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건축

建築

[라]architectura Catholica · [영]Catholic archite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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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갈리스도 교황(위)과 성녀 도미틸레(아래)의 카타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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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갈리스도 교황(위)과 성녀 도미틸레(아래)의 카타콤바.

가톨릭 교회에서 건립한 건축물의 총칭. 일반 건축과 같이 건축의 3대 요소인 구조, 기능, 미에 충실해야 하며, 특별한 양식(樣式)이나 형태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대상은 성당 · 경당 · 묘 등이고 수도원, 사제관 등도 포함된다. 이 중 특히 성당 건축은 가톨릭 문화의 표상(表象)으로 시대와 신앙의 내용을 반영하면서 다양하게 변천, 발전하여 왔기 때문에 여기서는 가톨릭 건축을 대표하는 성당 건축을 주로 다루고자 한다.
〔전례와 성당 건축〕 종교는 궁극적 실재(實在)인 신(神)에 대한 믿음과 의식 · 의례 행위이며 상징을 통해 이해되고 표현된다. 따라서 종교 건축은 종교적 실천 행위(전례)가 이루어지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 실재를 표상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러한 기능적 구조와 상징성이 종교 건축의 바탕이 된다. 가톨릭 교회의 전례는 하느님과 구원되어야 할 인간들과의 결합이며 끊임없는 만남이다. 그러므로 성당은 '신의 집' (Domus Dei)일 뿐만 아니라 전례의 기능을 담는 그릇으로서 '신자들의 집회소' (Domus Ecclesiae)이기도 하다.
〔성당 건축의 본질〕 보편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가 지향하는 바, 즉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대한 당신 계획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수행케 하신 복음 선포(keryg-ma), 봉사(diakonia), 친교(koinonia)의 기능을 가지며, 성당 건축은 무엇보다 먼저 이 세 가지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편리한 기능 공간이어야 한다. 이러한 기능과 효용성은 성당 건축 이념의 선(善)에 해당된다. 다음으로, 교회는 진실과 질서를 최고로 수용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실한 구조적인 표현을 가져야 하고, 재료가 가진 성상(性狀)을 참되게 살려야 한다. 허구, 허식, 허위가 있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고딕(Gothic) 성당을 성당 건축의 모범으로 삼는 것은 기능, 구조, 의장이 일치한 고딕 양식의 진실성과 도덕성 때문이지 초월성을 표현한 외관 형태 때문만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건축 과정이 진실하여야 한다. 건축주(신자)로부터 설계자, 시공자, 그리고 기능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성실한 참여가 요구되며, 이를 통해 신자들의 승고한 뜻과 열심한 기도, 헌신의 땀이 표현되어야 한다. 이를 성당 건축 이념의 진(眞)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건축적 미(美)를 들 수 있다. 미는 건축 공간의 적절한 구성과 건축 구상의 특성 있는 표현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를 위해 비례, 조화, 균형, 선율, 위계, 반복, 대비 등의 미적 속성을 구사한다. 모든 종교는 예술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으며, 특히 그리스도교에서는 신(神)이 미(美) 자체로 해석되기도 한다. 한때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시각 예술을 배척하기도 하였으나 가톨릭은 줄곧 서양 예술을 주도하여 왔다. 예술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 종교적 체험과 진실를 추구하고 하느님과 하나될 수 있는 감정을 더욱 갖게 함으로써 현대에도 종교 예술의 표현적 요소는 강조되고 있다. 이와 같이 건축적 진 · 선 · 미는 시대와 지역, 민족을 초월하여 교회 건축의 본질적인 요소를 이룬다.
I . 서양 성당 건축의 발자취
〔고대 가톨릭 교회〕 박해 시대의 교회(2~3세기) :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들의 경신례를 위한 특정한 건물이나 장소를 생각하지 않았다. 더구나 박해 시대에는 교회 건축은 물론 공공 장소에서의 모임조차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때때로 신자의 일반 주택이나 산과 계곡, 심지어 카타콤바(Catacomba)라는 지하 공동 묘소에서 예배를 드렸다.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 건축(4~8세기) :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그리스도교인들은 공적으로 예배를 거행할 수있게 되었고, 당시 로마 도시의 어디에나 있었던 공공 건축물 바실리카(basilica)가 예배 · 집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바실리카 양식의 건물은 왕궁의 알현 홀 양식으로부터 나왔는데, 시장과 법정을 겸비한 일반 공회당과 같은 건물이었다. 내부 가운데는 천장이 높고 넓은 장방형 공간 신랑(身廊, nave)이 있으며, 양 옆으로는 열주에 의해 구분된 보다 좁고 천장이 낮은 측랑(側廊, asile)이 있다. 이러한 장축(長軸)의 양쪽 끝에는 흔히 바닥이 높고 배후 벽면이 반원형인 앱스(apse)가 있는데, 이 부분은 집회의 의장이나 재판관의 자리였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기존 바실리카를 그들의 교회로 삼았지만, 점차 예배의 기능과 그리스도교의 이념에 맞게 변형, 개조함으로써 교회 건축의 원형이 된 바실리카식 성당 형식으로 발전시켰다.
로마의 바실리카는 두 개의 축에 대해서 대칭으로 배열되었지만 개조된 바실리카식 성당은 두 개의 앱스 중 하나를 제거하고 나머지 앱스에 사제석을 두었으며, 사제석 가까이 신랑 가운데에 제단을 만들고 맞은편 입구에 출입구 배랑(拜廊, narthex)을 두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실리카의 이중 대칭성을 깨고 제단과 입구를 연결하는 장축만을 남겨서 그것이 제단을 향해 나아가는 직선 통로가 되게 하였다. 이제 공간은 한눈에 파악되고 제단을 향한 투시 효과는 열을 이룬 기둥들로 인해 더욱 강조되었다. 이처럼 방향이 잡힌 바실리카는 그리스도와의 친교의 상징인 제단에 이르는 구제의 통로라는 길이 만들어져서 그리스도교의 신앙 내용과 결합하게 되었다. 또 광창(光窓, clearstory)을 통하여 내려오는 하늘의 빛은 어두운 곳을 밝혀 주는 역할과 함께 내부 공간을 변형시켜 비물질화된 영적 공간을 연출하였다.
비잔틴 성당 건축(4~14세기) : 로마가 그리스도교 제국의 첫 수도를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옮김에 따라 많은 교회가 그곳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바실리카식이었으나, 점차로 둥근 돔(dome) 지붕을 가진 집중형으로 발전되었는데, 이를 비잔틴(Byzantine) 양식이라 한다. 이 양식은 동 · 서 로마 제국의 분열과 함 께 시작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 Byzantium)을 중심으로 한 동방 교회 건축의 원형이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순교자들은 신앙의 영웅으로 간주되었고, 그들의 유해는 능묘에 모셔지기 시작하였다. 이 순교자들의 능묘는 돔으로 된 동방 이방인의 무덤 형태를 모방한 것인데, 이것은 영웅과 신의 기념 건축물에 이미 사용하였던 적이 있는 로마인들에게도 친숙한 형태였다. 중심성과 수직성을 강조한 소위 중앙 집중식 교회 건축은 이러한 묘당(廟堂) 건축에서 유래되었다. 이렇게 2개의 제례, 즉 예수와 성인에 대한 예배 의식의 융합은 두 건물의 유형 사이에 관계를 맺게 하였다. 비잔틴 성당은 바실리카식의 유축형(有軸形)과 중앙 집중식의 유심형(有心形)을 결합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로, 동양적 요소인 돔을 고전적인 열주식에 혼용시킨 것이다.
〔중세 가톨릭 교회〕 로마네스크 성당 건축(9~12세기) :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부터 13세기 고딕 건축 양식이 발생하기까지 서부 유럽 각지에 건축된 양식이다. 중세 문화에 적합하도록 로마의 건축 기법에 게르만적 요소를 가미하여 변용, 발전시킨 것이다. 그 평면 형식은 바실리카에서 발단한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 형태의 뒤를 이은 라틴십자(Latin cross)형으로, 내부는 신랑과 측랑으로 구분되고, 신랑의 폭은 측랑의 두 배였다. 성가대석은 한 단 높은 곳에 만들었으며, 그 하부에 성인의 유골을 안치하는 지하 성당인 크립타(crypt)를 설치하였다. 성당의 탑은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창시된 것으로, 서쪽 정면이나 교차부, 측랑의 양끝 등에 서서 아치의 측압력을 받는 역학적 기능과 하늘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는 상징적 기능을 하였다.
당시 성당 건물이 수행해야 할 기능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성당은 마당이나 광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행위들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만 하였다. 따라서 기능적으로 평면의 분화와 전체 건물의 형태적인 통합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평면의 분화와 탑들의 합체로 균일한 초기 바실리카는 분절을 이룬 기준 치수의 유기체로 발전하였다. 그 과정은 내부와 외부 벽체의 점진적인 세분과 조형적 분절로써 명백해지고 또한 단계적으로 계속 되었다. 그리하여 중세의 베이(bay) 체계가 발전되었으며, 베이 체계는 육중한 연속적인 벽체 구조를 골격으로 변형시켰다. 응력의 집중과 버팀은 상부로 올라갈수록 벽의 두께를 감소시키고, 이것은 시행 착오를 거쳐 부재(部材)의 근육적 감각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로마네스크의 교차 볼트(vault), 다각형의 기둥, 리브(rib) 그리고 버팀벽(buttress)은 서로 잘 엮어져서 하나가 되었으며, 벽체의 표면은 점진적으로 분절되었다. 그리하여 바실리카 단면을 지닌 성당들에서 공중 회랑(tiforium)이라 불리는 제3의 층이 아케이드(arcade)와 광창 사이에 도입되었다.한편, 내부의 통일성을 방해했던 개선문은 제거되고 중정(atium)이 사라짐으로써 파사드(facade, 서양 건축의 정면 · 전면)로 관심을 증대시키게 되었다.
고딕 성당 건축(12~14세기) : 폐쇄적이고 자급 자족적이었던 장원(莊園) 제도 하의 유럽은 11세기가 되면서 화폐 교역 경제가 싹트고 중산 상공인 및 장인 등의 시민 계급이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부를 축적한 각 도시들은 경쟁적으로 거대한 성당들을 건설하였다. 일반적으로 중세 도시는 살아 있는 유기체를 닮았는데, 그것은 물리적인 것 이상의 것이었다. 여기서 성벽은 단단한 껍질이며, 교회는 정교한 핵이었다. 성당은 도시의 상징적 존재로서 그 공동체의 긍지였고, 시민들의 야망과 열망이 그 성격과 형세를 결정했다. 고딕 성당은 이러한 사회 · 경제적인 배경뿐만 아니라 스콜라(schola) 철학이라는 정신적 배경의 산물이었다. 스콜라 철학에 대응한 성당 건축의 원리는 공간의 분절화와 빛의 초자연적인 해석이었는데, 성당 내부는 가능한 많은 부분들로의 체계적 분절과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에 의한 신비스런 빛의 연출로 질서 잡힌 영적인 세계가 만들어졌다.평면은 성숙한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어떤 것들은 수랑(袖廊, transept)과 이중 측랑을 지니고 있으며, 보회랑(步廻廊, ambulatory)과 방사형으로 배열된 예배실들을 지닌 내진(內陣, chancel)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로마네스크 성당의 형태와 공간 구성은 전체가 베이의 단순한 부가에 의한 집합체였던 데 반해 고딕 성당은 각 부분, 즉 베이들이 독자적인 성격을 지님과 동시에 전체에 유기적으로 통합되는 성격을 지닌다.
고딕 건축의 기본적 현상은 통일과 분화의 이상적인 평면 조합과 함께, 벽체와 볼트에 대한 새로운 구조적 해석에서 비롯되었다. 오랜 시행 착오와 연구를 거쳐 외부 보강을 위한 논리적 체계가 고딕의 볼트와 벽체에 집중된 힘을 처리하기 위해 발전되었다. 내력 리브와 첨두형 아치의 도입으로 측면의 응력을 감소시키고 볼트 면을 더욱 얇게 할 수 있었다. 또, 비량(飛梁, flying buttress)과 버팀벽은 그 자체가 응력에 반하여 작용하는 강한 팔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고딕의 유기적인 구조체는 로마네스크보다 더욱 가늘어지고 강해졌다. 벽체의 기능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킴으로써 벽을 부정하고, 대신에 스테인드 글라스의 광벽(光壁)으로 채움으로써 초자연적인 신성한 공간을 연출한 것이다. 매우 영적인 내부와 이지적인 외관을 달성한 고딕 성당은 그 시대의 정신, 즉 이성과 신앙을 구별하면서도 조화를 추구한 스콜라 철학을 담은 건축적인 기념비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숨마' (summa, 大全)요 또 다른 '스페큘름' (speculm, 反射鏡), 즉 돌에 새긴 백과 사전이었다. 이렇게 고딕 성당은 도시의 중심이 되고 도시와 일체가 되면서도 영적으로 승화되어 상징화되었다. 그리하여 고딕 성당 건축은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교회 건축의 원형으로 자리를 굳혔다.
〔종교개혁 이후의 가톨릭 교회〕 르네상스 성당 건축(15세기) : 중세 말기의 신비주의 경향, 스콜라 철학의 붕괴, 교황권의 쇠퇴, 도시 중산층의 형성 등은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을 계기로 활발해진 고전 문화 연구는 르네상스를 통해 유럽 사회에 전반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르네상스 문화의 본질은 과거 그리스와 로마 시대를 황금 시대로 보고 그 안에서 상상력을 동원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 있었다. 이런 맥락 속에서 르네상스인들은 그리스도 교회와 이교(異敎) 신전의 가치를 동등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로마의 이교 신전들이 성당 건축의 본(本)으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났는데, 첫째는 중앙 집중식 설계가 널리 이용된 것이고, 둘째는 측랑이 없어지고 대신에 부속 성당(chapel)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르네상스인들의 새로운 질서 개념에 대한 적응은 기하학적 처리와 집중화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원형, 다각형, 그리스 십자형 평면 등과 부차적인 부속 성당들의 가능한 모든 조합들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가톨릭 성당은 여전히 바실리카 양식을 지향하고 있었다. 따라서 건축가들은 집중화와 장축 방향 설계를 통합하려는 새로운 계획을 시도하였다. 여기서 2개의 기본 유형이 만들어졌는데, 하나는 주 공간 주위로 보조 공간들이 부가됨으로써 이루어진 중앙 집중적인 그룹(goup)형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의 축에 독립된 여러 공간을 부가시켜 만든 장방형의 연속에 유심 공간의 그룹을 결합시킨 조합형이다. 르네상스 성당은 공간 부가의 원리에 의해 구성됨으로써 중앙 집중형 성당은 물론이고 장방형 성당까지도 모든 구성 공간들이 전체에 종속되면서 명확하고 한정된 실체로서 독립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 개념은 '우주 질서의 가시적 · 수학적 구체화' 였고, 건축 의미는 '자체의 진정한 핵을 형성하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플라톤주의의 종합' 이었다.
매너리스트 성당 건축(16세기) : 트리엔트 공의회를 계기로 전통성의 강화와 내적 쇄신 운동을 시작한 가톨릭 교회는 유심 평면(타원형)에 대해 현저하게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전통의 고수와 르네상스의 이교적 형태를 배제하고, 유심형 공간 형태가 가지는 전례상의 불편함과 제단 위치에 관한 문제였다. 그러나 건축가들에게 있어서 집중화는 여전히 매력적인 것으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유심성과 장축성의 통합에 대한 흥미로운 시도가 역시 있었는데, 이 문제는 타원에 의해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일반적으로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기본적인 두 유형의 평면을 발전시켰는데, 큰 성당들은 집중화된 장방형의 평면(라틴 십자형)을, 작은 성당과 부속 성당은 길게 늘어진 유심 평면을 채택하였다. 두 유형은 확장된 공간 체계 참여를 원하는 새로운 요구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들이 이성으로서 신앙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기 때문에 교회 건축에서 실용성을 강조한 데 비해, 가톨릭교인들 특히 예수회는 신앙의 문제를 이성보다는 정서에 호소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 종교의 통속적인 반지성적 유형이 생겨났다. 그것은 그 후 2세기 동안 전체 가톨릭에 전파되었고, 도로에 있는 십자가, 성당, 그리고 성소들과 같은 종교적 건축물들로 경관이 충만해지면서 시각적으로도 명백해졌다. 이러한 16세기를 매너리즘(mannerism) 시대라 하는데 대비, 긴장, 갈등을 표현한 매너리스트 형태는 이중성과 역동성을 띠게 되었다.
바로크 성당 건축(17~18세기) : 바로크(Baroque) 건축은 새로이 강화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중앙 집권화된 프랑스의 정치 조직을 반영한 것이다. 곧, 바로크 예술의 목적은 그 체계의 엄격한 조직을 상징화하려는 것으로, 바로크 건축은 역동성과 체계화의 독특한 종합이라고 볼 수 있다. 성당의 평면들은 16세기 후반 수십 년 간 유행했던 중앙 집중형의 장방형 평면과 길게 늘어진 타원형 유심 평면의 기본 유형들에 대한 변형들이었다. 이러한 배치들로부터 발전한 공간적 통합이 특히 강조되었고 진보된 공간 유형들이 시험되었다. 그것은 광선과 음영의 강한 대조, 큰 것과 작은 것, 단순한 것과 복잡한 것의 대조, 점차적인 감각 변화, 궁극적인 클라이맥스의 제시 등으로 교향악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19세기 성당 건축 : 나폴레옹의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민족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발생한 낭만주의는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회복시켜 줌과 동시에 교회 건축의 이상(理想)으로서 고딕 양식을 다시 부흥시켰다. 객관적 주지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고전주의에 비해서 주관적 정서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낭만주의는 18세기 중엽 영국의 고딕 부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낭만주의의 일반적 특징들, 이를테면,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숭배, 기묘하고 신비스러운 것에 대한 선호, 비일상적인 것의 추구 등이 중세 고딕의 복고를 통해 구현될 수 있었다. 바로크에 이어 신고전주의가 뒤따랐고, 이어서 19세기 낭만주의와 절충주의가 도래하였는데,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하고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까지는 고딕 양식만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완벽하게 꽃피워 주는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신학적인 관념보다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으며, 내부 공간의 견지에서 볼 때 새로운 개념이 전혀 없는 무분별한 복사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국가 관념이 왕성했던 이 시대에 교회만이 국가를 초월하여 가톨릭적인 일치에로 되돌아가려고 하였으며, 그것은 고딕 복고의 교회 건축에서 달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 가톨릭 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성당 건축(1900~1962) : 20세기 들어 교회 건축은 많은 변화 를 겪고 있다. 그 변화는 지금까지의 양식 변천과는 다른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사회 경제적인 변화, 휴머니즘, 민주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의 시대 사상과 현대 신학 등에 기인한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교회의 역할과 전례의 변화가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다. 전례의 변화는 19세기 말 성 베네딕도 수도회를 중심으로 벨기에와 독일에서부터 시작한 전례 운동의 결과였다. 교회의 전례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키려는 이 운동은 모든 신자들이 전례, 특히 미사를 정확히 알고, 사제의 기도(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는 라틴어만 사용)를 이해하도록 하는 운동임과 동시에 일종의 교회 내적인 개혁 운동이었다. 독일에서는 독일어로 된 《미사 경본》이 발간되었고(1884), 교황 성 비오 10세는 교령을 통해 영성체에 있어서 초대 교회의 관습에로 복귀하도록 권장하였다. 1947년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回勅, MediatorDei)을 통해 미사의 중심적인 위치를 강조하고 평신도 사제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55년 성주간 예절이 부활되고, 1957년에는 저녁 미사의 거행이 허용되었으며, 영성체 전의 공심재(空心齋) 규정이 완화되었다.
이러한 전례의 개념과 내용 변화는 회중석과 제단 사이의 적극적인 관계를 추구하게 하였고, 이것이 내부 공 간에 영향을 미쳐 종전의 긴 회중석을 지닌 장방형 평면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그리하여 장방형 평면이 추고(追 考)되고, 심지어는 원, 타원형, 사다리꼴 같은 평면까지 시도되었다. 전례의 기능에 성당 건물의 존재 원리(raison d'être)를 부여하는 새로운 신학관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는 근대주의(modernism)의 이념이 교회 건축에서도 합리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양식주의 건축에서 벗어나 근대 건축이 성당의 적합한 표 현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이후 부터이며, 그 전까지 전례 운동은 이론에 머물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성당 건축(1962~ ) : 가톨릭 교회를 내적으로 쇄신하고 현대에 적응시키며 외적 으로는 문호를 개방하여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치를 촉진시키기 위해 소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 10~1965. 12)는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을 포함한 헌장 4개와 교령 9개, 선언 3개를 발표함으로써 현대 교회에 대한 세부적 사항을 집대성하였다.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요한 23세가 주창한 '아조르나멘토' (Aggiornamento)란 말은 개혁이 아닌 쇄신 또는 적용을 의미한다. 이 의미는 전례 원칙에 적용되고, 변화에 대한 유일한 지침이 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400여 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던 가톨릭 전례는 급격한 쇄신을 거쳐 오늘날의 미사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전례의 변화와 가톨릭 교회의 현대화는 60년대 이후의 성당 건축에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변혁은 이제 전세계적으로 공식화되고 보편화되었으며, 토착화가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현대 성당 건축의 중요한 경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례의 기능에 충실한 평면 구조는 제단을 중심으로 회중석이 집중된 형태이다. 따라서 장방형의 긴 평면 대신에 정방형, 원형, 타원형, 십자형, 선형(扇形), 다각형 등의 평면이 사용되고 있다. 둘째, 건축가의 창조성에 의존하여 자유롭게 건축됨으로써 과거의 양식에서 탈피하고 있다. 셋째, 교회가 지역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됨에 따라 세속화되고 전례 외에도 다양한 기능을 수용함으로써 다용화되고 있다. 성당은 이제 성스러운 장소만이 아닌 신앙 공동체의 집으로서 공동체 내의 모든 활동이 이곳에서 이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다양한 방식에 의해 성당 공간의 다용성(多用性)이 추구되고 있다. 넷째, 비종교적이고 세속적인 현대 사회에서 과거 고딕 성당이 가지던 위세와 초인간적인 스케일은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되었다. 개인을 중시하고 이웃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민주 정신은 성당 건축의 주거화, 인간화, 환경과의 조화를 구체화하고 있다. 즉, 성당은 그가 위치한 지역 사회의 경관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인접 건물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신자들의 생활의 연장으로서 주거의 스케일, 인간적인 스케일을 갖는 건물이어야 하는 것이다. 다섯째, 현대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종교개혁 후 거부했던 예술에 다시 접근하고, 가톨릭이 초기 교회의 단순성으로 복귀하려 함으로써 이들의 교회 건축에 대한 접근 태도는 서로 비슷해져 가고 있다.
II . 한국 성당 건축의 발자취
〔박해 시대(1785~1886)〕 박해 시대에는 공적인 교회 건축이 불가능하였다. 신자들은 신부가 상주하는 집이나 일반 사가(私家) 중인들의 약국, 서당 같은 곳에 모여 은밀히 예배를 드리고 교리도 강습받았다. 심지어 심산 유곡의 옹기굴, 숯굴 등이 신자들의 집회 장소와 은신처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마치 서양 교회 건축사의 카타콤바 시대와 유사한 때였다.
〔신교(信敎) 자유와 개화기(1886~1910)] 1886년에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되자 프랑스인 신부들은 박해 시대 때 교회와 인연이 깊었던 곳이나 그 부근의 땅을 사들여 성당의 터전으로 삼았다. 지상 교회의 상징인 성당 건축이 서울, 대구 등의 대도시에서부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그 유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주로 지방에 지어지고 한국인 평신도들의 자본에 의해 건축된, 구조와 외관이 한국 전통 목조 건물 양식인 한옥 성당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도시에 지어지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재정적인 도움에 의존하였던 고딕 양식을 지향한 벽돌조 양식 성당이다.
한옥 성당 : 박해 시대 때 비밀리에 모여 예배를 드렸던 한옥 사가나 서당 등을 개조하거나 증축해서 지은 공소가 지방에 많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부가 상주하는 본당인 경우, 가톨릭 전례를 집행하기에는 협소할 뿐만 아니라 내부 공간의 요구 기능에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성당의 기능적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구조와 외관은 전통적 목조 건축 양식인 과도기적 성당 건축이 추구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890년대와 1900년대의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192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며, 서양 건축사에 있어서 4~6세기의 초기 그리스도교 바실리카식 성당과 비견될 수 있다. 한옥 성당 건축의 배경 및 발생 요인으로 첫째는 전통 문화에 대한 토착화 추구, 둘째는 재정의 빈곤, 셋째는 건축 기술의 미발달과 기술자 부족, 넷째는 전통 종교 건축과 교육 건축의 영향 등을 들 수 있다. 초기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시도- 예를 들면 바실리카식 장방형 공간과 구심적인 8각형의 돔 공간을 결합한 평양 성당(1895)과 청계 성당(1898), T자형의 옛 공세리 성당(1897) , 그리스 십자형의 옛 계산동 성당(1899) 등-가 있었으나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하고 고산 되재 성당(1894)과 익산 화산 성당(1906)으로 대표되는 단층 삼랑식(三廊式) 한옥 성당 유형으로 보편화되었다.
양식 성당 : 유서 깊은 교우촌을 중심으로 과도기적인 한옥 성당이 전개되는 동안 신앙의 자유가 먼저 확보된 대도시와 개항지에서는 프랑스 신부들의 주도 하에 중세 양식의 벽돌조 양식 성당이 일반화되었다. 당시는 서양 건축사에 있어서 근대 건축 사상이 막 싹트고 있을 무렵으로, 아직 양식적(樣式的) 건축이 지배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중세의 신학 사상과 신념 체계를 잘 반영한 고덕 양식은 오랜 박해 끝에 자유를 맞이한 당시 한국 교회의 요구에 가장 적합하였고, 당시 한국 교회를 주도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 이념과도 일치하였으며, 건축을 담당한 선교사들의 개인적 취미와 경력, 문화적 배경과도 부합하였다. 원래 고딕 양식은 구조와 재료, 의장과 건축 체계가 합치된, 중세의 가장 대표적인 석조 건축 양식이었으나, 서양식 건축에 대한 기술과 경험의 축적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벽돌조로 된 일종의 잔류 고딕(gothic survival) 또는 유사 고딕의 형태를 띤 것이었으며, 로마네스크 양식에 머문 것도 많았다. 주요 건물로는 약현 성당(1891~1892) , 명동 대성당(1892~1898) 인천 옛 답동 성당(1894~1897) 평양 관후리 성당(1900), 대구 계산동 성당(1901~1902), 원효로 성당(1907), 풍수원 성당(1907), 전주 전동 성당(1908~1914) 등이 있다.
한국 최초의 양식 성당으로 이후 한국 성당 건축의 표본이 되었던 약현 성당은 후에 명동 성당의 설계와 감독을 맡았던 코스트(J. Coste) 신부에 의하여 지어졌다. 평면은 열주에 의해 회중석이 신랑과 측랑으로의 구별이 뚜렷한 삼랑식으로 된 라틴식 십자형의 건물이다. 이보다 6년 후에 완공된 명동 성당은 고딕 구조에 훨씬 가까운 본격적인 가톨릭 성당이다. 전형적인 라틴 십자형 형식의 평면으로 신랑과 측랑은 물론 수랑과 보회랑이 뚜렷하게 자리잡고 있다. 본격적인 광창이 있고, 쓰이지는 않지만 공중 회랑도 있다. 내부 천장은 비록 목구조로 흉내를 내었지만 십자 리브 볼트(cross rib vault) 구조가 명확히 드러나서, 스테인드 글라스로 들어오는 빛과 리브로 분할된 곡면 천장에서 울려퍼지는 음의 효과와 함께 훌륭한 고딕적인 내부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특히 지하 성당의 조적식(組積式) 리브 볼트 구조는 완벽한 서양식 볼트 구조를 보여 준다. 비량은 생략되어 있으나 외부의 버팀벽과 높은 종탑으로 고딕 성당의 모습을 훌륭히 나타내고 있다.
계산동 성당은 2개의 종탑을 가진 로마네스크 양식에 가까운 구조와 고딕식 평면과 세부 장식을 가진 건물이다. 평면 구성은 역시 라틴 십자형의 삼랑식이나 내부 공간이 길이에 비해 낮아 수직 방향성이 약하고 의장 처리에 있어서 명동 성당보다 뒤떨어진다. 전동 성당은 정면 중앙 종탑부와 양쪽 계단탑(turet)에 비잔틴풍의 총화형(蔥華形) 뾰족 돔을 올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다. 평면 구성은 삼랑식이며, 8각 석조 열주의 아케이드와 천장에 의해 신랑과 측랑의 구별이 뚜렷하고, 열주 사이는 반원형 아치로 연결되어 있다. 육중한 벽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부 공간이 밝고, 색감 등이 온화하며, 이국적인 동시에 토착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일제 시대(1910~1945)〕 일제 식민지 통치 하에 정교 분리 원칙(政教分離原則)을 고수한 가톨릭 교회는 신자 수가 증가하고 교세는 확장되었으나 내적으로는 축소되고 현실 도피적인 경향으로 흘렀다. 그리하여 초월주의적이고 내세주의적인 구령 종교(救靈宗敎)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초기 교회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신도들의 자세는 충직한 교회의 협조자 혹은 추종자의 자세로 변하였으며, 성당 건축 역시 외국인 성직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이 시기에 지어진 성당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전기(前期)의 한옥 성당에 서양식벽돌로 종탑을 결합하거나 목조와 조적조를 혼용한 한 · 양 절충식이고, 다른 하나는 벽돌조의 양식 성당이다.
한 · 양 절충식 성당 : 초기 목조 한옥 성당이 1910년대 이후에는 양식 벽돌조 종탑을 증축하거나 벽체를 벽돌로 바꾸는 등 한 · 양 절충식으로 개조되었으며, 지방에 새로 짓는 많은 성당이 이러한 형태였다. 이런 경향은 1900년대 중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상가 건물의 영향이 컸으며, 경제적인 여건과 토착화 추구, 벽돌의 대량 생산, 세상으로부터의 보호와 초월적 열망을 높은 벽돌조 종탑을 통해 표현코자 한 의도 등이 주요 요인이었다. 대표적인 건물로는 증 개축한 화산 성당(1916), 황해도 은율 성당(1918), 안성 구포동 성당(1922), 신의주 성당(1926), 서포 성당(1931), 진남포 성당(1933) 평안남도 마산 성당(1934) 등이 있다.
양식 성당 : 일제 시대의 양식 성당은 대부분 교세가 크고 재정이 튼튼한 본당에서는 명동 성당을, 그렇지 못한 작은 본당에서는 약현 성당을 모범으로 삼았다. 초기에는 비교적 양식에 충실했으나 점점 소규모화되고 단순한 형태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내부의 열주가 제거되기도 하고 천장의 볼트 구성도 쇠퇴하여 평천장으로 되거나 완만한 바스킷 형으로 되어 공간의 분절화가 쇠약해진다. 종탑과 외관의 일부 양식적 요소만 고수될 뿐 내부 공간의 의미와 공간성은 사라지고 최소한의 기능 충족에 그치게 되었다. 주요 건물로는 콘크리트조와 벽돌조를 혼용한 인천 답동 성당(1933~1937)과 용소막 성당(1915), 대전 목동 성당(1921), 낙산 성당(1923), 명동 일본인 성당(1928), 옛 왜관 성당(1928), 옛 합덕 성당(1929), 장호원 성당(1930), 예산 성당(1934), 공주 성당(1936), 서산 성당(1937), 서정리 성당(1938) 등이 있는데, 이들은 삼랑식 장방형 평면 구조이다. 내부 열주가 없는 홀형 성당으로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 성당(1916), 대구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성당(1927), 하양 성당(1931), 옛 완월동 성당(1923), 영천 성당(1936) , 언양 성당(1936), 문산 성당(1937), 광주 북동 성당(1937), 옥봉 성당(1938), 가야 성당(1939) 등이며, T자형 평면으로는 공세리 성당(1921)이 있다.
〔해방과 격동기(1945~1962)〕 민족의 해방과 더불어 주어진 완전한 종교의 자유와 국토의 분단, 6 · 25 동란의 격동기를 통해 신자수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것은 무엇보다 전쟁에 시달린 민중이 교회에서 정신적 위안과 의지처를 찾으려 한 때문이다. 이 시대의 성당 건축은 일제 시대보다훨씬 단순하고 일률적이었다. 그것은 교세의 양적인 팽창에 따라 짧은 시간에 많은 건물이 지어졌고, 대부분 외국의 교회와 신자 단체의 원조에 의존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건축을 주도한 성직자, 지도급 신자들의 건축에 대한 양식 부족이 더 큰 원인이었다. 다만 1950년대 말부터 몇몇 근대적인 성당 건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성당 건축은 세 갈래의 유형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양식(樣式) 변형의 양식(洋式) 성당이고, 다른 하나는 탈양식(脫樣式)의 근대주의적 성당이며, 나머지 하나는 형태의 토착화를 추구한 절충식 성당이다.
양식 성당 : 이 시기의 양식 성당은 내부의 열주가 사라지고 수직 · 수평의 분절이 약화된다. 그러나 외관, 특히 종탑과 정면의 양식적 형태와 상세는 고수된다. 특히 전쟁 후에는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와 견고함이 새삼 인식되어 성당은 하느님의 견고한 성과 같이 표현되기도 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춘천 죽림동 성당(1952), 의정부 성당(1953), 용산 성당(1954), 원주 원동 성당(1954), 완주 삼례 성당(1955), 돈암동 성당(1955), 군산 둔율동 성당(1955), 횡성 성당(1956), 김포 성당(1957), 안동 목성동 성당(1957), 제기동 성당(1957), 홍천 성당(1957), 여산 성당(1958), 함열 성당(1959), 강경 성당(1961) 등이 있다.
근대 지향적인 성당 : 1950년대 말 처음으로 근대 지향적인 성당 건축이 한 독일인 신부와 한국인 건축가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들의 작품은 오랫동안 보편화되어 왔던 교회 건축의 양식주의(樣式主義)나 절충주의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합리성과 기능성, 창의성을 추구하였다. 그중 한 사람인 성 베네딕도회 수도 신부인 알빈 슈미트(Alwin Schmid)는 독일에서 설계한 김천 평화동 성당(1958), 점촌 성당(1959)을 통해 한국에 교회 건축의 새 로운 개념을 최초로 소개하였다. 그는 국내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1961년 이래 17년 간 79개의 성당을 비롯한 184개의 작품을 남겼다. 또한 이희태는 명수대 성당(1954), 혜화동 성당(1960) 등을 통해 입방체형의 근대 성당 건축을 시도하였다. 이 건물들은 당시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으며, 교회 건축의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부합한 것이었다.
절충식 성당 : 한국 전통 목조 건축에 서양 교회 건축의 이념을 수용한 초기 한옥 성당과 일제 시대 한 · 양 절충식 성당을 통해 시도한 토착화의 과정은 일제 중반 이후에는 전반적으로 단절되었다. 단지 일부 지역(미국메리놀 외방전교회가 관할한 평양교구)에서만 간신히 이어져 오다가 해방 후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청주 지역을 관할함으로써 다시 시도되었다. 대표적인 건물로 청주 내덕동 성당(1961), 부강 성당(1961), 오송 성당(1961) 등이 있다.
〔현대 교회로의 발전기(1962~ )〕 1960년대 중반은 한국 성당 건축사의 일대 전환점을 이룬 시기이다. 1962년 교계 제도의 설정,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 전례의 쇄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화와 성서 공동 번역 등으로 한국 교회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 건축 기술의 발전, 전문 건축가의 활동, 근대 건축의 수용 및 변용 등 한국 건축계의 변화 때문이었다. 유럽에서는 이미 전례 운동(Liturgical Movement)과 근대 건축 운동의 영향으로 1930년대부터 양식주의에서 탈피한 근대적인 성당 건축이 시도된 바 있고, 그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공식화되고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능동적으로 공의회의 정신을 수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는 문화적 차원에서 공의회의 정신이나 세계 교회의 흐름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으며, 한국 건축계가 당시 근대주의를 적극 수용할 단계에 있지 않았고, 교회 건축의 실천신학적 토대를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1960년대 이후 한국 성당 건축은 많은 변화를 보여 주었고, 근대화의 성과도 뚜렷하였다. 가장 전통을 고수하고 보수적이었던 가톨릭 교회가 어떤 측면에서는 근대 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성과는, 몇몇 한국 건축가의 혁신적인 시도가 있긴 하였지만, 한국 가톨릭 공동체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노력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외국인 수도 신부의 개인적인 활동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1970년대에 오면 성당 건축의 새로운 개념이 확산되면서 한국인에 의해 근대 건축이 정착되었고, 1980년대에는 매너리즘적인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독일인 알빈 슈미트 신부가 설계한 성당으로는 장방형 평면의 원평동 성당(1964) 구포동 성당(1965) 등과 부채꼴 평면의 해운대 성당(1963), 범일동 성당(1964), 왜관 성당(1966), 십자형 평면의 남성동 성당(1963) 및 방사형의 산곡동 성당(1968), , 지례 성당(1968) 등이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인 건축가 오토카 울(Ottokar Uhl)도 제대가 중앙에 위치한 단순한 입방체의 혁신적인 형태로 대구 내당동 성당을 설계하였다.
한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대표적인 근대주의 성당 건축물로는 포물선 형태의 절두산 복자 기념 성당(1967), 삼 각형의 정릉 성당(1973), 부채꼴의 성 라자로 성당(1975), 정팔각형의 대부도 성당(1977), 정육각형의 반포 성당(1979), 부정형 평면의 마산 성당(1978) 등이 있다. 성당 건축에서의 토착화 추구는 전시대의 한 · 양 절충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시도되었는데, 특히 1966년 병인순교 100주년과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여 지어진 일련의 기념 성당에서는 한옥 지붕 형태와 처마 곡선을 콘크리트로 변용하거나 주랑(柱廊), 주초, 토수구, 공포, 종루, 완자창 등의 고(古)건축 의장요소를 현대식 건물에 첨가하여 토착적 분위기를 추구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이후 신학 사조와 사회 변동에 대응한 성당 건축의 현대화는 1980년대에 들어오면 새로운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대도시에서부터 지방으로 점점 확산되며 구체화되고 있는데, 그 원인으로는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교세의 확장과 교회 문화에 대한 의식 증대, 둘째는 포스트 모더니즘(post moder-nism)의 영향을 받은 한국 건축계의 변화, 셋째는 현대 사회의 다원성 등이다.
이러한 현대화에 힘입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성당 건축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형태의 양식주의에서 완전히 탈피하였으며 상징주의, 표현주의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러한 표현주의 경향은 합리주의적인 표현이 아니고 내적 구조와 무관한 외관 형태의 미와 의미론적 표현에 집중되고 있다. 둘째, 대도시 지역에서 교회 건축의 고급화 · 거대화 · 다층화 현상이 일어나고 평면은 다시 장방형으로 돌아가는 경향이다. 셋째, 내부 공간의 분절과 방향성이 약해지는 대신 값비싼 재료와 다양한 수법에 의한 장식과 감각적인 기교가 늘어가고 있다. 즉, 공간보다는 물질적 형태와 그 의미 전달에 집착하고 있다. 넷째,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교회의 다양한 역할과 기능은 교회 건축의 비성역화, 민주화, 인간화, 다용도화라는 긍정적인 현상을 낳았다. 그러나 사회 참여가 너무 중시되어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인간의 존재 의미 및 하느님과의 재결합이라는 종교의 근본 문제가 불분명해지는 부정적인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다섯째, 교회 건축의 이념과 실제, 기능과 구조, 형태가 일치되지 못하고 성(聖)과 속(俗), 외부와 내부가 대립 · 복합되는 이중성은 1980년대 한국 건축계에 점점 확산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신자들의 이중적인 신앙 체계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 성당 건축의 당면 과제〕 한국 가톨릭 교회 건축은 100년의 짧은 역사 속에서도 한국 가톨릭 문화의 표상으로서 시대와 신앙의 내용을 반영하면서 다양하게 변천, 발전하여 왔다. 그러나 아직 타율성과 주변성이라는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다. 교회 창설 200주년을 보내고 세계 성체 대회를 개최한 한국 교회는 교회의 쇄신과 민족 복음화를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 토착화 작업의 필요성이 역설되고 있다. 토착화 작업이 요청되는 교회의 제영역 가운데서 특히 교회 건축은 보다 구체적인 논의가 가능하고 실천적 적용의 시도가 용이한 분야이다. 그러나 전례나 교리 교육, 신심 및 영성 생활, 그리고 신학 사상 등 신앙 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토착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실질적인 연구 결과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 가톨릭 미술 ; ⇦ 한국 성당 건축)
※ 참고문헌  김정신, <한국 가톨릭 성당 건축의 수용과 변천에 관한 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89. 〔金正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