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홍균(1931~1988)
吉鴻均
글자 크기
2권

길홍균 신부.
수원교구 신부. 세례 명은 이냐시오. 길병덕 (요셉)과 박점희(마리 아)의 5남매 중 둘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뛰 어난 영어 실력으로 인 해 1953년 6월 21일 한국군 통역 장교 중위 로 임관하였으나 이듬 해 5월 폐결핵을 앓기 시작하여 1956년 10월 30일 전역할 때까지 육 군 병원을 돌며 투병 생 활을 하였다. 1957년 12월 24일 김홍섭(金洪燮, 바오로) 판사를 대부로 영세 하고, 1958년 1월 20일부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의 번역자로 활동하다가, 1960년 9월 4일에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원 선서를 하였다. 1962년 3월 6일 광주 살레 시오 수도회에 입회하여, 1964년 2월 첫 서원을 한 후 가톨릭대학에 입학하였다. 1970년 2월 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2월 8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어 살레시오 신 학원에서 활동하다가 1973년 10월 15일 로마 교황청립 살레시오 대학원(Pontificio Ateneo Salesiano)에 유학하여 1975년 6월 21일 영성신학(靈性神學) 석사 학위를 취 득하였다. 귀국 후 광주 사레지오 중고등학교에서 약 1 년 동안 생활하였고, 1978년까지 대건신학대학(大建神 學大學, 현 광주 가톨릭대학)에서 한국인의 심성에 맞는 영 성을 계발, 신학생들에게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부제 때인 1971년 11월부터 지도하기 시작한 성 소 모임을 로마 유학에서 돌아온 후 다시 맡아 지도하였 다. 그리고 수원교구장 김남수(金南洙, 안젤로) 주교의 창립 허가를 받아 1979년 5월 1일 한국 최초의 재속 자 매회 '무염 조력 성모회' (無染助力聖母會) , 5월 24일에 는 재속 형제회 '예수의 성대건회' (聖大建會)를 창립하 였다. 이어 6월 30일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수원교구로 이적하여 한국 외방선교회 지도 신부 겸 구산(龜山) 본 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본당 사목뿐 아니라 성지 개발에도 주력하여 김성우(金星禹, 안토니 오) 성인의 순교비를 건립하고, 구산 순교자 7위의 가묘 (假墓) 및 김성우의 아내 평택 방씨(平澤 方氏) 묘의 비 석을 건립하였다. 1984년 9월 18일 발안(發安) 본당에 부임하여서는 장주기(張周基, 요셉) 성인의 탄생지인 경 기도 화성군 양감면 요당리(京畿道 華城郡 楊甘面 蓼塘 里) 느지지 일대의 성역화를 추진하였다. 1985년 12월 31일 '예수의 성대건회' 를 수원교구장 으로부터 인가받고, 1986년 5월 6일 종신 서원을 하면 서 길홍균 신부는 '무염 조력 성모회' 의 창립에 동기를 부여했던 이춘덕(마리아)에게 자매회의 고유 권한을 이 양하고 지도 신부로 남았다. 이후 악화된 건강으로 1987년 9월 4일부터 수원 성 빈센트 병원 사제관에 머 무르며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를 지도하였고, 경 기도 하남시 서부면 감북리에 작은 집을 마련하여 '예수 의 성대건회' 현판을 달았다. 1988년 2월 24일 서부(西 部) 본당의 주임으로 전임되어 활동하던 중 4월 12일 후 두암으로 선종하였다. (→ 구산 본당 ; 발안 본당) ※ 참고문헌 《교회와 역사》 221호(1993. 10), 한국교회사연구 소. [尹善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