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일기》

己亥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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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활판으로 인쇄한 《기해일기》 초간본.

1905년 활판으로 인쇄한 《기해일기》 초간본.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죽임을 당한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자전. 1846년 병오박해(丙午迫害) 때 순 교한 현석문(玄錫文, 가롤로)이 편찬하였다. 그러나 그 작업은 이미 1838년 말부터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Imbert, 范世亨) 주교에 의해 시작되었고, 현석문이 순 교 일기를 완성한 뒤에는 제3대 교구장 페레올(Fereol, 高) 주교가 이를 보완하였다. 〔편찬 과정] 이 책을 편찬하게 된 동기는 1836년 조선 에 입국하여 활동하던 앵베르 주교가 1838년 말 박해가 일어나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자 이들의 사적을 기록하 기 시작한 데 있다. 이때 그는 같은 해 12월 31일부터 자신이 체포되기 3일 전인 1839년 8월 7일(음 7월 2일) 까지의 순교 사적을 수기 형태로 기록하여 <1839년 조 선 서울에서 일어난 박해에 관한 보고>(약칭 '1839년 서울 박해 보고서' )라 명명하였으며, 이 보고서는 9월 6일 모방 (Maubant, 羅)과 샤스탕(Chastant, 鄭) 신부에 의해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내졌다. 훗날 다블뤼(Daveluy, 安敦 伊) 주교는 이 앵베르 주교의 보고서를 자신의 비망기 기록에 인용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추가하거나 중국식 발 음으로 기록된 고유 명사를 모두 조선식 발음으로 교체 하였다. 이 기록을 마치기에 앞서 앵베르 주교는 몇 개월 전부터 자신이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정하상(丁夏祥, 바 오로)과 현경련(玄敬連, 베네딕다)에게 순교자들의 사적 을 면밀히 조사하여 정리하는 일을 계속하도록 하였으 며, 이문우(李文祐, 요한) · 최영수(崔榮受, 필립보) · 현 석문 등에게도 같은 임무를 맡겼다. 예상대로 앵베르 주교는 8월 10일 자신을 찾아다니는 포졸들에게 스스로 체포되는 몸이 되었고, 9월 21일에 는 모방 · 샤스탕 등 두 선교사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리 고 정하상 · 현경련 · 이문우 등도 1839년에 모두 순교하 였다. 이때부터 현석문과 최영수는 주교의 명대로 산간 벽지를 돌아다니며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정리하 기 시작하였는데, 1841년 8월 최영수가 순교한 뒤에는 현석문이 전적으로 이 일을 맡게 되었다. 현석문은 이후 이재의(李在誼, 토마)와 최 베드로의 협력을 얻어 전후 3년 동안 교우들로부터 모아들인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 하여 기해박해 순교자전을 완성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원본 《기해일기》이다. 그 후 1845년 조선에 입국한 페레 올 주교는 이를 입수하여 그 내용을 다시 검토하고, 1846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로 순교한 김대건(金大 建, 안드레아) 신부와 현석문 등의 전기까지 추가로 수 록하여 1847년 '증보판 《기해일기》 를 완성하였다. 이 증보판은 본래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로 기록한 것을 홍 콩에 있던 최양업(崔良業, 토마) 부제가 라틴어로 옮겼 는데, 그 이름은 "1839년과 1846년 조선 왕국에서 발생 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 교자들의 전기, 현 가롤로와 이 토마가 수집하고, 벨리나 (Bellia, 페레올 주교의 명의) 주교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 을 최 토마 부제가 라틴어로 옮긴 것"이었다. 이처럼 최 부제는 페레올 주교의 증보판에 현 가롤로와 이 토마 수집' 이라고 전제함으로써 이것이 원본 《기해일기》와 별 개의 것이 아님을 명시하였다. 〔간행과 내용〕 《기해일기》 원본은 그 후 박해가 계속 되면서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그 사본이 전해져 오게 되었고, 제8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뮈텔(Mutel, 閔德 孝) 주교가 순교자의 자료를 수집하던 중 1904년을 전 후하여 우연히 한글로 된 《긔히일기》 한 벌을 입수하게 되었다. 당시 뮈텔 주교는 그것이 원본 《기해일기》인지 알 길이 없고,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던 탓에 첫 장과 끝 의 몇 장이 다 썩어 버려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 구하고 다른 완전한 것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1905년에 이를 활판으로 출판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여러 사람 들에 의해 필사되어 오면서 일부가 수정되거나 새로운 사실이 첨부되었을 것이다. 1905년에 간행된 《긔히일기》는 모두 246면에 달하는 데, 위텔 주교의 서문에 이어 원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총론과 순교자의 일기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편 현존하는 필사본으로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의 《긔히일기》와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의 상 · 하권 《긔히일기》가 있는데, 전자는 1885년 4월 25일에 로베르 (Robert, 金保祿) 신부가 79위 시복을 위한 자료로 사용 하기 위해 필사한 것이고, 후자는 1905년의 활판본 간 행을 위해 다시 필사된 대본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긔히일기》가 《귀히년일기》를 필사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음으로 필사본 《긔히일기》에 수록된 기해박 해 때의 순교자 수는 78명이었으나 페레올 주교의 증보 판 《기해일기》에서는 그중 6명을 제외한 72명만을 수록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후자에는 서문과 본문 사이에 조 선의 형벌과 감옥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 있는데, 이 사실 들은 시복 수속을 염두에 두고 신중을 기해 작성한 때문 이었다. 본래 현석문이 수집 정리한 순교자 수는 사형을 당한 숫자가 54명, 옥사한 순교자가 60여 명으로 도합 114명 이 넘었으나, 《긔히일기》에는 78명의 순교 사기만이 들 어 있다. 필사본 《에서는 이 순교자들의 행적을 연 · 월 · 일순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옥사자를 따로 묶어 끝 부분에서 다루거나 한 집안인 경우에는 순교일 에 관계없이 함께 다름으로써 일기체와 열전체(列傳體) 를 혼합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78명은 거의 모두가 기해 년에 순교한 사람들이었고, 그중에 남자가 28명, 여자가 50명으로 대부분이 서울에서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지방의 순교자들을 소홀히 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른 기록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순교자들의 전기 대부분이 목격 증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고 있고, 여기에 수록되어 있 는 78명의 순교자 중 1925년 7월 5일 복자위에 오른 순 교자의 수가 69명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 순교 사적이 매우 정확했음을 뒷받침해 준다.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가톨릭 사전》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 《긔히년일기)(필사본)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긔히일기》 (필사본)/ 山口正之, 〈朝鮮基督教史料 己亥 日 記〉, 《青丘學叢》 1, 1930/ 崔奭祐, <기히일기의 몇 가지 문제점>, 《司牧》 43호(1976), 한 국천주교중앙협의회.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