앙 분열을 극복할 수 있었다. 나아가서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자기 주장을 하고, 이에 맞서서 개혁을 할 수 있는 힘도 얻어냈다. 반종교 개혁은 가톨릭 개혁 없이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반종교 개혁은 가톨릭 개혁에서 대항할 힘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속권의 뒷받침이 있는 곳에서는 성공도 하였다. (→ 반종교 개혁 ; 트리엔트 공의회)
※ 참고문헌  W. Maurenbrecher, Geschichte der Kath. Reformation 1.,Nordingen, 1880/ Pastor V-XI(Geschichte de Papste in Zeitalter der Kath. Reformation und Restauration)/ H. Jedin, Kath. Reformation oder Gegenreformation?, Leipzig, 1946/ P. Janelle, The Cath. Reformation, Milwauke, 1949/ 아우구스트 프란츤 저, 최석우 역, 《敎會史》, 분도출판사, 1982. 〔崔奭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