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본받음

[라]imitatio Christi · [영imitation of Chi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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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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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


그리스도를 따름' , 혹은 '그리스도를 본받음' 이란 말 은 신약성서 시대부터 그리스도교의 전체 역사 안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어 왔다. 자신을 따르라는 예수의 요구(마태 8, 22 : 9, 9 ; 10, 38 : 16, 24 19, 21 : 마르 8, 34 : 루가 14, 25-35)는 단지 법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예 수의 모범을 따르라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예수의 삶 을 그대로 모방하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예수 당시의 스승과 제자 관계처럼 예수와 제자들 간의 관계 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는 오히려, 예수 안에 현존하 는 하느님의 나라에 자신의 전 삶과 인격을 온전히 내어 놓는 신앙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 신앙의 태도는 자신을 철저히 거부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라 는 초대에 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초대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요한 15, 1-17)에서 볼 수 있 듯이, 그리스도의 삶을 함께 나눔으로써, 죄로 일그러진 인간이 그리스도의 모상으로 변화되기를 요구하는 것이 다. 〔성서의 의미〕 구약성서에서 '야훼를 따르다' 라는 표 현은 우선 야훼께 충실함을 의미한다. 이 표현은 그릇된 신들을 '따르고' (판관 2, 12 ; 신명 4, 3 ; 2열왕 21, 26 : 예 레 11, 10), 혹은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저버리고 그릇된 우상을 숭배하는 '창녀 짓' (호세 2, 7. 15)에 상반되는 태 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종교적으로 '야훼를 따른 다' 는 의미가 사막을 지나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이 현존하는 계약의 궤를 뒤따라간다는 의미로 사용된 적은 없다. 그 이유는 아마 이교 민족의 종교 예식에서 신상 (神像)을 앞세우고 행진하는 '따르다'를 배척하는 신학적 입장일 것이다. 신명기 학파에게 '야훼를 따른다 는 것은 바로 "야훼께서 분부하신 길을 따라간다" (신명 5, 32-33 ; 19, 9)는 것을 의미 하고, 그분의 명령에 복종함(신명 13, 5 ; 2열왕 23, 3)을 의미하였다. 의인들을 본받아 하느님을 따른다는 것은 비교적 후대에 발전된 라삐 신학이다. 누구를 따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의미한다. 곧 부인이 남편에게(예레 2, 2), 종이 상전에게(1열왕 19, 20-21), 그리고 제자가 스승에게 보 여 주는 존경하는 태도를 의미했다. 신약성서에서 군중이 예수를 따르는 모습(마르 3, 7 ; 마태 8, 10)이 묘사되기 도 하지만, '따르다' 라는 동사는 제자들이 예수의 부르심에 따라 그분과 삶을 함께한 공생 관계(마태 8, 19)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러한 친밀한 관계 안에서 제자는 예수께서 가시는 곳은 어디나 따라가며, 더욱이 오직 예수께 대한 애착 때문에 모든 것을 떨쳐 버린다(마르 10, 28). 이 '따른다' 는 말은 단지 '본받는다' 는 의미만은 아니다. 이것은 '함께 나눔' 도 의미하기에, 스승이 지닌 모든 것을 나누어 받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난(마태 8, 19-20), 자기 거부, 박해, 십자가(마르 8, 34 ; 10, 2830 : 요한 12, 25-26 참조) 등 모두를 나누어 받음을 의미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나눔으로써, 구원과 하느님의 나라를 나누어 받고(루가 9, 61-62), 영원한 생명을 나누 게 된다(마르 10, 17-31 ; 요한 8, 12). 그를 따르고자 하 는 이들은 부모와 형제 자매를 떠나야 하고, 자신의 십자 가를 짊어져야만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한다 (루가 14, 26-27). 부자 청년에게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에 당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한다(마르 10, 21). 예수의 제자가 된다 함은 바로 모 든 것을 버림을 의미한다(루가 5, 11 : 9, 58 : 14, 26 ; 마 르 2, 14). 이러한 점은 유대교 전통 안에서 어느 스승의 제자가 되는 모습과 같다. 예수에게서 고유한 모습은 바 로 당신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파견하는 데 있다(마태 10 장).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따라오겠다는 이에게 "죽은 자 들이 자기네 죽은 자들의 장사를 지내도록 내버려두시 오. 당신은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시오"(루가 9, 59 60) 하고 말씀한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바로 그 분의 운명에 동참함을 의미하고, 스승의 고통에 동참함 으로써(마르 8, 34-35), 그분의 영광에도 동참하는 것(루 가 22, 28-30)을 의미한다. 제자가 되도록 부름받음은 바 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소명인 것이다(요한 13, 15). 자신을 따르라는 예수의 말이 어떤 의미에서 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예수에 대한 신앙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역사적 상황 안에서 의 아주 구체적인 태도를 의미했다. 마르코 복음을 보면 우리는 적어도 제자직에 대한 예수의 이해가 두 단계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 단계에서, 제자직은 당신이 직접 뽑으신 사도들을 중심으로 되어 있다. 그들은 바로 예수에 의해 선택되고 불린 사람들이다(마르 1, 16-20 ; 3, 14-19). 이 부르심의 목적은 그 시점에서 예수가 계획 한 사업을 수행해 나가는 데 있다. 즉, 그들은 하느님 나 라의 복음과 회개를 선포하고,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마 귀를 쫓아내며, 더러운 악령을 제어하도록 파견되었다.파견되는 제자들은 예수와 똑같은 태도를 지녀야 한다. 여행을 위해 음식도, 가방도, 혹은 돈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해는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라는 초대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를 따 르기 위해 어떤 선결적인, 그리스도론적인 신앙이 요구 되는 것은 아니고, 또 제자직에 대한 구원적인 의미를 충 분히 이해하도록 요구되지도 않았으며, 단지 자유롭게 예수께서 사람들을 부르는 점에 있다. 예수의 공생활 두 번째 단계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신원과 사명에 대한 이해가 바뀜에 따라 제자직에 대한 이해도 바뀌게 되었 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예수를 따름은 아주 구체 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더 이상 명확하게 드러나 지 않는 어려운 상황 하에서도 당신의 길을 따름을 의미 한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 함은 더 이상 구원자를 따라가 면서 구원자의 역할을 수행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 은 오히려 자신의 전 삶을 바쳐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감을 의미한다. 특별히 요한 복음과 바오로 서간에서 그리스도를 따른 다는 의미가 그분을 본받는다는 의미로 발전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 준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행한 대 로 여러분도 그렇게 행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3, 34 : 15, 12 : 로마 15, 7 : 에페 5, 2. 25). 그분의 생각을 품어서(필립 2, 5),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들"이 되어 야 한다(1고린 11, 1 : 1데살 1, 6). 이러한 윤리적인 의미 에서의 본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인(2고린 4, 4 ; 골로 1, 15) "당신의 모습" 으로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2고린 3, 18 : 로마 8, 29)과 연관된다. 사랑에 뿌리를 내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본받는다는 것을 의미하 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은 사 랑스러운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들이 되시오"(에페 5, 1). 〔교부 시대 때의 의미〕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에서는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 가장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그리스도인은 또 다른 그리스도' (Christianus alter Christus)라는 테르툴리아노의 말은 교부들의 문헌에 끊 임없이 반영된다. 치프리아노는 그리스도를 따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매달려,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교회 일치 1, 2항).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이러한 이상은 바로 순교자의 삶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진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주님의 수난을 본받게 내버려 두십시오" 하고 당부한다. 이러한 정신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금욕 생활에 바친 은수자들 안에서도 발견된다. 은수자들의 시조로 불리는 사막의 성인 안토니오는 "그리스도가 바로 당신 생명의 숨결이 되게 하시오" 하고 말한다.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를 본 받으려는 이러한 열정들은 4세기에 걸친 그리스도론 논 쟁을 통해 보다 더 신학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교부 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성덕의 표본으로 중요시하지만, 하느님의 모상에 의해 창조된 인간의 모상을 강생의 신 비 안에서도 강조한다. 그리스 교부들의 저서 안에서 이 러한 특성이 특별히 강조되기도 하지만, 동방 교회에서 는 인간을 다시 살림으로써 자신의 신성을 인간과 나누 는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가 강조되었고, 서방 교회에서 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본받으려는 측면이 더 강조되었 다. "우리가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의 마음을 본받지 않고 그의 인성을 본받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암브로시오, 강론 29) 이러한 그리스도론적인 문제의 두 측면, 즉 강생한 말씀(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공경심과 예수 그리스 도의 거룩한 인성을 본받음은 성 아우구스티노에게서 통 합된다. "당신의 신성으로 그분은 우리의 영혼 안에 거 하시고, 당신의 인성으로 그분은 우리 눈앞에 당신의 삶 을 본보기로 보여 주시면서 우리의 마음이 당신을 향해 끌리게 하신다"(강론 264). 이러한 전통을 11세기에 베 드로 다미아니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참으 로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위해 산다는 것보다 더 고상하지는 않은 것입니다"(강론 32)라고 표현했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에 의해서 서방의 그리스도론 은 그리스도의 인간으로서의 생애, 신비, 사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성 베르나르도의 감성적 신학 풍조는 후대 의 영성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시토회의 신비가 들은 거룩한 인성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 준다. 그들의 기도는 성서와 전례 안의 그리스도를 깊이 관상함으로써 그분과의 일치를 경험하게 하고, 바로 그것을 통해 그리 스도의 삶을 본받도록 한다. 이러한 영성 전통은 예수의 인간적 삶과 고통의 신비를 향한, 마음으로부터의 감동 을 강조하는 프란치스코회의 영성 전통에서 절정을 이룬 다.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五傷)의 신비는 성 보나벤투 라 신비 신학의 기조를 이루고, 또한 둔스 스코투스의 사랑이 지식을 앞선다고 보는 가르침의 기반이 되었다. 교부들의 전통을 보다 직접적으로 이어받은 도미니코 회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신학적으로 더욱 심 화시켰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관상은 지성 안에 자리하는 지혜이며, 의지 안에 자리하는 애덕이며, 마음 안에 있는 평화이다. 신심이란 하느님을 향유하거 나 마음 안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성 토마스는 강생의 신비를 신적 섭리의 가장 근원적인 원리로 간주했으며, 그리스도의 모든 행위는 곧 인간을 하느님께 인도하기 위한 행위임 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신심의 우선적인 대상 은 항상 말씀의 위격이다. 도미니코회 전통의 위대한 신 비가인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토마스 신학의 전통 안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 정과 교회에 대한 열정 안에서 보다 직관적이고 실제적 인 가르침을 전해 준다. 타울러와 헨리 수사 등의 독일계 신비가들은 십자가에까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감 성의 움직임을 중요시한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기꺼이 함께 나누면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일치의 몫을 나누게 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결국, 그리스도교의 전통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론의 정점은 가난하고, 모욕을 당하고, 멸시를 당한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에 집중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모범으로서 아버지 하느님께 이르는 완전한 길이다. 예수가 겪은 수고와 고통은 영원한 행복인 예수 그리스도와 동참하면서 그분을 본받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따르는 수고와 고통을 예시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전인적인 응답이어야 하며,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 무조건 순종함을 의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겠다는 순수한 마음의 결정을 의미한다. 〔현대적 의미〕 그리스도인의 길이 온전히 종교심의 길이라면,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기를 마음으로 결정함으로써 시 작되고, 바로 이 결정에 바탕을 두고 성장한다. 예수도 제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따르라고 명했다. 초기 신도들 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써 그리스도인이라 불렸고 (사도 11, 26),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듯이 신도들도 자기를 닮으라고 권고한다(1고린 11, 1 ; 4, 16 ; 필립 3, 17). 예수를 따르고 그분을 닮는다는 것은 단순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과는 다르다. 예수 그 리스도는 유일한 스승이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준 스승 이며 제자들과 운명의 공동체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영 원한 삶을 약속해 준다. 이 약속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을 본받고 따르면서 인간의 역사 안에서 그분의 삶에 동참하도록 격려한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의미는 바로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이기에, 제자 됨은 바로 한 인간의 전폭적인 응답의 태도이고 삶 전체의 모든 측면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 하 느님의 뜻을 행함(루가 9, 49. 57-62 ; 마태 8, 19-22 ; 마르 9, 38 ; 10, 21)이 제자직의 근본 핵심을 이루고 이 요구 는 모든 제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된다(루가 14, 33). 하느님은 역사 안에 모든 선의 원천이며, 동시에 모든 역사의 궁극적 목적이다. 하느님의 구원이 지향하는 궁 극적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찾는 그리스도 인들은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 는 그분과의 참된 만남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 는 구원의 체험이라고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고유한 선결 요건은 그분 안에서 자신, 역사, 자 연, 우주의 궁극적 의미가 결정적으로 계시되었다고 믿 는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하느님의 자기 계 시의 결정적 사건이며, 따라서 구원 역사의 정점이다. 그 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 니까?(마르 8, 29) 하는 예수의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어느 누구라도 이 질문에 전적으로 객관적인 대답을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자렛 예수의 삶 안에 드러난 하 느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계시는 오직 개개인의 신앙 안 에서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 는 신원은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일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를 묻기도 하기에 바로 '교회란 무엇인가' 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즉, 책임 있고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원이 무엇인가 는 전체 그리스도교라는 지평에서 밝혀져야 하기에 그리 스도인의 제자직 양성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면서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그리스도가 걸은 길 을 함께 걷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 함은 하느님과 인간을 향해서 어떤 특정한 태도를 지니 게 됨을 의미한다. 이 태도의 뿌리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서 경험하는 하느님 사랑의 원초적인 경험이다. 여기에 뿌리를 내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원이 가지는 중요한 특성 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결심에 있다. 그 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 함은 바로 예수의 길에서 배 움을 의미하며, 이 예수의 길은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 과의 연대 안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상 생애 안에 드러난 예수의 길을 따르도록 불렸다. 이는 바로 세 상의 악에 대항해 싸우라는 하느님의 초대이다. 그리스 도인들이 추구하는 완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름에 있다.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세상을 창조 하고 역사를 주관하는 하느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삶 안에서 자유 를 누리는 참다운 삶의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인격의 원천과 비밀, 그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 의 신비 하느님께 드리는 온전한 순명 안에서 누리는 자 유로운 삶의 태도는 모두 그분의 역사적 삶 안에서 드러 난다. 예수의 삶은 바로 예수 자신이 지닌 하느님 아버지 에 대한 내적 태도의 표현이므로, 예수의 신앙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은 바로 당신 신앙의 원천이 하느님 아버지 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임을 보여 준다. 아버지께 대한 온 전한 순명의 결정적인 증거는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인 예수의 태도 안에 있다.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 기는 예수 안에서 자신을 내어 주는 하느님의 사랑이 완 전히 실현된다. 이렇게 하느님 안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것은 하느님의 우주적 구원 의지의 절정이며, 구체 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역사 안에서 드러난 예수 그리 스도 사건 안에서 이 구원 의지가 이루어졌다. 바로 십자 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명 안에서 그분의 아들로서의 의미가 온전히 밝혀진다. 이런 의미 에서, 그리스도를 따른다 함은 단지 그분을 본받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삶과 사명에 완 전히 참여함을 뜻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제자직 은 바로 사명과 사목적 삶을 의미한다. ※ 참고문헌  Leonard Boff, O.F.M., Jesus Christ Liberator A Christologyfor Our Time, London, SPCK, 1978/ Edouard Cothenet et. el., Imitating Christ, St. Meinrad, Indiana : Abbey Press, 1974/ Alois Grillmeier, Jesus Christ Ⅲ , Christology, 《SM》3, 1969, pp. 186~192/ Jon Sobrino, S.J. Christology at the Crossroads, London, SCM Press, 1978/ 존 윙가드, 성 찬성 역, 《예수 체험》, 성 요셉출판사, 1985. [沈鍾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