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리 본당

金寺里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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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리 본당의 옛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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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리 본당의 옛 모습.


대전교구 소속 본당. 충남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 334 소재. 1901년 4월 27일 공주 본당에서 분리 설립되었으 며, 주보는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관할 구역은 구룡 면, 내산면, 외산면 지역이고, 관할 공소는 만수리 · 용 당 · 화성 · 동방 등 12개소. 〔교 세〕 1902년 882명, 1910년 1,510명, 1924년 1,388명, 1949년 1,008명, 1960년 2,174명, 1970년 1,016명, 1979년 1,104명, 1983년 1,299명, 1993년 857명. 〔역대 신부〕 초대 공 베르(J. Gombert, 孔安世) 줄리앙(1901.4~1923. 5), 2대 박 동헌(朴東憲) 마르코(1923. 5~1924), 3대 정규량(鄭圭良) 레오(1924~1928), , 4대 이여구(李汝球) 마티아(1928~ 1937), 5대 신인균(申麟均) 요셉(1937), 6대 김영식(金 永植) 베드로(1937~1938), 7대 프로망투(E. Fromentoux, 包萬壽) 에밀(1938~1939.5), 8대 김인상(金寅相) 야고보 (1939. 5~1948), 9대 몰리나로(J. Molinaro, 모) 요셉 (1948~1950), 10대 생제(P. Singer, 成載德) 베드로 (1950~1953), 11대 신종호(申宗浩) 요셉(1953. 10~12), 12대 김영환(金英煥) 타대오(1953. 12~1955), 13대 제제 구(R. Jézégou, 최세구) 로베르(1955~1961), 14대 김영환 타대오(1961~1962), 15대 김동억(金東億) 바오로 (1962~1964), 16대 김영곤(金榮坤) 필립보(1964~1966), 17대 올리비에(J.Olivier, 오일복) 요한(1966~1967), , 18대 윤예원(尹禮源) 토마(1967~1969) , 19대 텔리에(J.O.Tellier, 태) 요한(1969~1972), 20대 여충구(呂忠九) 마르 코(1972~1974. 11), 21대 송갑의(宋甲儀) 요한(1974~ 1977. 2), 22대 박종우(朴鍾禹) 안드레아(1977. 2~1982. 3), 23대 박연호(朴淵鎬) 요한 보스코(1982. 3~1985. 8), 24대 김진화(金鎭和) 바오로(1985. 8~1986. 4), 25대 정 용택(鄭鏞澤) 요한(1986. 4~1991. 4), 26대 유인성(劉寅 成) 프란치스코(1991.4~8), 27대 강석준(姜錫俊) 미카엘 (1991. 8~1992. 3), 28대 성병렬(成炳烈) 야고보(1992. 3~ 현재). 〔공소 시대〕 부여 지역은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 파되어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전후해서는 이 미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웃의 공주 · 청양 · 논산 · 서천 등과 같이 신자 가 많지 않았으므로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몇몇 순교자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큰 박해를 받지 않았 다. 그러다가 박해가 끝난 뒤 주변 지역의 신자들이 이곳 으로 이주해 오면서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 였는데, 그중 가장 먼저 신자들이 정착한 곳은 청양의 산 간 지대와 가까운 부여군의 은산면 · 외산면 · 내산면 지 역이었다. 박해 후 이 지역을 처음 방문한 두세(Doucet, 丁力彌) 신부와 '양촌 본당' (陽村本堂, 현 구합덕 본당의 전신)의 퀴를리에 신부도 바로 이 지역에 나마리 공소(현 은산면 羅嶺里의 羅馬里), 도앙골 공소(현 내산면 金池里), 여 내골 공소(외산면 前場里) 등을 설립하였다. 구룡면에서 처음 설립된 공소는 1891년에 설립된 고당 공소(구룡면 龍塘里의 姑堂)였다. 이 공소들은 1897년 6월부터는 양촌 본당에서 신설 '공주 본당 (公州本堂)으로 이관되면서 기낭(Guinand, 陳 普安) 신부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공주로부터 거리가 멀었을 뿐만 아니라 공소나 신자수도 점차 증가 하는 추세였으므로 기낭 신부는 이곳에 본당을 신설해 주도록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요청하였 고, 그 뒤를 이어 공주 본당을 맡게 된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신부도 같은 요청을 하였다. 또 소양리(금사리 의 金陽里)의 손우기, 윤영식 등은 1900년에 상경하여 위텔 주교에게 본당 설립을 건의하였으며, 파스키에 신 부도 이듬해 초에 다시 한번 이를 요청하였다. 그러는 동 안 부여 지역에는 손사(외산면 佳德里의 遜沙), 갈덕리(옥산 면 加德里), 상터 공소(외산면 花城里), 벌말 공소(은산면 長 閥里), 기막내 공소(외산면 화성리), 소양리 공소(금사리 본 당의 전신) 등이 신설되었다. 〔본당 설립과 정착〕 뮈텔 주교는 1900년에 있은 신자 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부여 지역에 본당을 신설할 것을 결심하고 이듬해 4월 27일, 연례 피정이 끝남과 동시에 1900년 10월 9일에 입국하여 한글을 배우고 있던 공베 르(줄리앙) 신부를 부여 지방에 파견하였다. 공베르 신 부는 이때 파스키에 신부와 함께 군산을 거쳐 서천 용아 실(현 서천군 마서면 德岩里의 龍臥谷) 공소와 부여 갈덕리 공소에 머무르면서 본당의 중심지를 물색하였다. 처음 공베르 신부가 정착하고자 한 곳은 갈덕리나 규암(현 부 여군 규암면)이었으나, 마침 소양리에 적당한 장소가 나타 나면서 이곳이 본당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처음 본당 의 이름은 당시의 행정 구역명을 따라 '홍산 본당' (鴻山 本堂) 또는 '소양리 본당 으로 불리었다. 당시 공베르 신 부가 매입한 것은 흉가로 여겨지던 가옥 3동과 대지, 논 과 산 등이었다. 이후 신자들은 공베르 신부가 고용한 중 국인 기술자와 함께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1906년 성당을 완공하고, 계속하여 사제관과 사랑채를 완공한 뒤 1913년 9월 2일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 졌다. 설립 당시 본당의 관할 구역은 충남 남서부 지역(부여 군 · 논산군 · 청양군 예산군 일부, 홍성군, 서산군 안면도, 보령 군, 서천군)이었으나, 1908년 구합덕 본당에서 '수곡 본 당 (水谷本堂, 서산 본당의 전신)이 분리되면서 서산군 지 역을 새 본당으로 이관하였다. 이후 공베르 신부는 23년 간을 본당에 재임하면서 성당 시설을 완비하는 한편 전 교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02년 17개 공소에 신자수 882명이던 것이 이듬해에 이미 1,000명 이상으로 증가하였으며, 1923년에는 26개 공소에1,644명을 기록하였다. 〔분할과 변모] 그 후에도 본당은 어느 정도까지 성장 을 계속하게 되었지만, 본당 신부가 자주 교체되고 본당 의 분할로 관할 구역이 축소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우선 제3대 정규량(레오) 신부는 1924년에는 성당 사랑채에 2년제 '계명 여자 학술 강습회' 2학급을 신설하여 주민 교육에 공헌하였고(1932년까지 지속), 4대 이여구(마티아) 신부는 청년회를 조직하여 개척 사업에 헌신하였다. 또 이 신부는 성당 지붕을 개량하고, 1936 년 '서천 본당' (舒川本堂)을 분리하였으며, 6대 김영식 (베드로) 신부는 목조 초가 수녀원을 건립하고, 부인회 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서천 본당의 분할로 본당의 관할 구역은 크게 축소되었으며,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해 교 세가 크게 늘지 않게 되었다. 서천 본당은 6년 뒤인 1942년 '장항 본당' (長項本堂)의 설립과 동시에 그 공 소로 격하되었다. 그 후 본당 신자들은 6 · 25 동란을 맞이하여 본당 신 부를 잃게 되었다. 이때 제9대 몰리나로(요셉) 신부는 성당과 부속 건물이 몰수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성당을 지키다가 1950년 8월에 체포되었고, 대전으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9월 26일 대전 프란치스코 수도 원 지하실에서 총살당하였다. 그 결과 당시 논산 본당에 있던 생제(베드로) 신부가 본당의 제10대 주임을 겸하 여 신자들을 돌보게 되었다. 12대 김영환(타대오) 신부 는 성당에 전기를 시설하고 안나회를 조직하였으며, 삽 티 · 역말 · 논티 공소를 신설하고, 성모 동고상과 성 사 베리오 동고상, 14처상을 마련하였다. 또 신자들은 규암 공소의 신자들과 함께 성당 건립에 노력하여 1955년 9 월에는 규암 본당(窺岩本堂)을 분할하게 되었다. 이어 본당에 부임한 13대 제제구(로베르) 신부는 8개 의 공소를 신설하는 한편, 외국 보조금으로 이들 강당 8 개를 건립하였다. 또 사제관과 성당 내부를 수리하고 곳 곳에 교리반을 조직하여 많은 영세자를 탄생시켰으며,1955년 홍산에 새 부지를 매입하고 1957년부터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5월 이를 완공함과 동시에 '홍산 준본당' (鴻山準本堂)을 분리 신설하여 그 초대 주 임을 겸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본당의 신자수는 1960년 말에 이르러 설립 이후 가장 많은 숫자인 2,174명을 기 록하게 되었지만, 이후 홍산 본당의 분리로 인해 다시 교 세가 축소되었다. 그러다가 15대 김동억(바오로) 신부 가 부임하여 침체되어 있던 청년회를 재발족시키고, 성 모 동고상을 건립하는 한편 보(洑)를 완공하여 농업 용 수를 확보하였다. 또 18대 윤예원(토마) 신부는 1967년 부임 후 새 성당 건립에 노력하여 1968년 9월 12일 현 재의 성당을 완공하였다. 아울러 본당은 이후 신부가 자 주 교체되지 않음으로써 안정을 찾게 되었지만, 1970년 대에 들면서 점차 신자수가 줄어들어 현재에 이르고 있 다. (->대전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천주교 대전교구, 《대전교구 30년》, 1988/ 천주교 대전교구,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 한국교 회사연구소, 1994.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