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양자설

養子說

[라]adoptianismus · [영]adoptio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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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가 신성(神性)으로는 하느님의 친자(親 子)이지만 인성(人性)으로는 하느님의 양자(養子)라고 주장한 그리스도론적 이단. 이와 같은 이단은 3세기 중 엽 사모사타의 바오로(Paulus Samosatenus)가 주장한 모나 르키아니즘(Monarchianismus, 3位가 아닌 1位만 인정하는 반 삼위 일체적 이단)으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지만 '양 자설' 이라는 이름으로 주장된 것은 8세기 스페인에서이 다. 톨레도의 대주교 엘리판두스(Elipandus, 717~808)는 천주 삼위가 모두 강생하였다는 미제우스의 허무 맹랑한 주장을 반박하는 가운데, 양자설이란 그릇된 주장을 하 게 되었다. 785년경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친자와 양자 를 구별하고, 이에 따라 그리스도가 이중적으로 하느님 의 아들이 됨을 주장하였으나, 곧 스페인에서 반대자가 나왔다. 수도자 베아투스와 에테리우스는 서면으로 항의 하고, 교황 하드리아노 1세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렸다. 이에 교황은 스페인 주교단에게 서한을 보내고(785~791) 성서와 교부들의 정통 가르침에 근거하여 엘리판두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단죄케 하였다. 그러자 스페인의 동북 부 국경 지대 우르겔의 주교인 펠릭스가 엘리판두스를 지지하고 나섰고, 이후 그는 양자설 논쟁에서 가장 영향 력 있는 변호자가 되었다. 우르겔은 프랑크 왕국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카알 대제는 792년 레겐스부르크의 교회 회의에 펠릭스를 출 두시켜 그의 주장을 철회케 하였다. 이어 펠릭스는 로마 로 보내져 거기서도 그의 주장을 취소하게 하였다. 한편 스페인 주교들은 엘리판두스를 옹호하는 서한을 카알 대 제와 프랑스 주교들에게 보냈다. 카알 대제는 교황과 상 의하고 794년 교회 회의를 프랑크푸르트에 소집하였다. 여기서 하드리아노 교황의 교리 서한이 낭독된 후 새로 작성된 두 문헌(하나는 Alcuin 의 저술)에 의거하여 양자설 이 또다시 단죄되었다. 그런데 그 동안 자기의 주교좌로 돌아온 펠릭스는 저술을 통해 양자설을 계속 전파하였 다. 이에 하드리아노의 후계자인 레오 3세 교황은 로마 의 교회 회의에서 펠릭스를 단죄하였고(798) 카알 대제 는 펠릭스를 아헨의 교회 회의에 강제로 출두시켜 그의 주장을 다시 철회하게 하였다(799). 엘리판두스는 죽을 때까지 그의 주장을 고수하였고, 펠릭스 역시 다시 양자 설로 돌아갔음이 사망(+816) 후 그의 저서에서 드러났 다. 이에 리용의 아고바르드가 다시 양자설을 반박하는 저술을 발표한 후 양자설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12세기에 아벨라르(Abelard) 일파에 의해 또 다른 형식의 양자론이 제기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 본질적이라면 삼위 일체에 피조적 인 요소를 끌어들이는 것이므로 그 결합은 외적이고, 그 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실체(實體)일 수 없으므로 하느님 의 친자가 아니고 양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교황 알렉산 델 3세는 1177년,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이며 참된 하느 님이라는 정통 교리에 의거하여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실체가 아니라는 이 이단을 단죄하였다. ※ 참고문헌  H. Chirat, Catholicisme 1/S.J. McKenna, 《NCE》 1. [崔奭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