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철학

敎哲學

[라]philosophia christiana · [영 ]christian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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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작품을 구술하고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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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작품을 구술하고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

서양 중세를 지배하던 사상 체계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배경으로 하는 사상. 일반적으로 교부 철학(敎父哲學, 2~8세기 말)에서 스콜라 철학(9~15세기 말) 시기까지를
말한다. 이 그리스도교 철학은 역사적 현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그리스도교 철학' 이라는 명칭을 내세울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는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 철학이 정신사적인 크기로서 엄연히 존재해 왔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겠으나, 각 시대가 처한 정신적 상황 및 다양한 사조와 공존하는 가운데 이들 사상을 선별적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하면서 그리스도교 정신을 보존하고 확장시키기 위해 새로운 옷을 갈아입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철학은 자기 고유의 핵심적인 내용을 간직하면서도 해당되는 시대와 문화의 특징을 띠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 철학은 현대 사조와 대화하는 가운데 계속 새롭게 형성되어야 하고, 유럽 이외의 다른 문화권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그 보편성을 심화하고 확장시켜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 I . 역 사
교부 철학 : 그리스도교 철학 초기에는 수많은 출중한 교부 학자들이 있었는데, 아우구스티노(Augustinus)가 이 시기의 철학을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가들과 중세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계시를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성서나 성전(聖傳) 안에 간직되어 있는 이 계시를 신앙에 의해 하나의 전제로 받아들였다. 또 그들은 신앙의 진리 혹은 교의를 철학으로부터 빌려온 개념들로써 서술하고, 그 교의들이 암시하고 있는 내용을 논리적인 추론과 논변을 통해 전개하려고 하면서 스콜라 신학의 체계를 만들어 놓았다. 물론 신앙의 진리를 해명하는 다른 방법들도 있다. 예를 들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처럼 인간의 경험 대상으로부터, 인간 자신으로부터, 이 세상으로부터 출발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와는 달리 아우구스티노와 초기의 안셀모(Anselmus)는 권위와 신앙에 의거하여 믿었던 것과 그들 자신의 추론에 의해 얻은 결과와의 차이를 알고는 있었지만 신학과 철학을 명확하게 구별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오히려 하나의 전체적인 그리스도교적 예지로 불려질 수 있는 것, 즉 그리스도교의 신앙 그 자체를 이해하고 신앙에 의하여 세계를 이해하려고 함으로써 신학과 철학의 영역 혹은 범위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은 것이다. 신학과 철학을 방법상으로 명확히 구별하게 된 것은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초반에 걸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부터였다. 아우구스티노는 철학은 사변적으로 교의를 해명하는 데 이바지해야 하지만, 신앙도 그 나름대로 이성을 개발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믿기 위해 알고, 알기 위해 믿으라" (intellige ut credas, crede ut intel-ligas)는 말이 생겨났고, 이것은 중세 철학 전체의 지도적인 동기(motive)가 되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 철학은 플라톤주의(Platonism),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를 그리스도교 신앙의 계보에 융화시키려는 노력과 함께 발전한 것이다. 이 초기 그리스도교 철학은 체계적 통일을 이루고 있지 않지만, 철학사적으로 볼 때 스콜라 철학과 신학의 준비 단계로서 중요하다. 이 초기 그리스도교 철학을 완성시킨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 철학, 특히 신 플라톤주의를 유대 ·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적 유산에 종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위대성은 그의 사상이 교부 철학 시대, 중세, 근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영향을 미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의 저작은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하고 후대의 학자가 채굴하게 되는 '이념의 광산'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초기 그리스도교 철학의 주류를 형성한 인물이기에 그의 철학 사상이 초기 그리스도교 철학의 성격을 특징짓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에서는 늘 신론과 인간론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신의 존재에 접근하려는 그의 사유에는 벌써직접적인 신 경험이 전제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노에게는 신에 관한 형식적이
고 논리적인 증명, 예를 들면 인과론적 증명 따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현실의 근본 경험인 세계와 자기경험을 통로로 삼아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신에 관한 경험 가능성을 확신하고자 하였다. 아우구스티노에게 있어서 신은 '존재' 의 이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존재에 관한 진술은 사유의 출발점이 아니라 목표이다. 사유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변하는 세계와 시간적으로 움직이는 자아 경험이다. 존재는 시간 안에서 경험되지만 그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이다. 모든 인간은 원조가 지은 원죄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죄는 하느님의 질서 대신에 인간 자신의 질서를 세우려는 데서 성립한다. 또 죄는 '하느님을 왜곡되게 닮음' (Perversa imitatio Dei)이다. 그리고 원죄는 출산이라는 자연적인 길을 통해 후대에 유전된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죄 없이 창조되었으
나, 죄에 대한 벌로 인하여 죽게 되고, 무지하며, 육체에 얽매이도록 태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아담의 죄의 사건 이후에 인간 본성의 훌륭함이 손상되었으며, 그 후로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고, 올바로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된 것은 아니어서 정신적인 가능성, 즉 보다 높은 존재, 지고한 존재인 하느님께 대한 동경은 남아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 : 스콜라 철학은 신학과 함께 중세의 학교에서 연구되고 교수되었던 학문 체계이다. 스콜라 철학의 성립에는 대체로 세 가지 원천이 기여를 하였다. 먼 저 아우구스티노 철학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둘째로, 신플라톤주의를 들 수 있는데, 이 사상은 아우구스티노, 가(假)디오니시오(Pseudo Dionysius), 프로클로스(Proklos) , 이슬람 · 유대적인 철학을 통하여 영향을 미쳤다. 셋째로, 보에시우스(Botius)의 사상을 들 수 있다. 그의 사상은 주로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의 철학도 교차하고 있다. 보에시우스는 중세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중개한 사상가이다. 그는 오늘날까지 서구 철학에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는 학술 용어를 마련해 놓았다. 그중 중요한 것은 '인격' 개념이다. 그는 인간을 인격(persona)으로 파악하여 "인격은 이성적 본성을 갖는 개별적 실체" 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초석을 마련하였으며 철학 연구의 영역을 넓힌 사상가로서 평가되고 있다.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는 12세기 중엽 이후 점차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했고, 그리스어 주석과 주로 아비천나(Avicenna)와 아베로에스(Averroes)에 의한 아랍어 주석이 나오고 안셀모, 에리우제나(J.S. Eriugena), 보나
벤투라(Bonaventura),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등과 같은 출중한 학자들이 배출되어 스콜라 철학 시기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특히 대(大) 알베르토(Albertus Magnus)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아우구스티노의 사상과 일치시키려 노력하였고, 이것을 그의 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완성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과 철학의 훌륭한 종합을 이룰 수 있는 방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음미하여 수용하였다. 스콜라 철학의 후기에 이르러서는 철학을 신학에서 분리시키려는 시도가 강화되어 철학은 점점 합리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예를 들면 월리엄 오캄과 오캄주의자들은 이전 학자들의 형이상학적 논증들을 비판함으로써 철학과 신학이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후의 그리스도교 철학은 합리주의, 경험주의, 계몽주의, 실증주의 등의 도전을 받아 새롭게 자신의 위치를 정비해야만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바로크 스콜라 철학 : 바로크 스콜라 철학은 16세기 후반에 태동하였다. 먼저 트리엔트 공의회의 신학자들인 카노(Melchior Cano, 1509~1560)와 소토(Dominico Soto, 1495~1560), 라이네즈(Diego Laines, 1512~1565), 살메론(Alfonso Salmeron, 1515~1585) 등에게서 스콜라 철학적 경향이 두드러졌고,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 1491~1556)는 파리 대학에서 스콜라 이론을 배웠다고 한다. 물론 이들이 말한 스콜라 철학은 근세의 그것과는 구별된다. 프란치스코 데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 1490~1546)가 주도한 살라망카(Salamanca) 학파와 베드로 다 폰세카(Pedro daFonseca)가 대표하는 코임브라(Coimbra) 대학도 스콜라 철학을 부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스콜라 철학의 부흥은 1588년에 발표된 교황 식스토(Sixtus) 5세의 대칙서 신 스콜라 철학 : 넓은 의미의 신 스콜라 철학은 적어도 가톨릭의 영역에서는 의식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 둔스 스코투스, 수아레즈(Franz Suaréz)의 사상으로 되돌아가, 철학을 스콜라학적인 방법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19세기와 20세기 가톨릭의 새로운 학술 운동으로서 현재까지도 영향력이 있는 사조이다. 신 스콜라 철학은 계몽주의 철학 시기에 거의 지리멸렬되었던 본래의 고유한 전통을 다시 계승하여 새롭게 발전시켜야만 하였다. 그리스도교 철학은 근대 철학 시기를 관통하면서 늘 새로운 철학 사조를 동반하게 되었다. 신앙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과 관계를 맺지 않고 철학을 순수한 이성적 학문으로 정초하려 한 근대의 철학도 그 근원과 문제의 취급 범위는 그리스도교적 사상에서 유래한다. 특히 근대 철학 사조는 중세 후기의 철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근대 초기의 합리주의적 · 경험주의적인 사상이 전개되는 동안 그리스도교 철학은 특히 수아레즈가 대표하는 스페인의 후기 스콜라 철학에 의해 각인되었다. 이때 그리스도교 철학은 가톨릭 대학과 프로테스탄트 대학에서 강의되던 당시의 강단 철학이었다. 종교 개혁 이후 17세기 중반까지 프로테스탄트 강단 철학이 있었고, 이 철학은 대체로 가톨릭의 후기 스콜라 철학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강단 철학이 쇠퇴한 후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철학' 을 거의 근본적으로 거부하였고, 루터의 견해를 따라 오직 신앙에만 의거하는 순수한 신학을 발전시켜 나가려고 하였다. 이 강단 철학은 18세기 중반 이후에 그리스도교적이면서도 합리주의적인 볼프(Christian Wolff)의 학문 체계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다. 칸트는 이러한 강단 철학을 '교의적인 형이상학' (dogma-tische Metaphysik)이라고 비판하였다. 범신론적인 특징을 지닌 사변적인 독일 관념론의 사상 체계, 특히 헤겔의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절대자의 통합으로 지양시킴으로써 이제까지의 그리스도교 철학의 전통과 단절되게 되었다. 물론 프로테스탄트에도 셀링(Schelinng)처럼 그리스도교적 철학을 전개하는 사상가가 있기는 하였다.
근대는 '이성' 과 '세계' 가 강조된 '계몽' 의 시대였다. 철학에서는 데카르트의 이신론(理神論, deism)이 등장하여 현실 세계는 신의 개입이 없이도 저절로 운영되는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어 '신이 자연' (Deus sive Natura)이라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이 등장하였다. 칸트도 근본적으로는 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로 볼 수 있고 피히테와 헤겔은 범신론자이다. 이와 같은 정신적 분위기에서 그리스도교 철학은 새로운 양상으로 추진되었으며, 서유럽에서는 각 국가와 언어권의 형편과 요구에 따라 상이하게 각인되었다. 독일의 경우, 칸트와 헤겔 사상이 주도하던 독일 관념론 철학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가톨릭 측에는 이에 비견할 만한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업적이 없었다. 그래서 가톨릭 사상가들은 후진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예를 들면 칸트, 헤겔, 셀링 등의 사상적 자극을 받아들여, 그리스도교 사상이 열매 맺도록 노력하였다. 더욱이 무신론은 가톨릭 사상에 충격적인 도전이었다. 무신론의 여러 형태들은 과학과 그 진보의 이름(실증주의와 물질주의)으로 나타났으며, 인간과 그의 자유라는 명분(포이에르바하에서 니체까지)으로, 또 사회와 사회 정의(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를 내걸고 등장하였다. 무신론은 그리스도교 사상을 신랄하게 공격하여 수세에 몰아넣었다.
프랑스에서는 가톨릭적인 정신 생활이 유지되고 있었으나 계몽주의의 영향이 막강하였다. 프랑스 계몽주의는 영국이나 독일에서보다 훨씬 과격하여 물질주의와 무신론으로 발전하였고, 인간의 자율적 이성을 강조하면서 프랑스 혁명을 준비하였다. 이와 같은 사태는 당시 프랑스 가톨릭 전통의 분위기에서는 놀랄 만한 충격이었고, 이 후유증은 오늘날까지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기할 것은 전통주의 노선에서 프랑스 혁명을 반대하면서 교회의 자유를 외치다가 당시 교회 당국으로부터 단죄된 라므네(Lamennaisis, 1782~1854)의 활약이다. 그의 저서는 유럽의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에서는 19세기에 경험론이 득세했으나 이에 반대하는 영국의 관념론도 있었다.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가톨릭 사상가는 뉴먼(J.H. Newman)으로서 그는 신앙과 양심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뉴먼과 동시대인이며 개종자인 미국의 브라운슨(O.A. Brownson)은 유럽의 모든 철학 사조와 논쟁하는 가운데 순수한 그리스도교 철학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19세기에 영국과 프랑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주관주의적 감각주의적인 사상과 독일 관념론의 영향을 받은 신비주의적 관념론적인 사상이 번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철학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치적, 종교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들, 예를 들면 로스미니(Antonio Rosmini-Servati, 1797~1855)와 지오 베르티(Vincenzo Gioberti, 1801~1852) 같은 위대한 가톨릭 사상가들이 출현하였다. 비록 교회 당국으로부터 단죄를 받았으나 이들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스콜라 철학(엄밀한 의미로는 토마스주의)의 전통이 강하여 나중에는 이 사조가 크게 득세하였다. 순수한 토미즘을 고수하려 한 부제티(V. Buzzetti, 1777~1824)와 그의 제자 소르디(D. Sordi, 1790~1865)는 이탈리아 신 스콜라 철학의 기수이다. 이 밖에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이탈리아와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코르테스(Donoso Cortés, 1809~1853)와 발메스(Jaime Balmes, 1810~1848) 등의 가톨릭 사상가들이 스콜라 철학적인 전통에 의거하여 새로운 사조와 대결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철학에 의한 정신적 이정표를 마련하려고 하였다.
또한 신 스콜라 철학 운동은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Aeterni Patris>(1879. 8. 4)에 의해 강력한 추진력을 얻게되었다. 이 회칙은 철학의 원천, 방법, 과제, 그리고 철 학과 계시와의 관계 등을 취급하고 있다. 이 회칙에서는 가톨릭계 학교, 특히 신학교에서 성 토마스의 학설을 연구하고, 이를 교육의 규범으로 삼도록 적극 추천한다. 스콜라 철학과 성 토마스의 철학은 그 뒤에도 비오 11세의 회칙 〈Studiorum ducem>(1923. 6. 29), 사도적 헌장인 〈Deusscientiarum Dominus>(1931. 5. 24), 비오 12세의 회칙(1950. 8. 1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16항) 등에서 계속 추천, 장려되었다. <사목 헌장>(Gaudium et spes)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자율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중세 스콜라 철학의 역사적 연구는, 독일에서 데니플레(H. Denifle)와 그라프만(M. Grabmann), 베움커(CI.Baeumker), 에를레(Fr. Ehrle) 등에 의해, 프랑스에서는 망 돈네(P. Mandonnet), 질송(E. Gilson) 등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연구는 강단의 영역을 넘어서 수도원에서도 시행되었다. 예를 들면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프란치스코 학파 특히 보나벤투라와 스코투스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스콜라 철학의 연구는 고전적인 명제들을 아무런 비판적 반성 없이 되풀이하거나 전면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스콜라 철학이 '영원한 철학' (philosophia perennis)이 되려면, 그 고유하고 위대한 근본 사상을 현대의 사조와 연관시키면서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스콜라 철학을 더 정확하게 앎으로써 철학적 · 신학적인 문제를 보다 풍부하고 생명력 있게 이해하게 되어 근대 철학과 현대 철학뿐 아니라 기타 학문의 문제 제기에 그리스도교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가톨릭 학계가 근대 철학에 더욱 이해성 있는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벨기에의 예수회 신부인 루슬로(P. Rousselot, 1878~1915)와 마레샬(Joseph Maréchal, 1878~1944)은 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독일 관념론, 특히 칸트 철학과 비판적인 대화를 하면서 스콜라 철학적인 형이상학을 선험 철학적 기초로부터 새롭게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스콜라 철학의 본질적이며 타당한 내용을 근대 철학의 문제 제기에 대한 대답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고, 다른 철학 사조와의 성과 있는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계기는 마레샬의 정신을 계승하는 독일의 가톨릭 사상가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예를 들면 철학 분야에서는 로츠(J.B. Lotz), 지베르트(G. Siewerth), 벨테(B. Welte), 러(M. Müller), 브룩거(W. Brugger), 코레트(E. Coreth) 등과 신학 분야에서는 라너(K. Rahner) 등이 그 주요 인물이다.
그 밖에 현대 가톨릭 사상가로는 마리탱(J. Maritain), 세르틸랑즈(A.D. Sertilanges), 마르셀(G. Marcel), 무니에(E.Mounier), 블롱델(M. Blondel), 라벨(L. Lavelle), 네동셀(M.Nédoncelle), 기통(J.Guiton), , 베이유(S.Weil), 르 센느(R.Le Senne), 리괴르(P.Ricoeur), 트레스몽탕(C. Tresmontant), 파브로(C. Fabro), 부스트(P. Wust), 에브너(F. Ebner), 과르디니(R. Guardini), 홈메스(J. Hommes), 뎀프(A. Dempf), 크링스(H. Krings), 슈타인(E. Stein), 바르트(H. Barth) , 만저(G.Manser), 슈패만(R. Spaemann), 보헨스키(J.M. Bohenski) . 시몽(Y. Simon) 등 수많은 학자를 들 수 있다.
: II . 가능성 문제
현대의 가톨릭 사상가들은 로체(Lotze)로부터 셀러(M.Scheler)에 이르는 가치 철학, 훗설(E. Husserl)의 현상학, 하르트만(N. Hartmann)의 존재론과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로부터 야스퍼스(K. Jaspers)에 이르는 실존 사상, 특히 하이데거 사상과 비판적 대화를 나누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늦게서야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의 사상을 비롯한 변증법적 유물론과 신 마르크스주의와의 비판적 대화가 시작되었고, 그리스도교 철학의 영역에서도 언어 철학, 역사 철학, 해석학, 분석 철학, 과학 이론과의 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교 철학 안에도 여러 가지 다른 특징을 지닌 새로운 사상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현대 철학의 새로운 방법론들을 선별적으로 수용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신 스콜라 철학의 부흥은 주로 서유럽의 문화적 풍토에 뿌리를 두고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동유럽, 예를 들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북남미에서도 계속되었다. 북남미의 스콜라 철학은 앵글로 색슨계의 철학과 스페인, 포르투갈 철학과의 연계에서 발전되었다. 오늘날에는 대표적이고 주도적인 철학파를 들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형이상학을 포기한 채 근대 철학이 어떻게 쇠퇴하고 종말을 고하는가를 드러내 보여 주는데 특히 '현대 이후' (postmodern)로서 통용되는 모든 것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완전한 허무주의는 아닐지라도 다원주의의 난맥상을 야기시켰다. 그리스도교 철학의 가능성 여부를 둘러싸고 그리스도교 신자인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로 논란이 있다. 더군다나 하이데거(M. Heidegger)는 그리스도교 철학을 나무로 된 쇠' (einholzermesEnsen)라고 꼬집어 말한 바 있고, 야스퍼스는 신자가 동시에 철학자일 수 없다고 말하면서 종교적 신앙과 철학의 불일치를 주장한 바 있다.
그리스도교 철학' 을 둘러싼 큰 논쟁은 금세기의 20년, 30년대에 불붙기 시작하였다. 이 논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1960년대에 와서는 거의 중단된 상태이다. 이 논쟁은 먼저 질송(E. Gilson)과 함께 시작되었다. 논쟁의 기폭제가 된 것은 그의 저서 《Le Thomisme》 (1919)과 《La Philosophie de Saint Bonaventure》 (1924)의 간행이었다. 중세 철학사 연구의 대가인 질송은 이들 저서에서 그리스도교 철학에 관한 이해에 기초를 마련하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교 철학은 우선 역사적 사실이다. 서양 철학에서 오랫동안 요구되어 온 일련의 개념과 관념은 명백히 그리스도교적인 계시에서 유래하지 어떤 철학적인 기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질송은 '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와 서구의 자유 이론을 지적하여 언급하였다. 이 두 문제는 신자들뿐 아니라 신자가 아닌 사상가들도 철학적 주제로서 다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송에 의하면, 계시의 내용은 철학의 통합적 구성 요소가 될 수 있다. 그에 있어 계시는 철학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방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거에서 그는 그리스도교 철학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도미니코회 신부인 망돈네와 슈뉘(M.D. Chenu)는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그리스도교 철학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별 쓸모가 없다. 예를 들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은 그리스도교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아우구스티노와 프란치스코 학파의 전통을 따르는 학자들을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특히 질송이 철학자라고 부르는 성 보나벤투라는 결코 철학자이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의 사유 방식이 철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슈뉘는 질송이 주장한 그리스도교 철학이라는 개념이 그리스도교적 사상 내용을 분명히 통합하는 사유 체계만을 허용할 염려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곧 그리스도교의 복음 내용에 원리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수많은 다른 사상 체계들이 배척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학문적 태도는 실제로 근대 철학 모두를 반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단죄할 수 있는 편협한 관점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질송은 중세 철학의 '이성' 이 그리스도교 사상에만 예속된 것이 아니었음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성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발전되었을 지라도 계몽주의 철학의 인식과 만날 수 있다고 응수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는 다른 가톨릭 사상가들, 예를 들면 졸리베(R. Jolivet, 1891~1966), 라그랑즈(R. Garrigou Lagrange, O.P., 1877~1964), 마리탱 등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블롱델과 드 뤼박(Henri de Lubac)도 조심스럽게 질송의 견해를 따랐다. 그러나 루뱅(Louvain) 학파는 '그리스도교 철학' 혹은 '가톨릭 철학' 이라는 명칭에는 반대하였다. 불프(Maurice de Wulf, 1867~1947)를 비롯하여 노엘(Léon Noël, 1878~1953), 스테엔베르겐(Fernand Van Steenberghen, 1904~?) 등이 이 학파에 속한다. 이들은 철학과 신학은 엄격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철학과 신학의 실제적, 역사적 관련성을 극구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그리스도교 철학의 가능성과 원리적인 권리가 추론될 수 있다는 주장에는 반대하였다.
하이데거와 함께 야스퍼스는 그리스도교 철학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면서도 실존의 실현으로서 파악되는 철학에는 신앙이 속한다고 말한 점이 특이하다. 이러한 전제 아래 신앙과 이성은 실존의 차원에서 일치할 수 있고 또 일치되어야 한다. 곧 실존 차원에서는 그리스도교 철학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신앙과 이성이 일치하는 것을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에서 발견한다. 이와 반대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은 그 학문 이론적 기준에서 볼 때 모호하다고 평한다. 그리스도교 철학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견해와는 달리 라너, 메츠(J.B. Metz), 마르셀, 부스트, 후기의 블롱델은 그리스도교 철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즉 라너와 메츠에 의하면, 인간의 사유는 초월론적(超越論的, transzendental)으로 볼 때 이미 계시하는 신과 관계를 맺음으로 '그리스도교적' 이라는 표현에는 철학에 늘 내재하는 어떤 개념 규정의 설명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철학은 근원적인 자율의 가능성을 철저하고 명백하게 요구하는 사유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교적 실존주의의 대표격인 마르셀은 그리스도교 철학이 철학의 문제 제기와 이것을 넘어서는 영역과 관계한다고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교 철학은 구체적인 인간 안에서의 신의 육화(incarnation)라는 역설(paradox)에 관하여 사색을 지속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그는 그리스도교 철학을 신학과 구별하면서 절대적인 신비의 그늘에 살 준비가 되어 있는 사유의 총체라고 이해한다. 또 부스트와 블롱델은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에 정향되어 있다. 그들은 계속적인 사유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 한계를 경험하고 마침내는 복음에 개방하는 사유를 '그리스도교적' 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신앙과 이성을 구분하기보다는 양자의 일치를 더 강조한다.
오늘날에는 그리스도교 철학이라는 말을 특별히 강조해서 사용하지는 않지만 '불교 철학' , '유교 철학'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볼 때, 그 명칭 자체에 대해 요란스럽게 논쟁을 벌일 필요는 없다. 종교적인 배경을 가진 사상들은 어쩔 수 없이 해당 종교의 세계관과 연결될 수 밖에 없고, 각 종교의 진리와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형이상학적 명제의 인식론적 타당성을 의문시하는 사조가 등장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철학의 가능성에 관한 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빈 학파'(Der Wiener Kreis)에서 급성장한 신실증주의, 분석 철학, 과학 이론, 언어 철학 등은 형이상학적 명제가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철학의 과제는 개별 과학이 수행한 것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일뿐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철학적 진술의 타당성은 자연 과학과 수학의 방법론적 이상을 잣대로 하여 측정된다. 그래서 학문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중요한 영역인 인간의 실존적 현실 영역이 배제되어 버린다. 따라서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상호 관계가 없게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 철학이 학계의 논의 대상에서 밀려나게 된 데는 교회 내적인 원인도 있다. 현대 신학이 성서학 중심으로 연구 발전됨에 따라 신학에서 철학의 필요성이 과거에 비해 훨씬 감소되었다. 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신학 교육의 비중이 철학 원리에 의거하는 교의 신학, 윤리 신학 등에 놓여 있던 반면, 그 이후에는 성서 해석에 의거하는 원리로 강조점이 옮겨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교 철학에 필수적인 신학과 철학 사이의 대화가 부족한 점에도 문제가 있다. 쇠퇴의 또 다른 원인은 이제까지 그리스도교 철학이 교회 당국의 지원을 받아 온 신 스콜라 철학과 동일시되었던 데 있다. 더욱이 가톨릭 신학 대학에서 신 스콜라 철학을 다른 사조로 대체하지 않거나 철학 교육 내용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해서 이와 같은 오해의 소지는 더 크게 되었다. 물론 최근에는 다양한 철학 사조가 소개되는 가운데 이와 같은 오해가 점차 없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교 철학에 관한 논의는 앞 으로도 계속될지 모르나, 그리스도교 신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리스도교 철학은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철학은 세계 각 문화권 안에서의 토착화 문제와도 관련된다. 이제까지 그리스도교 철학은 서구 문화의 토양 위에서 발전되어 왔다. 앞으로는 아시아, 아프 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의 문화권에서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 특성을 지닌 그리스도교 철학이 생성되고 발전할 필요가 있다.
: Ⅲ . 의미와 과제
뵈너(P. Böhner)와 질송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적'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철학과 철학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구성 요건과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교 철학은 사유와 철학함을 신의 소명으로 의식하는 그리스도교 신자, 신앙을 통한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교 신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둘째, 철학적 지식과 신앙의 질서는 구별된다. 그리스도교 철학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과 구별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학은 특히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 간접으로 계시된 명제들과 계시된 진리에서 끌어낼 수 있는 명제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스도교 철학은 원리와 방법에 있어서 철학적이어야 한다. 논리적인 증명은 이성이 접근할 수 있는 명제와 상태로써 구성되므로 애초에 신앙의 명제에서 출발하는 것은 철학이 될 수 없다. 넷째, 명제들은 이성적인 논거로써 증명되지만, 그리스도교 계시가 이성에 도움을 줄 수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다섯째, 신앙이 그리스도교 철학자의 인식 상태를 규정한다. 고대와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철학은 종교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들은 철학에서 지성적 욕구의 만족을 추구한다. 특히 최종적인 삶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구하는 경우에 그렇다. 그리스도교 철학자는 철학으로부터 그러한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의 세계관은 신앙에 의거하는 것이고 신앙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시계(視界)를 그에게 중개한다. 여섯째, 신앙은 철학함의 의미를 규정한다. 그리스도교 철학자에게 철학은 종교적 과제이기도 하다. 그의 철학함의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처럼 진리를 위한 진리를 추구하여 그것을 향유함으로써 최고의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또 지식의 획득을 통하여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확보하려는 베이컨(F. Bacon)의 이상도 아니고, 끊임없는 연구와 추구를 뜻하는 괴테(Goethe)의 이상도 아니다. 그리스도교 철학자는 궁극적으로 신 자체인 영원한 진리 때문에 진리를 추구한다. 그리하여 철학적 사색의 노고는 결국 종교적 진리 추구의 과제를 짊어진다.
그리스도교는 시초부터 신앙을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초이성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성은 신앙 안에서 근본적인 관심의 실현을 발견할 수 있고 최종 목적을 향하도록 인도된다. 신앙과 이성은 협력 관계에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철학의 미래는 인간 인식의 합리적 가능성과 그 본질을 둘러싼 현대적 논의에 얼마나 믿음직하게 동참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교 철학은 형이상학적 차원을 중시하고, 인간과 세계가 신과 맺고 있는 초월적 관계를 이성적인 사유를 통하여 설득력 있게 근거 지우고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 철학에서도 사상의 자유와 개방된 태도가 보장되어야 한다. 특히 집단주의적 경향의 사조나 전체주의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과 고유한 가치를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그의 무조건적이고 훼손될 수 없는 인격적 자립성과 가치를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철학은 앞으로도 이와 같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고뇌에 찬 사유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 스콜라 철학)

※ 참고문헌  W. Brugger ed., Philosophisches Wörterbuch, Freiburg- Basel-Wien, 1967/ W. Brugger, Kleine Schriften zu Philosophie und Theologie, Miinchen, 1984/ P. Böhner · E. Gilson, Christliche Philosophie von ihren Anfangen bis Nikolaus von Kues, Paderborn, 1954/ E. Coreth . Walter M. Neidl · G. Pfligersdorffer eds., Christliche Philosophie im katholischen Denken des 19. und 20. Jahrhumderts, Bd. 1~3, Graz-Wien- Koln, 1987, 1988, 1990/ H. Fries ed., Handbuch theologischer Grund- begriffe, Bd. 3, Miinchen, 1962/ J. Pieper, Verteidigungsrede, für die Philosophie, Miinchen, 1966/ 《가톨릭 사전》. 〔朴鍾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