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

根本主義

[라]fundamentalismus · [영]fundamen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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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주의적 부흥 운동의 선구자인 화이트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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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주의적 부흥 운동의 선구자인 화이트필드.

I . 프로테스탄트의 근본주의 192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프로테스탄트의 초교파적 보수주의 운동. 이 신학 사조는 당시 일체의 비판적 신학 사조들, 예컨대 현대주의, 자유주의 신학, 특히 각종 진 화론에 대하여 조직적이고도 저항적인 자세로 대항하였 다. 이 사조는 성서의 무오성(無誤性)과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적 진리를 수호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교리를 재확인하려 했던 일종 의 교리 수호 운동이다. 근본주의는 오늘날도 그 명맥을 뚜렷이 유지하고 있지만, 오늘날에는 주로 '복음주의' (evangelicalism)라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다. 〔세계의 상황〕 근본주의가 20세기 초에 발생한 특정 신학 사조를 지칭하는 반면, 복음주의라는 말은 원래 18 세기에 일어난 종교 각성 운동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영미식(英美式) 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의 역사적 기원 은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일반과 연결되어 있다. 즉 성서 의 유일무이한 권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이고도 개 인적인 신뢰를 강조하는 종교 개혁 사상에 그 연원이 있 다. 17세기의 청교도주의는 이 같은 종교 개혁의 강조점 들을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전통에 깊게 심어 주었으며, 또한 그 후 특별히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강한 영향을 미 쳤다. 18세기 대륙에서 등장한 경건주의는 이 같은 영국 의 청교도주의와 만나게 되는데, 감리교회의 창시자 웨 슬리(John Wesley, 1703~1791)와 모라비아 교도들과의 만 남은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된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각성 운동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을 비롯한 비국교도(非國敎 徒) 사이의 복음주의적 부흥가들, 그리고 영국 교회 내 의 여러 분파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결국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 같은 형태의 복음주의 신앙은 영 국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가 된다. 미국의 경우는 이 복음주의의 영향이 더욱 크다. 그 이 유는 신천지 미국에는 영국 교회와 같은 잘 조직된 도전 세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복음주의의 발흥 은 사실상 동시적이다. 그 결과 미국에서 프로테스탄트 는 유사 · 공식적인 지위를 얻었다. 그 이유는 복음주의 가 강조하는 자발적인 수용이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미국의 이상과 잘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18세기에 일어난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 중에 그 특성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는 뉴잉글랜드 청교도주의, 대륙의 경건주의, 영국인 화 이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의 칼뱅주의적 부 흥 운동, 그리고 감리교 운동 등 일련의 운동들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19세기 초에서 중반까지의 기간 중 미국에 서는 이 특정 형태의 복음주의라는 신앙 형태가 곧 프로 테스탄트의 신앙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물론 그 내부에 는 다양한 교파들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칼뱅주의와 감 리교 신학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삶으로 증 거하는 회심 경험을 강조하였고, 부흥과 선교에 치중했 다. 따라서 이들은 교회를 오직 성서의 권위에만 근거한 신자들의 자발적인 연합체로 이해했다. 19세기 초까지 만 해도 이들은 종파적인 성격을 띠지 않고 단지 '자발 적인 단체들' (voluntary societies)로 이루어진 거대한 그물 망(network)을 결성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널리 확산시키 려 하였다. 또한 선교 활동을 전세계로 확대하였고, 자선 사업과 사회적 개혁을 지향하여 노예 해방 운동, 노예 제 도 폐지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안식일 엄 수, 금주(禁酒) 규정 제정, 교도소 개혁 같은 다른 개혁 들도 추진하였다. 많은 자선 단체의 설립도 이 시기에 이 루어졌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급격히 변화된 상황 때 문에 그 초점은 개인적 성결(聖潔)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새로운 산업화 현상과 대도시 출현 등으로 자발적인 프로그램의 실행이 불가능해진 탓이다. 따라서 이전에 문화를 지배하던 개념들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져 결국은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 개인적 성결 등 을 강조하게 되는 운동들이 출현하게 되었으며, 사회 개 혁적 관심은 퇴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에 도덕적 영 향을 주려는 열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의 대표적인 인물이 부흥사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이다. 무 디는 피니(Charles Finney, 1792~1875)와는 달리 전(前) 천 년왕국설(premillienarism)을 강조하게 되며, 이 같은 사상 적인 전환은 후에 나타나게 되는 근본주의와 밀접한 연 관을 갖게 된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지적으로 새로운 상황이 도래 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다원(Charles Darwin, 1809~1882) 의 사상이 그 당시 문화 전반을 지배하던 다양한 사상들 가운데 선두 주자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다원주의에 대 한 초기의 논쟁은, 다원주의가 복음주의에 치명적인 손 상을 입히게 되자 근대 과학과 성서적 그리스도교는 조 화를 이룰 수 없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더 커 다란 문제는 '실재와 진리' 에 대한 사고의 혁명적인 전 환이다. 즉 고정된, 불변하는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은 불가능하고, 그것은 인간의 문화적 진화의 변 화하는 기능에 불과하다는 것을 서구인들은 이 다원주의 의 논쟁을 통해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종교란 하느님이 계시한 절대 진리가 아니라 단 지 신과 도덕성에 대한 인간 개념의 변천 기록일 뿐이다. 이러한 개념은 곧 이어 성서에 적용되었고, 결국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성서의 고등 비평은 성서를 그저 히브리 인들의 종교 체험에 대한 기록으로 간주하게끔 유도하였 다. 이러한 상황은 광범위한 복음주의의 합의점을 그 근 본부터 흔들어 놓았다. 구원론을 뒷받침하던 성서의 절 대 권위, 그리고 성서에 근거한 도덕적 절대성이 흔들리 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의문은 교회 외부에서만이 아니 라 교회 내부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19세기 중반에 이룩된 복음주의 동맹 내 부에서는 심각한 분열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리스도교 신앙을 시대의 조류에 맞게 조정해 보려는 일 단의 사람들, 소위 '현대주의자' 로 불리는 자유주의자들 이 생겨난 것이다.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하느님의 초자 연적인 개입을 통해 실현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문명과 도덕의 성장이라는 자연적인 과정 속에서 성취되는 것으 로 이해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도교란 저 세상을 준비하기 위한 영원한 구원의 교리가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한 인간적인 삶의 방식을 말해 주는 신적인 계시일 뿐 이다. 이 자유주의자들은 20세기 초반의 진보적 정치학 에 근거한 '사회 복음' 을 옹호하면서, 과거 복음주의 운 동의 개인 중심적 구원을 사회 중심적 구원으로 초점을 바꾸게 하였다. 반면에 이 같은 세속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성서의 초 자연적 기적 사건들을 강조하며 전통적인 교리들을 계속 지켜 가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근본주의 운 동이다. 1890년에는 소위 '브릭스 사건' 이 일어났다. 독 일 베를린 대학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브릭스(Charles A. Briggs)가 북장로 교회 산하에 있었던 뉴욕시 소재 유니 온 신학교에 교수로 취임하면서 '성서의 권위' 라는 제목 으로 연설을 하였는데, 그는 독일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 을 받아들이면서 성서의 영감(靈感)을 부인하고 성서의 역사 비판을 수락한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미국 북장 로 교회는 1892년 역사 비평적 성서관을 정식으로 단죄 하고, 브릭스 교수와 그에 동조하는 몇몇 교수를 신학교 교수직으로부터 해임시켰다. 그러자 보수계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이 성서의 무오설을 지키기 위해 대단합을 꾀하 게 되었는데, 이것이 근본주의 운동을 가시화시키는 사 건이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의 성서 역사 비평에 위기를 느낀 보수 지도자들은 성서를 들고 대중 전도에 나선 무디와 함께 교인들을 모아 '사경회' (Bible Conference)를 열었다. 사경 회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1895년 나이아 가라 휴양지에서의 사경회(Niagara Bible Conference)는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나이아가라 사경회는 자유주의 신학 운동의 여파로 추락된 성서의 권위를 회복하고 기독교 근본 교리를 확립 · 수호하기 위한 초교파적인 보수주의 교회 지도자들의 모임이었다. 여기에서 프로테스탄트의 '5가지' 근본 교리(성서 무오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 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가 선정되었다. 1909년부터 1915년에 걸쳐 근본주의 총서인 《근본 : 진리 증언》(Fundamentals : A Testimony to the Truth)이라는 소책자 12권이 발간되어, 문서 사업을 통한 근본주의 운 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총서의 집필진은 교파를 초 월한 여러 부류의 인사들로 이루어져 당시의 보수 대연 합이 연합 전선적인 움직임이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이 책자는 와이만(Wyman)과 스튜어트(M. Stewart)라는 평신도가 출자하여 300만 부 이상을 전국에 무료로 배 포하였다. 이후로 나온 근본주의 책자들은 질적으로 이 총서를 능가하지 못했다. 근본주의자들은 감정적으로 대 항했으며 적개심에 불타 있어서, 자신들의 주장을 신학 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1910년에 개회된 북장로 교회 총회도 프로테스탄트 의 5대 근본 교리' 를 채택하였는데, 그 내용은 나이아가 라 회합의 5대 교리와 유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 스도의 육체적 재림을 그리스도의 이적(異蹟)으로 대치 한 것이다. 이것은 '천년 왕국' 의 시기에 관한 개혁주의 자와 '세대(경륜)주의자' 사이의 이견 조정 때문이었다. 즉 말생의 소지가 있음을 깨달았기에 아예 다른 것으로 대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근본 주의 운동은 처음부터 자체 내에 분열의 소지를 안고 있 었다. 1919년에 근본주의자 대회가 시카고의 무디 성서 학 교(Moody Bible Institute)에서 열렸다. 이 모임의 참석자들 은 25편의 논문을 수록한 《신언》(God has Spoken)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는 자유주의에 대 해 '수비에서 공격으로 자세를 전환' 하는 전략을 수립하 였다. 여기서 하나의 기구가 조직되는데, 후에 '세계 기 독교 근본주의 연합회' (The World's Christian Fundamentals Association)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1920년 미국 침례 교 신학자인 로우스(Curtis Lee Laws)는 침례교 기관지 《Watchman-Examiner)에서 보수주의 그룹을 '근본주의자 들' (fundamentalists)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름은 위에서 지적한 소책자들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었 다. 그런데 이 말이 그 후 그들을 가리키는 공식적인 용 어처럼 사용되었다.맹렬하게 전개되던 근본주의 운동도 자유주의 사상과의 중요한 두 논쟁 사건 이후로는 점점 그 세력이 약화되 어, 급기야는 주요 교단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 고 립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첫번째 사건은 1922년의 '포스딕(H. Emersion Fosdik)의 설교 사건' 이다. 뉴욕 시 제일 장로교회를 맡고있던 자유주의계 침례교 목사 포스 딕은 '근본주의자들은 이길 것인가? 라는 제목의 설교 를 하였는데, 그 교회의 리(Ivy Lee)라는 평신도가 그것 을 인쇄하여 교계에 배포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에 가장 많이 읽히던 설교 가운데 하나였다. 포스딕은 근본주의 가 자유를 억제하며 관용심이 없다고 공격하였다. 즉 그 는 동정녀로부터의 그리스도 탄생과 성서의 영감, 그리 스도의 재림 등을 절대적 교리로 고집하는 근본주의자들 은 온 세계가 무지와 빈곤과 전쟁 등 사회악으로 인해 죽 어가고 있는데도 "사소한 일로 다투고 있다"고 비난하면 서 프로테스탄트의 사회 참여를 강조하였다. 이에 맞서 서 필라델피아의 장로교회 목사 매카트니(Clarence E.Macartney)는 '불신앙은 이길 것인가? 라는 제목의 설교 를 통해 프로테스탄트와 자유주의의 '상반성' 을 강조하 면서, 자유주의에 대하여 그 주관성과 비성서적 이론 전 개를 비난하였다. 또한 필라델피아 총회가 열렸을 때, 매 카트니는 이 문제를 제기하여 뉴욕 시 제일 장로교회의 설교가 전통적인 장로교회 교리에 부합한 설교가 되도록 조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북장로 교회 총회는 뉴욕 총회에 포스딕으로 하여금 장로교회 교리에 맞는 설교를 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포스딕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반발하여 결국 목사직을 사임하였고, 이 사 건은 매카트니의 승리로 끝났다. 두번째 사건은 1925년 테네시 주 데이튼에서 열린 '스코프스 재판 (The Scopes Trial) 또는 '원숭이 재판'(Monkey-Tial)이다. 이 사건으로 근본주의 운동은 사멸 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사건은 스코프스(J.T. Scopes)라 는 한 공립 학교 교사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던 진화론을 가르침으로써 발생하였다. 당시는 다윈의 진화론이 교회 의 큰 위협으로 등장하여 이를 방어하기 위해 교회 인사 들이 공립 학교에서 생물 과목을 가르칠 때는 진화론을 소개하지 못하도록 주립(州立) 법으로 제정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미 남부의 여러 주에서는 진화론 소개 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법정에서는 근본주의의 유명한 대변자인 브라이언(W.J. Bryan) 목사와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법률가 다로우(Clarence Darrow) 사이에 열띤 공방전 이 전개되었다. 브라이언 목사는 창조론의 입장을 변호 하기는 했지만 횡설수설하며 오히려 무지를 폭로하는 듯 보였다. 반면 다로우는 명석한 이론과 과학적 지식을 가 지고 브라이언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는 스코 프스가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100달러 벌금형)을 받았지만, 당시의 사회 여론은 다로우 편으로 기울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주의는 '사멸하는 현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하였다. 이후 근본주의자들은 자 유주의자들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부흥 사경회 개최, 성서 학교 설립, 해외 선교사 파견 등을 벌이면서 개별 교리 성장에 주력하는 한편, 자유주의로부터의 분리와 독립 교회 설립을 꾀하였다. 1925년의 프린스턴 신학교 사건은 바로 이 같은 분 리' 운동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1812년에 설립된 프린 스턴 신학교는 설립 이래로 미국 보수 신학과 '성서 영 감설' 의 본거지로서 군림해 왔다. 그러나 1914년 스티 븐슨(J. Ross Stevenson)이 교장으로 취임한 후 상황이 바 뀌기 시작했다. 그 자신은 보수 신학자이지만 신학적 입 장에 있어서는 중용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당시 교단 내 에서는 '어번 선언' (The Auburn Affirmation)이라는 운동 이 일어났는데,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보수주의적인 프린스턴 신학 노선을 비판하면서, '진보성' 을 띤 새 신 학 사상과 교리 해석에 '관용' 을 베풀 것을 요청하게 되 었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1만 명의 교단 목사 가운 데 1 293명이었고, 이들은 1910년 교단이 정한 다섯 가 지 교리를 목사 안수의 필수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여러 가지 학설 가운데 하나 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교장은 이 제안을 받 아들여 어번 선언 동조자에게 신학교 운영의 참여를 허 락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교장의 학교 운영에 대해 메이 천(J. Gresham Machen), 알리스(Allis), 윌슨(Wilson), 반 틸 (Van Til) 등 보수적 교수들은 자유주의 신학 사조가 학교 안에 침투하였다고 교장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사표를 내 고 인근 필라델피아 시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웠 다. 후에 미국 북장로 교회 전체가 자유주의자들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자, 이들은 동지들과 교회들을 규합하 여 1936년 '정통 장로교회'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를 설립함으로써 교단 분열을 감행하였다. 이후 '이탈과 분리' 가 근본주의 운동의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교단 분열을 감행하여 갈라져 나온 정통 장로 교회 내에서도 강경파와 온건파의 갈등이 심해졌고, 종 말론과 신자의 경건 생활에 관한 문제 때문에 자체 내에 긴장이 생기게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들 대 다수는 종말론에 있어서는 무천년왕국설을 주장하는 쪽 이었고, 주초(酒草)와 극장 출입 문제 같은 것은 프로테 스탄트 신자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를 규범화하는 일에는 반대하고 있었다. 하 지만 좀더 엄격한 윤리를 주장하였던 강경파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다 하여 결국에는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를 중심으로 성서 장로교회(Bible PresbyterianChurch)와 페 이스 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를 세우며 또다시 교단 분열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20년이 채 못되어 페이 스 신학교는 행정 문제로 분리되어, 결국 버스웰(J.O.Buswell)을 중심으로 세인트루이스에 카버넌트 신학교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와 복음 장로교회가 생겨났 다. 이 같은 분리 현상은 근본주의자들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일어났다. 그리하여 분리로 인한 '분산된 힘' 의 결속을 위해 조직적인 연합체의 구성이 필요하게 되었고, 1941년에는 미국 프로테스탄트 교회 협의회 (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가, 1948년에는 암 스테르담에서 국제 프로테스탄트 교회 협의회(ICCC :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가 각각 맥킨타이 어의 주도 아래 조직되었다. 이들은 완전 분리주의를 주 장하여 세계 기독교 교회 협의회(WCC)계에 참여하는 목사들과 연관된 어떠한 회의나 프로그램에도 동참하는 것을 거부하고, 나아가 같은 근본주의자들이라도 세계 기독교 교회 협의회나 그 밖의 자유주의자들과 연합 사 업을 벌이는 빌리 그래함이나 풀러 신학교 및 <현대 그 리스도교>(Christianity Today) 지까지도 단죄하였다. 이들 은 '신근본주의' (neo-fundamentalism)라 불린다. 그러나 완전 분리주의자들과 다른 노선의 근본주의도 생겨났다. 이들의 노선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복 음주의' (neo-evangelicalism)로 알려졌다. 이들은 세속 세 계의 정치 참여를 적극 추진하고 사회 개혁을 시도하는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분리만이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하 여, 세속 사회에 프로테스탄트적인 원리들을 적극 반영 시키기 위하여 조직과 매스 미디어를 동원하는 선교 전 략을 실천하였다. 이 노선은 1947년 옥켄가(Harold J.Ockenga), 카넬(Edward J. Carnell), 헨리(Carl F. Henry), 헤 리슨(E. Harrison), 램(Bernard Ramm) 풀러(Charles E.Fuller) 등이 주축이 되어 캘리포니아의 파사디나 시에 설 립한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가 중심이다. 이들은 '정통주의 새로운 시작' 또는 '근본주의 부 활' 을 표방하고 나섰지만, 자신들의 선조인 근본주의를 아무런 주저없이 비판하기도 했다. 이들은 근본주의 운 동의 특징처럼 되었던 '분리' 정책이 결국은 세계를 변 화시키는 신앙이 아니라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신앙이 되 어 버렸음을 통탄하면서, 뚜렷한 프로테스탄트적 문화관 과 선교 의식을 부각시켜 정통주의의 신학적 퇴각을 만 회하고자 하였다. 이같이 다소 유연한 근본주의자들은 국제 기독교 교회 협의회에 대항하여, 1942년 세인트 루이스에서 미국 복음주의 연합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을 결성하였으며, 1948년에는 스위스 의 클라렌스에서 국제 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 조 직은 어느 교파에 속해 있건 상관없이 개인 자격으로 회 원이 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세계 기독교 교 회 협의회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과도 손을 잡고 연합 사업을 펼쳐 나갔다. 이들은 오늘날도 특히 텔레비전 방 송 등을 이용하여 복음 전도 및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꾀 하고 있다. 〔한국의 상황〕 자유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 사이의 싸움은 한국 교회(주로 장로교회)에서도 있었다. 곧 박형 룡(朴亨龍, 1897~1978)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평양 신학 교(후에 장로교 신학교로 변경)와 김재준(金在俊, 1901~ 1987)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 신학교의 분리, 그 결 과로 발생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예장' )와 대한 기독교 장로회( '기장' ) 교단의 분열이 그것이다. 이 두 진영 사이 의 싸움의 배후에는 복잡한 교권 싸움이 도사리고 있었 으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신학적 견해 차이였다. 당시 의 선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모페트(Samuel A.Moffett, 1864~1939) 박사의 지적대로, 한국에 와 있던 대 부분의 선교사들은 보수주의자들이었고, 이들은 한국 교 회에 보수 사상, 곧 근본주의 운동을 전파하였다. 따라서 선교사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시절에 그들과 다른 견 해를 지닌 사람, 곧 자유주의자들은 한국 교회에서 대체 로 용납되지 않았다. 한편 일본이나 구미에서 신학을 연구한 한국인 목사들 이 귀국하면서 세계 신학의 다른 흐름들이 교회에 소개 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한국 교회 안에도 진보적인 자 유주의 신학 사조가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 한 중심 인물이 김재준 목사이다. 그는 한국 신학 교육의 폐쇄성을 공박하며, 단일하고도 고루한 전통 신학과 고 정된 사문(死文)의 교리 항목을 신학교들이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데 그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성서 축자 영감 설을 반박함과 동시에 한국 교회의 주체 의식을 방해하 고 있는 선교사들까지 공격하였다. 김재준 목사 외에 채 필근, 김영주, 김춘배 등도 각각 변증법적 신학의 소개, 창세기의 모세 저작설 부인, 여권(女權)에 대한 자유주 의적 해석 등을 시도하였다. 이로써 이들은 각기 세계의 자유주의적 사상의 커다란 흐름에 동참하고 있었다. 반 대로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 진영측에서 수장(首長)격인 사람으로는 박형룡 목사를 들 수 있다. 그는 프린스턴 신 학교 보수 진영의 거두 메이첸(G. Machen) 박사에게 직접 사사받은 전형적인 근본주의자였다. 그는 한국 교회의 신학적 사명을 한국 나름의 신학 '창작' 이 아니라 사도 적 전통인 정신앙(正信仰)을 그대로 '보수'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성서 무오성과 축자 영감설을 강력히 주장하 는 반면 소위 성서의 역사 비평을 단호히 단죄하였다.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양측은 계속 갈등과 마찰을 일 으키다가 1952년 4월 대구 서문 교회에서 개최된 제37 회 총회를 기점으로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그리고 1953 년의 제38회 총회는 김재준 목사를 "제36회 총회의 결 의를 무시하고 성서 유오성(有誤性)을 계속 주장하였다" 는 죄목으로 목사직 파면을 결의하였다. 이에 김재준 목 사측은 1953년 6월 10일 법통 제38회 총회를 열고 교 단 분열을 감행, 이듬해 6월 10일 제39회 총회에서 총 회 명칭을 '대한 기독교 장로회' 로 바꾸고 새로운 교단 의 출발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장로교회 의 '예장' 과 '기장' 사이의 분열 사건이다. 〔핵심 사상〕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 사상과 진화론 에 대항하여 성서의 무오성과 프로테스탄트의 근본 진리 를 수호하려는 운동이다. 이제는 이들이 지키려 하는 근 본 교리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1895년 나이아가라 사경회가 채택한 프로테스탄트의 근본 교리 '다섯 가지' (The Five Points)는 다음과 같다. ① 성서의 축자 영감설(The verbal inspiration of the Bible), ②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The virgin birth ofChrist) ③ 그리 스도의 대속적 죽음(The subsistutionary atonement of Christ for the sins of the world), ④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Christ's bodily resurrection), ⑤ 그리스도의 재림(Christ's second coming) .이 다섯 가지 교리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로 환원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문제가 바로 논쟁의 초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근본주의자들은 '오직 성서로만' (sola scriptura)을 외친 종교 개혁 전통 안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일치점에도 불구하고 이들 은 루터와는 입장이 다르다. 루터에게 성서는 예수 그리 스도, 곧 '복음' 을 표현하는 한에 있어서만 그 권위를 인 정받는다. 즉 성서는 "그리스도가 누워 계신 요람" (cradle ofChrist)일 뿐이다. 이 같은 논리, 곧 '율법' 과 '복음' 의 구별이라는 논리는 자유주의자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된 다. 그들이 성서에 대해 역사적 비평을 감행하는 것은 그 리스도가 누워 있는 '요람' 에서부터 '그리스도' 를 구별 하고자 했을 뿐, 결코 요람 안의 그리스도까지 거부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루터는 성서 자체 내에도 그리스 도를 표현하는 일에 있어서 서로 다른 차이점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루터와는 달리 성서 전체의 저자가 단지 하느님임을 주장하면서, 계시 의 '객관성' 과 '불변성' 을 고집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의 이러한 특징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자유주의 신학의 내용과 자유주의 신학 사조를 가능하게 한 근대의 '과학 혁명' 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적 방법을 탄생시킨 주요 요인의 하나는 코페르니쿠스(1473~1543) 케플러(1571~1630) 갈릴레이(1564~1642), 그리고 뉴턴 (1643~1727)의 이름과 더불어 시작된 근대의 '과학 혁 명' 이다. 근대 자연 과학의 업적은 우주에 대한 인간들 의 전통적인 생각들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 라, 사유 방식 자체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이 '계몽주의' 사조이다. 이와 더불어 지식과 사물의 본성 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했다. 어떠한 진리도 선험 적으로 당연시될 수 없으며, 보편 타당한 지식이란 권위 나 계시가 아니라 엄격한 관찰과 탐구, 또는 합리적인 분 석을 통해서만 도출될 수 있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대 조류에 발맞추어 자유주의 신학은 프로테 스탄트 신앙과 그 문헌(성서)을 자연 과학(그리고 역사 과 학)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이 신학의 중요한 특 징은 다음의 4가지이다. ① 신학 외의 다른 영역에서 성 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귀납적 연구 방법' 을 적극적으 로 채택(역사 비평), ② 성서가 아니라 인간 경험에 최고 의 권위를 부여, ③ 전통적인 신학과는 달리 하느님과 인 간, 계시와 이성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 ④ 인간의 전적 타락보다는 도덕적 가능성을 인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사 회 복음 운동). 이 같은 기준으로 성서를 바라본다면, 성 서에 나타난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이야 기들(기적, 신화)이 많다. 이 같은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근본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포기하고 그리 스도교 진리의 불변성을 거부하는 반(反)신앙적인 행동 이다. 예수가 인간이라면, 그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단순히 도덕적인 교사에 불과한 그가 보 여 준 삶의 방식을 따른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이 확증되 는가? 자유주의자들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지는 근본주 의자들이 보인 반응은 지극히 명료하다. 그것은 곧 자유 주의자들은 성서의 권위와 그리스도교 진리를 부정한다 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부정한 성서의 권위를 다시 받아들이고(성서의 축자 영감설, 무오성), 성서 속에 나오는 전통 교리(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재림), 곧 '초자연적 진리' 를 그대로 믿는 것이야말로 그 리스도교 신앙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이들은 믿 는다. 바로 이것이 근본주의자들이 지닌 신념이다. (→ 자유주의 신학 ; 김재준 ; 박형룡) ※ 참고문헌  김의환,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자>, <신학지남> 215 호, 1988, pp. 102~123/ 박아론, <20세기 보수 신학 사조 연구 14>, 《신 학지남》 193호, 1982, pp. 42~55 194호, 1982, pp. 25~34 ; 196호, 1982, pp. 38~49 ; 203호, 1984, pp. 106~ 121/ 홍치모, <미국 교회의 보수 신앙 운동의 변천>, <신학지남> 227호, 1991, pp. 198~219/ 홍치 모, <미국에 있어서 근본주의 신학 운동의 역사적 기원과 성격>, <신학지남> 226 호, 1990, pp. 131~144《EB》5, 1974, pp. 51~52/ Nancy T. Ammerman, Bible Believers Fundamentalists in the Modem World, New Brunswick & London : Rutgers University Press, 1987/ Deane W. Ferm, Contemporary American Theologies : A Critical Survey, New York : The Seabury Press, 1981/ George A. Lindbeck, The Nature ofDoctrine : Religion and Theology in a Postliberal Age, Philadelphia : The Westminster Press, 1984/ G.M. Marsden, Evangelical and Fundamental Christianity, 《ER》5 1987, pp. 190 ~1971 J.I. Packer, Fundamentalism and the Word of God : Some Evangelical Principles, Grand Rapids :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0. [편찬실] : II . 이슬람교의 근본주의 본래 근본주의는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일파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점차 영국과 영연방을 비롯한 영어권 세계에 퍼지다가 결국 전세계의 전통적이고 호전적인 그리스도 인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나중에는 다른 종교 의 추종자들 가운데에 비슷한 경향을 띤 부류들까지 근 본주의자로 부르게 되었는데 1940년대부터는 전통적이 고 과격한 회교도를 이슬람 근본주의자(Islamic fundamentalist)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 용어는 이슬람 근본주의 자들 자신이 스스로 붙인 명칭이 아니고 비이슬람 세계, 특히 영어권에서 붙여 준 이름이다. 이외에도 영어권에 서는 무슬림 근본주의자(Muslim fundamentallist) 또는 이슬 람주의자(Islamisst라는 이름도 사용한다. 반면에 보통 신 자를 지칭할 경우에는 종래와 같이 회교도(Musims)라 부른다. 최근에는 근본주의 대신 원리주의라고도 한다. 근본주의는 아랍어로는 우술리야(usuliya)로 번역되지 만 이 명칭보다 무슬림 세계에서는 '이슬람 부흥(nahda, 재 생) 운동' 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운동은 구미 열강이 중근동에 진출한 이후 전통 이슬람이 외압 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내부적으로도 부패 · 무능하 여 파탄을 가져온 데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본래의 이슬람으로 돌아가자' 와 같은 구호에서 보듯이 개혁적인 성격이 강하다. 곧 이슬람의 근본인 코란에 입 각하여 해석상 하자가 없으면 수용된다는 입장으로 이슬 람 역사 속에 나타나는 다른 개혁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본래로 돌아가는 것' 과 현재의 '시대적 요청' 을 조화시 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 인물〕 이븐 한발 (Ahmad Ibn Hanbal, +855) : 근 본주의 입장에서 시작된 최초의 운동은 아흐마드 이븐 한발이 이끈 반(反)무타질라파 투쟁이다. 당시 집권자 압바시아 왕조(750~1258)의 할리파(예언자 무함마드의 후계 자 겸 세속 통치자) 마문(al-Ma'min, 813~833)은 무타질라파 교의를 국교로 삼았다. 무타질라파는 신(神)의 말씀인 코란은 창조되었다는 '코란 창조설' 을 내세웠다. 코란이 창조된 신의 말씀이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다르게 창조될 가능성이 있고 신의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예 : 할리파)도 그 구절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으며 심지어 수정 또는 보 완할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코란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존재한 것이라는 교의도 있었다. 코란이 태초 에 있었다면 그것은 신의 속성(屬性)이어서 변경될 수 없다. 즉 이 경우에 코란의 최종 해석은 이슬람 율법의 전문가 즉 종교 학자들의 몫이 되어 할리파와 그 측근에 게는 별관계가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할리파는 모든 지 도층 인사들에게 코란 창조설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이때 이븐 한발은 단호히 거절하고 무타 질라파의 코란 창조설을 '비다' (bidah, 변혁) 즉 이슬람 전통에 없는 새로운 이색적 요소라고 단정하고 저항했 다. 이에 무타질라파는 그를 미나(minah, 종교 재판)에 회 부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할리파 무타왁킬(alMutawakkil, 847~861)이 즉위한 후 다시 순니 이슬람이 국 교로 회복되자 그는 풀려났다. 이븐 한발은 순니 이슬람 의 4대 법학파 가운데 하나인 한발리파의 창시자로 그의 교설은 완고한 보수적 성향을 띠었다. 즉 코란과 순나(예 언자의 언행)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결코 비유적 해석은 하지 않았다. 또 예언자 무함마드의 교우(敎友, shahabah) 들이 후대의 어떠한 인물들보다 코란과 순나를 더 잘 이 해하고 실행했으며 그들 모두는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근본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데 크게 기여하 였다. 이븐 타이미야(Ibn Taimiyah, +1328) : 이븐 한발의 교 설은 후대에 영향을 미쳐 한발리파는 이슬람 역사에서 이슬람의 원리와 전통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게 되 었다. 그 주요 인물들 중에 하나인 이븐 타이미야는 십자 군 원정 시대 이후 혼탁해진 이슬람의 순수성을 회복하 고자 노력했다. 12세기에 그리스도교의 십자군 원정으 로 예루살렘 주변의 지중해 연안 등 이슬람 영역이 침식 당했고 또 13세기에는 몽고군이 이슬람 문명의 중심지 인 이란, 이라크를 정복하여 압바시야 왕조를 멸망시킨 후 할리파마저 처형했다. 그 결과 이슬람 역사상 처음으 로 할리파 없는 시대를 맞이하니 무슬림 세계는 크게 위 축되었다. 이러한 위기에서 이슬람의 명맥을 이어나갈 정치 세력은 곧 이집트와 시리아에 터를 잡은 맘룩국 (Mamluks, 1250~1517)뿐이었다. 한발리파의 이븐 타이미 야는 당시 이슬람이 정치 · 군사적으로 위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학과 문학상으로도 오염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수피(이슬람 신비주의) 사상, 범신론, 사변적 신 학(kalam), 철학 및 미신 등으로 이슬람이 타락되었다고 주장하고 오염되지 않은 건전한 선대(先代, salaf alsalihun)로 돌아가자고 역설하였다. 그의 이 운동은 살라 피(salafi) 운동으로 알려졌는데 예언자의 교우 세대나 그 계승 세대의 생각이나 관행이 법학파나 신학파의 세계적 논증이나 연혁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즉 초창기의 이슬람 공동체는 순수하여 이슬람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 으나, 후대에 들어와서 많은 것이 신학과 종교적 관행 속 에 섞여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러한 주장 때문에 여러 번 옥고를 치르다 결국 옥 사했다. 와합(Muhammad Ibn Abdal-Wahab, +1792) : 이븐 한발 이나 이븐 타이미야에게는 수많은 추종자가 있었지만, 정치 세력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아라비아 반도에서 활약한 한발리파의 와합은 정치와 종 교를 일체(一體)로 보았고 그의 사망 후 추종자는 현 사 우디아라비아의 전신인 와하비 국가를 세우는 데 성공했 다. 그는 당시 만연하고 있는 수피의 성인 숭배 의례와 관행뿐만 아니라 이성을 지나치게 활용하는 사변적 신학 을 배척하고 오직 코란과 하디스의 권위만을 인정했다. 즉 이븐 한발과 이븐 타이미야의 신학과 법학 사상을 계 승 발전시킨 것이다. 하디스란 곧 예언자와 그의 교우들 의 관행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와합의 하디스 중시 사 상은 초기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구호와 동일하다. 이들 세 사람의 근본주의적 입장은 유럽 세력이 중근 동으로 확대 팽창하기 이전에 무슬림 세계 내부에서 자 생한 것이다. 비록 세 사람 모두가 이슬람 초창기로 돌아 가자고 주장했지만 그 핵심에는 제각기 자기 시대에 오 염 또는 부패한 이슬람을 개혁해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 다. 단지 이슬람은 시작부터 흠이나 티가 전혀 없는 완 전, 완벽한 것으로 믿기에 감히 개혁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없었다. 특히 와하비 운동은 유럽 문물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전근대적 개혁 운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와 유럽식 개혁주의〕 19세기 초에서 20세기 전반기에 이르는 150년 동안 유럽 문화가 중근 동으로 물밀듯이 들이닥치자 무슬림들이 받은 충격은 매 우 컸다. 특히 아라비아 반도의 와하비 운동, 19세기 말 수단의 마흐디 운동 등은 이미 무슬림 사회 내부에서 개 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나타난 것이어서 새로운 유럽 문화의 충격은 오히려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유럽 문화를 수용하여 무슬림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은 너무나 당연시되어 국가, 사회 단체 및 교육 기관 등 공공 기관을 비롯하여 지식인, 관료, 군인, 학생 등 모든 사회 구성원에 이르기까지 '개혁' 즉 서유럽 문물 과 제도의 수용과 모방에 급급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 날까지 150년 간에 걸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유럽과의 격차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넓어지는 상황에 처하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서유럽식 개혁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은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와 더욱 날카로워졌고 그 활약도 두드러졌다. 근본주의자들은 유럽의 물질 문명은 받아들이지만 그 정신 문화와 사회 제도를 모방하는 수 고는 이제 그만두고 이슬람 고유의 신학과 사상에 바탕 을 둔 정치 · 사회 제도로 돌아가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20세기 전반기의 근본주의 운동을 계승, 발전, 확산시켰 다. 현대적 의미의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 진한 세력은 '무슬림 형제단' (al-Ikhwan al-Muslimin)이다. 이집트의 청년 교사 하산 알 반나(Hasan al-Banna, +1949) 가 1928년에 조직한 이 형제단은 이집트의 이슬람적 사 회 여건에 서유럽식의 자유 민주주의 정치 이론은 적합 치 못한 주장이라 단정하였다. 이 형제단의 이념은 와하 비파의 순수 이슬람에서 영감을 이끌어냈다. 약 10년 뒤 마우두디(Abu I-A'Ia Maududi, +1979)는 '자마 아테 이슬 라미' (Jama at-e Islami)라는 이슬람 협회를 만들어 인도에 서 유사한 운동을 폈다. 그러나 이들은 이집트나 인도와 같은 낙후된 국가에서 활동했고 당시 성황을 이루었던 독일의 나치와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의 영향을 받았으므 로 그 조직은 민주적이라기보다 지도자 중심이었다. 특 히 무슬림 형제단은 1939년에 정치 조직으로 재편성하 여 팔레스티나 땅에 이주하는 유대인들에 대항했으며 1948년 제1차 아랍 · 이스라엘 전쟁에서 아랍측이 패하 자 투쟁 목표를 부패한 이집트 왕정 타도로 바꾸었다. 결 국 국내가 소란해지자 1948년 형제단은 해체되고 창시 자 하산 알 반나는 암살당했다. 그 결과 형제단은 지하 활동을 전개하여 이집트 사회는 더욱 혼란되고 변혁 분 위기가 조성되었다. 마침내 1952년 낫셀이 이끈 자유 장교단이 쿠데타로 왕정을 타도하고 아랍 민족주의를 내 세우자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형제단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주의는 이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인종주의며 또 외래적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소강 상 태에 있다가 1970년대 말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 하자 더욱 기세를 올렸다. 처음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 들이 이란과 같은 큰 무슬림 국가에서 정권을 장악한 것 이다. 그 결과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이라크와의 8 년 간의 전쟁에도 근본주의자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여전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시리아에서는 1978~1982년에 걸쳐 전국 각지에서 무슬림 형제단의 반체제(反體制) 테러 활동으로 소란했으며, 또 1982년 초 제3의 대도시 하마 시(市)에서 일어난 폭동은 2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도시 건물 3분의 1 이상이 파괴될 정도였으나 곧 진압되었다. 1981년의 사다트 이집트 대 통령의 암살 등 다수의 테러 행위도 형제단에 의한 것으 로 보인다. 요르단에서는 국내 소요 사태를 진정시킬 목 적으로 모든 정치 세력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1989년 4 월 총선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자들 이 80개 의석 중 36석(45%)을 차지하여 주목을 끌었다. 또 알제리에서도 근본주의 정당인 '구국 전선' (FIS)이 1992년 총선에서 집권당인 '민족 해방 전선' (FLN)을 누 르고 대승하자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구국 전선을 해 체시켜 정국이 극히 불안한 상태에 빠졌다. 그 외에도 튀 니지에는 1983년 식량 폭동 이후 대량 실업과 극심한 생활고가 원인이 되어 이슬람 근본주의 특히 '나흐다' (nahda, 부흥)라는 극렬 단체가 활발히 활동했으나 튀니 지 정부의 단속으로 현재는 약화되었다. 수단은 정부가 근본주의 정책을 상당히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992년 현재 그 세력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결론 및 평가〕 근본주의적 보수 전통 이슬람 운동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이름, 목표 및 양상은 다양하지만 '비다(변혁)를 반대하고 원초적 이슬람으로 돌아가자' 는 데는 그 맥을 같이한다. 이 전통을 최근의 근본주의 운동 도 고수하고 있다. 즉 코란과 예언자의 언행이라고 믿는 순나(Sunnha, 慣行)의 불가침성을 강조하고 신의 통치만 이 완전하고 사람의 통치는 불완전하다는 주장이다. 따 라서 민주주의적 결정도 항상 이슬람 시각에서 제동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이다. 또한 이슬람 근본주의는 매우 토착적이어서 외래적인 것을 배척한다. 물론 이 특성에 현대 자연 과학과 수학은 해당되지 않는다. 이슬람과 자 연 과학은 서로 전혀 모순이 없으며 오히려 보완적이라 는 입장을 취하지만 외래적인 사회 과학 특히 정치 사상 과 사회 제도는 경원시(敬遠視)한다. 이 점은 이란 이슬 람 혁명 정부의 국내 정책이나 정부 주도의 사회 분위기 에서도 엿볼 수 있다. 특히 서유럽의 문물에 매료되어 서 방적인 것을 찬양하는 현상을 서방 중독증(gharb-zadegi) 이라 부를 정도이고 이에 맞서는 것이 곧 토착 사상이라 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란 외교 정책의 구호인 '비동비 서' (非東非西)라는 표현 속에서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독자적인 이슬람이라는 뜻이 은연 중에 들어 있다. 심지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이슬람과 외래 사상과의 융화도 철저히 배격한다. 그 좋은 예가 파키스탄의 총리 부토(Z.A. Bhutto, +1977)가 내세운 "우리의 종교는 이슬 람, 우리의 정치 제도는 민주주의, 우리의 경제 목표는 사회주의"라는 소위 이슬람 사회 민주주의의 외침에 대 하여 "이슬람은 목발이 필요 없다"는 단 한마디로 거절 한다. 즉 이슬람 체제와 제도는 완벽하고 포괄적이어서 다른 사상의 도움이 필요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들은 정통성만 강조하지 독창성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의 이슬람 우월주의적 태도는 여러 가지 특색을 보이고 있다. 첫째, 서양의 문화 척도가 이슬람에 적용될 수 없다고 언급하면서도 항상 서유럽 가치관을 의식하고 그에 반대하여 행동한다. 이것이 바 로 새로운 사상에 무관심하여 무슬림 사회 안팎의 도전 에 전혀 반응이 없는 전통적 무슬림과는 구별되는 점이 다. 둘째, 완전한 이슬람은 국가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는 논리이다. 즉 주민의 다수가 무슬림이면 무슬림 국가 라 할 수 있지만 이슬람 국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슬람 을 국가 이념으로 하지 않는 국가는 무슬림 국가는 될 수 있지만 이슬람 국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논리는 이란 의 이슬람 혁명 이후 매우 강화되었다. 셋째, 다당제(多 黨制)를 반대한다. 이미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이 다당 제를 반대하는 정강을 내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란 이슬 람 공화국에는 1983년 이후 집권당인 이슬람 공화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불법화되었고, 1987년에는 집권당 마저 자진 해체되어 무정당 국가가 되었다. 즉 신(神)은 선출의 대상이 아니고 복종의 대상이라는 논리 때문이 다. (→ 이슬람) ※ 참고문헌  Abdelwahab El-Affxndi, Turabis Revolution : Islam and Power in Sudan, London, 1991/ Sydney E. Ahlstorm,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New Haven, 1972/ Khalid Duran, Iran Ten-YearReich of Ayatollah Khomeini, Intemational Report, vol. 7 ; No. 3. Irvine, California, 1989/ 一, Islam und Politischer Extremismus, Hamburg, 1985/ Hamid Enayat, Modern Islamic Political Thought, Austin, 1982/ Abdallah Laroui, The Crisis ofArab Intellectuals, Paris, 1974/ Ernest E. Sandeen, The Roots of Fundamentalism : British and Millenarianism 1800~1930, Chicago, 1970/ Saeed Sheikh ed., Studies in Iqbal's Thought andArt, Lahore, 1972/ W.M. Watt, Islamic Fundcmentalism and Modemity, London & New York, 1988. 〔金定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