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회 내에서 전통적 가르침을 철학 · 역사학 · 사회 과학 등을 이용하여 근대적 관점에 보다 밀접하게 접목하고자 시도하였던 경향. 근대주의란 용어는 신학적 의미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교회의 가르침과 규율에서 발생한 위기를 가리키지만, 이 용어는 이미 16세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고대보다 근대를 더 우선시하는 경향을가리켰다. 이 용어는 19세기 초 일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에 의하여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어, 근대의 반그리스도교적 경향과 급진적 자유주의 신학을 의미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 안 에서 교회의 개혁과 근대에 맞는 교의(dogma)의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를 반대하는 자들이 변 혁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대하여 '근대주의' 란 용어를 사 용하게 되었다. 한편, 근대주의란 용어는 종종 엄격한 보 수주의적 관점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 모두를 지칭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근대주의의 뿌리는 매우 복잡하지만, 발생의 동인으로 크게 네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철학에서는 신칸 트주의(Neo-Kantianism), 실용주의(pragmatism) 그리고 슐 라이어마허(Schleiermacher)의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강 력한 영향력과 결합된 피상적 절충주의(eclecticim)m)가 가 톨릭 신자들 사이에 유행하게 된다. 둘째, 신학에서는 고 정화된 신스콜라주의(neoscholasticism)에 대한 불만이 커 졌다. 셋째, 과학에서는 혁신적인 생물학적 이론의 개발 과 역사 방법론의 발전을 들 수 있다. 넷째, 교회와 사회 정치적 체제 사이의 관계 변화를 들 수 있다. 〔주요 주장] 하나의 조직화한 현상이라기보다는 하나 의 '방향' 과 '경향' 으로 시작된 근대주의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까지는 로마 가톨릭 교회 외부에 서 주로 수용되고 있던 성서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수용 하자는 것. 둘째, 스콜라 신학의 '주지주의' (intellectualism)를 거부하고 교의를 실천에 종속시키려는 경향. 셋 째, 기원보다는 결과 자체에서 역사적 과정의 의미를 발 견하고자 하는 역사에 대한 목적론적(teleological) 태도를 갖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가지고 있는 근대주의는 프랑스 · 영국 ·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에서 큰 세력을 떨 쳤다. 그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곳은 프랑스였 다. 프랑스 : 대표적인 철학자와 신학자로 라베르토니에르 (L. Laberthonniè re)와 르 르와(E. Le Roy), 에베르(M.Hérbert)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블롱델(M. Blondel)을 자신 들의 후원자로 생각하였으며, 스콜라 신학의 주지주의를 실제 생활의 핵심과 구체성에 관계되는 힘으로 대치하고 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종교적 체험을 본성 밖에 서 초자연적인 것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는 '외연주의'(extrinsicism)와는 달리 초자연적 은총의 주된 기원을 본 성 자체의 내재적인 경향 안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내재 주의자' (immanentis)들)들이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슐라이 어마허의 종교적 상징주의(symbolism)와 스펜서(Spencer) 와 헤겔(Hegel)의 사고 방식의 영향을 받아, 불변적인 고 정 개념들을 거부하였고 멈추지 않는 삶의 흐름과의 접 촉은 계속적으로 변화 있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 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과 아울러 신학자들은 독일의 성서 연구 방법론인 역사 비판적 방식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 자유주의적 해석 방식을 통해 이룩된 결론들을 과학 적으로 성립된 결정적인 진리로 간주하였다. 이때부터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교의를 새 시대에 맞게 변형하 고자 하는 움직임이 더욱 분명해졌다. 이러한 움직임 속 에서 프랑스의 성서 해석학자 루아지(A. Loisy)는 역사 비판적 방법의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우선 구약성서를 이 방법으로 연구하였고, 1893년 파리 가톨 릭 대학에서 면직된 이후로는 신약성서 연구에 주력하였 다. 1900년에는 성서를 대하는 데에 있어서 갖을 수 있 는 영감(inspiration)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하 기도 하였다. 그는 "교의들은 하늘에서 온 진리가 아니 다" 라고 하면서 교의의 불변성을 거부하였다. 휘겔(F. v.Hügel)은 루아지가 그러한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가톨릭 신자로서 갖는 권리라고 그를 옹호하였지만 결국 1903 년 그의 저서들은 이단 목록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는 단죄받았다. 가톨릭 평신도이며 베르그송(Bergson)의 제자인 르 르 와도 극단적 방식으로 교의의 지성적 내용들을 거부하는 논문을 1905년에 발표하였다. 그는 이 논문에서 가톨릭 의 교의라는 것이 상대적 개념들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 에 절대적인 지성적 승인을 지향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 다. 또 가톨릭 교의의 본질적 목적은 영혼에 빛을 주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활동을 인도하는 것이라고 하여 완 전히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계시의 윤리적 측면을 지성적 의미보다 더 우위에 두었다. 교의사가이며 이미 1886년 에 신앙을 버렸지만 계속해서 교회에 남아 있기를 원했 던 튀르멜(Abbé Turmel)도 1900년에 들어오면서 가톨릭 의 교의를 공격하는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영 국 : 중심 인물은 티럴(George Tyrrell)이었다. 그는 《인간학 교수에게 보내는 서한》(Letter to a Professor of Anthropology)이라는 작품을 통해 교의의 기능을 매우 극 소화하였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스스로 정통의 스 승으로서 자신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신학이란 인간 안 에서 작용하고 있는 신적 힘을 지성적 용어로 표현하는 단순한 인간적 노력일 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학자들이 '계시된' 진리에 대한 역사적이고 형 이상학적인 신학 주장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교황 의 무류성을 비판하였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보편성 (ecumenicity)을 거부하였다. 이탈리아 : 이탈리아에서는 그리스도교적인 민주주의적 사고 방식을 갖고 있던 젊은 사제 무리(Romolo Murri) 를 중심으로 사회적 근대주의(social modernism)가 발전되 었다. 그는 전국 민주 연합(Lega Democratica Nazionale)이 라는 단체를 설립하였는데, 이 운동은 교계 제도로부터 의 독립과 교회 제도와 사회 구조의 개혁을 요구하는 것 이었다. 해석학과 신학 분야에서는 살바토레 미노키(Salvatore Minocchi) 신부가 1901년 신사상을 위한 장 (場)으로서 《종교 연구》(Studi religiosi)라는 잡지를 발행 하였다. 그는 해석학 분야에서는 루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후에 교의 해석에서는 티럴의 영향을 받았다. 에 르네스토 부오나이우티(Emesto Buonaiut)는 블롱델의 행 동 철학에 영향을 받아 내재주의(immanentim)에 빠져 사회적 메시아주의(social messianism)의 형태로 나아갔다. 그는 이탈리아 근대주의자의 지도자로서 활동했지만 자 신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교회 안에 남아 있기를 갈 망하였다. 또 포가차로(A. Fogazzaro)가 1905년에 발표 한 소설 (II Santo》(1905)가 근대주의 운동의 문자적 상징 이 되었다. 1907년 그가 밀라노의 젊은 평신도들의 모 임에서 펴내기 시작한 잡지 《린노바멘토)(Rinnovamento) 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종교적 자유주의의 의견을 개진하 는 중요한 기관지가 되었다. 독 일 : 1901년 클라센(F. Klasen)이 뮌헨에서 설립하 고 앵게르트(Thaddaus Engert)가 계속 발행한 잡지 《20세 기》(Zwanzigste Jahrhundert)는 개혁 가톨릭주의(Refomkatholizimus)의 기관지가 되었다. 개혁 가톨릭주의는 반 로마적이며 반스콜라주의적 경향의 프로그램을 수행하 였고, 정치적인 교황 지상주의(politcal ultramontanism)를 공격하였으며 과학적인 신학 연구의 자유와 이단 목록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신앙과 교회의 기본 구조의 '근대화' 는 제시하지 못하고 실천적인 교회 규율의 차원 에 머물렀다. 따라서 다른 나라와는 달리 극단적인 신학 명제들이 많이 발표되지는 않았다. 〔교회의 입장〕 교황 비오 10세는 1903년 12월 17일 루아지의 5권의 저서를 이단 목록에 포함시키는 교황청 의 교령을 승인하였다. 1905년 6월 11일 교황은 회칙 <Ⅱ fermo propositio>에서 가톨릭 운동(catholic action)을 격 려하면서 교회 공직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 였다. 1906년 7월 28일 교황은 회칙을 통해서 이탈리아 성직자들 중에 불순명하는 자들을 경고하 면서 '전국 민주 연합' 에 가입한 사제들에게 성무 집행 정지를 명하였다. 같은 해 포가차로의 소설 《Ⅱ Santo》와 라베르토니에르의 두 권의 저서가 이단 목록에 포함되었 으며, 티럴은 예수회에서 추방되었다. 1907년 4월 15일 무리는 성무 집행 정지를 당했다. 1907년 7월 3일 교황 청은 성서와 신학에서의 근대주의가 주장한 65개의 특 징적인 명제들을 단죄하는 회칙 〈Lamentabili sane exitu>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7월 26일 르 루아의 저서 <교의와 비평》(Dogme et Critique)이 이단 목록에 포함되었다. 1907년 9월 8일에 발표된 회칙 〈Pascendi>는 근대주의의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불가지론적(agnostic)이고, 내재주 의적이며 반지성주의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 교의 비판주 의와 성서 비판적 방식에 관한 이론을 단죄하였다. 교황 비오 10세는 1905년 이래로 성서 해석에 있어 보수적인 규범을 제시하고 있던 교황청 성서위원회의 교령을 준수 해야만 한다는 자의 교서 〈Praestantia scripturae〉를 1907년 11월 18일에 발표하였다. 《린노바멘토》와 연결되어 있 는 그룹 사이에서 약간의 조직적인 반대가 일어났지만, 이 잡지의 필자들과 후원자들이 1907년 말경 교회로부 터 파문을 받았다. 티럴은 1907년 10월에, 슈니처(A.Schnitzer)는 1908년 2월에 파문되었다. 미노키는 성무 집행 정지를 받았으며 루아지는 1908년에 파문되었다. 1910년 9월 1일 교황 비오 10세는 모든 성직자들에 게 '반근대주의 선서' 를 요구하는 자의 교서 〈Sacrorum antistitum)을 발표하였다. 이 '반근대주의 선서' 는 다양 한 근대주의의 형태를 반대하는 하나의 신앙 고백문으로 교황 비오 4세의 '트리엔트 신앙 고백문' (Professio Fiedi tridentina)을 보충한 것이었다. '반근대주의 선서' 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 부분은 다음과 같은 5개의 주 요 명제로 이루어져 있다. ① 하느님은 파악될 수 있으며 자연적 이성에 의해 그 존재가 증명될 수 있다. ② 계시 의 외적 표지들, 특별히 기적과 예언들은 확실성이 보증 되는 표지들이며 현재를 포함해서 모든 시대와 모든 사 람들에게 적합한 것이다. ③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상에 세워진 것이다. ④ 신앙의 유산이 존재하며 교의 가 교회가 주장하는 것과 다른 것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단이다. ⑤ 신앙은 잠재 의식이나 도덕적으로 훈련된 의지의 심연으로부터 나오는 맹목적인 감정이 아 니라, 외부적 원천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한 청취를 통해 진리로서 지성이 실제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은 회칙
근대주의
近代主義
[라]modernismus · [영]moder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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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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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주의 뿌리를 형성한 절충주의의 대표자 슐라이어마허.
가톨릭 교회 내에서 전통적 가르침을 철학 · 역사학 · 사회 과학 등을 이용하여 근대적 관점에 보다 밀접하게 접목하고자 시도하였던 경향. 근대주의란 용어는 신학적 의미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교회의 가르침과 규율에서 발생한 위기를 가리키지만, 이 용어는 이미 16세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고대보다 근대를 더 우선시하는 경향을가리켰다. 이 용어는 19세기 초 일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에 의하여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어, 근대의 반그리스도교적 경향과 급진적 자유주의 신학을 의미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 안 에서 교회의 개혁과 근대에 맞는 교의(dogma)의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를 반대하는 자들이 변 혁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대하여 '근대주의' 란 용어를 사 용하게 되었다. 한편, 근대주의란 용어는 종종 엄격한 보 수주의적 관점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 모두를 지칭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근대주의의 뿌리는 매우 복잡하지만, 발생의 동인으로 크게 네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철학에서는 신칸 트주의(Neo-Kantianism), 실용주의(pragmatism) 그리고 슐 라이어마허(Schleiermacher)의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강 력한 영향력과 결합된 피상적 절충주의(eclecticim)m)가 가 톨릭 신자들 사이에 유행하게 된다. 둘째, 신학에서는 고 정화된 신스콜라주의(neoscholasticism)에 대한 불만이 커 졌다. 셋째, 과학에서는 혁신적인 생물학적 이론의 개발 과 역사 방법론의 발전을 들 수 있다. 넷째, 교회와 사회 정치적 체제 사이의 관계 변화를 들 수 있다. 〔주요 주장] 하나의 조직화한 현상이라기보다는 하나 의 '방향' 과 '경향' 으로 시작된 근대주의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까지는 로마 가톨릭 교회 외부에 서 주로 수용되고 있던 성서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수용 하자는 것. 둘째, 스콜라 신학의 '주지주의' (intellectualism)를 거부하고 교의를 실천에 종속시키려는 경향. 셋 째, 기원보다는 결과 자체에서 역사적 과정의 의미를 발 견하고자 하는 역사에 대한 목적론적(teleological) 태도를 갖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가지고 있는 근대주의는 프랑스 · 영국 ·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에서 큰 세력을 떨 쳤다. 그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곳은 프랑스였 다. 프랑스 : 대표적인 철학자와 신학자로 라베르토니에르 (L. Laberthonniè re)와 르 르와(E. Le Roy), 에베르(M.Hérbert)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블롱델(M. Blondel)을 자신 들의 후원자로 생각하였으며, 스콜라 신학의 주지주의를 실제 생활의 핵심과 구체성에 관계되는 힘으로 대치하고 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종교적 체험을 본성 밖에 서 초자연적인 것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는 '외연주의'(extrinsicism)와는 달리 초자연적 은총의 주된 기원을 본 성 자체의 내재적인 경향 안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내재 주의자' (immanentis)들)들이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슐라이 어마허의 종교적 상징주의(symbolism)와 스펜서(Spencer) 와 헤겔(Hegel)의 사고 방식의 영향을 받아, 불변적인 고 정 개념들을 거부하였고 멈추지 않는 삶의 흐름과의 접 촉은 계속적으로 변화 있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 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과 아울러 신학자들은 독일의 성서 연구 방법론인 역사 비판적 방식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 자유주의적 해석 방식을 통해 이룩된 결론들을 과학 적으로 성립된 결정적인 진리로 간주하였다. 이때부터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교의를 새 시대에 맞게 변형하 고자 하는 움직임이 더욱 분명해졌다. 이러한 움직임 속 에서 프랑스의 성서 해석학자 루아지(A. Loisy)는 역사 비판적 방법의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우선 구약성서를 이 방법으로 연구하였고, 1893년 파리 가톨 릭 대학에서 면직된 이후로는 신약성서 연구에 주력하였 다. 1900년에는 성서를 대하는 데에 있어서 갖을 수 있 는 영감(inspiration)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하 기도 하였다. 그는 "교의들은 하늘에서 온 진리가 아니 다" 라고 하면서 교의의 불변성을 거부하였다. 휘겔(F. v.Hügel)은 루아지가 그러한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가톨릭 신자로서 갖는 권리라고 그를 옹호하였지만 결국 1903 년 그의 저서들은 이단 목록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는 단죄받았다. 가톨릭 평신도이며 베르그송(Bergson)의 제자인 르 르 와도 극단적 방식으로 교의의 지성적 내용들을 거부하는 논문을 1905년에 발표하였다. 그는 이 논문에서 가톨릭 의 교의라는 것이 상대적 개념들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 에 절대적인 지성적 승인을 지향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 다. 또 가톨릭 교의의 본질적 목적은 영혼에 빛을 주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활동을 인도하는 것이라고 하여 완 전히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계시의 윤리적 측면을 지성적 의미보다 더 우위에 두었다. 교의사가이며 이미 1886년 에 신앙을 버렸지만 계속해서 교회에 남아 있기를 원했 던 튀르멜(Abbé Turmel)도 1900년에 들어오면서 가톨릭 의 교의를 공격하는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영 국 : 중심 인물은 티럴(George Tyrrell)이었다. 그는 《인간학 교수에게 보내는 서한》(Letter to a Professor of Anthropology)이라는 작품을 통해 교의의 기능을 매우 극 소화하였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스스로 정통의 스 승으로서 자신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신학이란 인간 안 에서 작용하고 있는 신적 힘을 지성적 용어로 표현하는 단순한 인간적 노력일 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학자들이 '계시된' 진리에 대한 역사적이고 형 이상학적인 신학 주장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교황 의 무류성을 비판하였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보편성 (ecumenicity)을 거부하였다. 이탈리아 : 이탈리아에서는 그리스도교적인 민주주의적 사고 방식을 갖고 있던 젊은 사제 무리(Romolo Murri) 를 중심으로 사회적 근대주의(social modernism)가 발전되 었다. 그는 전국 민주 연합(Lega Democratica Nazionale)이 라는 단체를 설립하였는데, 이 운동은 교계 제도로부터 의 독립과 교회 제도와 사회 구조의 개혁을 요구하는 것 이었다. 해석학과 신학 분야에서는 살바토레 미노키(Salvatore Minocchi) 신부가 1901년 신사상을 위한 장 (場)으로서 《종교 연구》(Studi religiosi)라는 잡지를 발행 하였다. 그는 해석학 분야에서는 루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후에 교의 해석에서는 티럴의 영향을 받았다. 에 르네스토 부오나이우티(Emesto Buonaiut)는 블롱델의 행 동 철학에 영향을 받아 내재주의(immanentim)에 빠져 사회적 메시아주의(social messianism)의 형태로 나아갔다. 그는 이탈리아 근대주의자의 지도자로서 활동했지만 자 신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교회 안에 남아 있기를 갈 망하였다. 또 포가차로(A. Fogazzaro)가 1905년에 발표 한 소설 (II Santo》(1905)가 근대주의 운동의 문자적 상징 이 되었다. 1907년 그가 밀라노의 젊은 평신도들의 모 임에서 펴내기 시작한 잡지 《린노바멘토)(Rinnovamento) 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종교적 자유주의의 의견을 개진하 는 중요한 기관지가 되었다. 독 일 : 1901년 클라센(F. Klasen)이 뮌헨에서 설립하 고 앵게르트(Thaddaus Engert)가 계속 발행한 잡지 《20세 기》(Zwanzigste Jahrhundert)는 개혁 가톨릭주의(Refomkatholizimus)의 기관지가 되었다. 개혁 가톨릭주의는 반 로마적이며 반스콜라주의적 경향의 프로그램을 수행하 였고, 정치적인 교황 지상주의(politcal ultramontanism)를 공격하였으며 과학적인 신학 연구의 자유와 이단 목록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신앙과 교회의 기본 구조의 '근대화' 는 제시하지 못하고 실천적인 교회 규율의 차원 에 머물렀다. 따라서 다른 나라와는 달리 극단적인 신학 명제들이 많이 발표되지는 않았다. 〔교회의 입장〕 교황 비오 10세는 1903년 12월 17일 루아지의 5권의 저서를 이단 목록에 포함시키는 교황청 의 교령을 승인하였다. 1905년 6월 11일 교황은 회칙 <Ⅱ fermo propositio>에서 가톨릭 운동(catholic action)을 격 려하면서 교회 공직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 였다. 1906년 7월 28일 교황은 회칙을 통해서 이탈리아 성직자들 중에 불순명하는 자들을 경고하 면서 '전국 민주 연합' 에 가입한 사제들에게 성무 집행 정지를 명하였다. 같은 해 포가차로의 소설 《Ⅱ Santo》와 라베르토니에르의 두 권의 저서가 이단 목록에 포함되었 으며, 티럴은 예수회에서 추방되었다. 1907년 4월 15일 무리는 성무 집행 정지를 당했다. 1907년 7월 3일 교황 청은 성서와 신학에서의 근대주의가 주장한 65개의 특 징적인 명제들을 단죄하는 회칙 〈Lamentabili sane exitu>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7월 26일 르 루아의 저서 <교의와 비평》(Dogme et Critique)이 이단 목록에 포함되었다. 1907년 9월 8일에 발표된 회칙 〈Pascendi>는 근대주의의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불가지론적(agnostic)이고, 내재주 의적이며 반지성주의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 교의 비판주 의와 성서 비판적 방식에 관한 이론을 단죄하였다. 교황 비오 10세는 1905년 이래로 성서 해석에 있어 보수적인 규범을 제시하고 있던 교황청 성서위원회의 교령을 준수 해야만 한다는 자의 교서 〈Praestantia scripturae〉를 1907년 11월 18일에 발표하였다. 《린노바멘토》와 연결되어 있 는 그룹 사이에서 약간의 조직적인 반대가 일어났지만, 이 잡지의 필자들과 후원자들이 1907년 말경 교회로부 터 파문을 받았다. 티럴은 1907년 10월에, 슈니처(A.Schnitzer)는 1908년 2월에 파문되었다. 미노키는 성무 집행 정지를 받았으며 루아지는 1908년에 파문되었다. 1910년 9월 1일 교황 비오 10세는 모든 성직자들에 게 '반근대주의 선서' 를 요구하는 자의 교서 〈Sacrorum antistitum)을 발표하였다. 이 '반근대주의 선서' 는 다양 한 근대주의의 형태를 반대하는 하나의 신앙 고백문으로 교황 비오 4세의 '트리엔트 신앙 고백문' (Professio Fiedi tridentina)을 보충한 것이었다. '반근대주의 선서' 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 부분은 다음과 같은 5개의 주 요 명제로 이루어져 있다. ① 하느님은 파악될 수 있으며 자연적 이성에 의해 그 존재가 증명될 수 있다. ② 계시 의 외적 표지들, 특별히 기적과 예언들은 확실성이 보증 되는 표지들이며 현재를 포함해서 모든 시대와 모든 사 람들에게 적합한 것이다. ③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상에 세워진 것이다. ④ 신앙의 유산이 존재하며 교의 가 교회가 주장하는 것과 다른 것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단이다. ⑤ 신앙은 잠재 의식이나 도덕적으로 훈련된 의지의 심연으로부터 나오는 맹목적인 감정이 아 니라, 외부적 원천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한 청취를 통해 진리로서 지성이 실제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은 회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