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림리 본당
箕林里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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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평양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평안남도 평양시 기림리 소재. 1940년 1월에 설립되었으며, 관할 지역은 평양시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림리 일대. 〔역대 신부〕 초대 클리어리(Parick Cleary, 吉) 파트리치오(1940. 1~1941. 12) , 2대 김교명(金敎明) 베네딕도(1942. 5~10), 3대 홍도근 (洪道根) 요한(1943. 4~1944. 3, 1944. 11~1945. 10), 4대 한 도준(韓道俊) 마태오(1945. 10~1946.9), 5대 조문국(趙文 國) 바오로(1946. 9~1948. 9), 6대 이재호(李載虎) 알렉시 오(1948. 10~1949. 12) 〔설립 및 발전〕 기림리 본당은 평양교구 주교좌 본당 인 관후리 본당이 날로 대형화되면서 본당 분할의 필요 성이 대두되었고, 또 평양권(平壤圈)이 확대되면서 장차 평양 서부 지역이 발전될 것으로 예측되어 설립하게 되 었다. 성당은 본래 요양원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모란봉 〔牧丹峰〕 바로 밑 언덕에 위치하였다. 초대 본당 신부는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클리어리 신부였으나 태평양 전쟁 으로 부임 2년 만에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하게 되어, 1942년 5월부터는 한국인 성직자들이 본당 사목을 이어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부임해 온 김교명(베네딕도) 신부가 5개월 만에 진남포 본당으로 옮겨 감으로써 기림 리 본당은 클리어리 신부 추방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본 당 신부의 공백기를 맞아 인근 관후리 본당에서 관할할 수밖에 없었다. 1943년 4월 교구 내 성직자 증원에 따 른 인사 이동으로 부임한 홍도근(요한) 신부는 일제의 종교 탄압이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도 교회의 안전과 신 자들의 자립성을 기르는 데에 전념하였으며, 남녀 청년 회를 비롯한 부인회, 성모 성심회, 탈시시오 복사회 등 각종 신심 단체를 조직하여 신자들이 끗끗하게 신앙 생 활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1945년 10월, 홍 도근 신부는 영유 본당으로 전근되고 한도준(마태오) 신 부가 부임하였다. 한 신부는 기림리 본당 외에도 순천 (順川), 관후리 등 이웃 본당의 사목 활동까지 겸하여 매 월 일정 기간 이웃 본당과 소속 공소를 순회하며 성무를 수행하였다. 1946년 9월, 한도준 신부가 강계(江界) 본 당으로 전임되고 조문국(바오로) 신부가 주교 비서와 경 리 담당 겸임으로 기림리 본당에 부임, 각 신심 단체의 지도에 사목의 중점을 두고 사제의 손길이 자주 닿지 않 아도 되는 자율적인 신심 활동을 통해 본당의 활성화를 꾀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48년 가을 진남포로 옮겨간 조문국 신부 대신에 이재호(알렉시오) 신부가 부임하여 날로 혹심해지는 공산 정권의 박해 속에서도 조심스럽게 선교를 비롯한 교회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그러나 1949년 12월에 정치 보위부 요원들에 의해 연행됨으로 써 기림리 교회는 침묵의 교회로 변하고 말았다. 본당 출 신 성직자로 백민관(白敏寬, 테오도로) 신부와 임태경 (任泰景, 루가) 신부가 있다. (→ 평양교구 ; 침묵의 교 회 ; 관후리 본당) ※ 참고문헌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天主教平壤教區史》 분도출판사, 1981. 〔편찬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