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정 (1898~1984)

金九鼎

글자 크기
2
김구정 .

김구정 .


한국 천주교회사가. 세례명은 이냐시오. 본관은 김해 (金海). 호는 지원(志園). 필명은 달성산인(達城山人). 김상연(金湘連, 바오로)의 셋째 아들로 대구시 신암동 715번지에서 태어났다. 1892년 신암동 공소를 설립한 아버지로부터 신앙의 지평을 넓혀갔고, 대구 지방의 민 족 운동과 노동 운동에 헌신했던 큰형 김하정(金夏鼎, 루가)으로부터 민족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 을 배웠다. 서울 용산 소신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성 유 스티노 신학교에 입학, 1919년 3월 만세 운동 당시 경 상북도 조직부장이었던 큰형의 영향을 받아 신학교 안에 서 만세 시위에 참가하고자 준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 였다. 그러나 학교 당국에 참가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었 고, 독립 운동을 정치 운동으로 오해한 프랑 스인 교수 신부들에 의 하여 정학 처분을 받고 근신하였다. 그러다가 그 해 9월 복학, 11월 23일 독서품을 받았으 나 이듬해 4월 그를 아 끼던 샤르즈뵈프(Char- geboeuf, 宋德望) 교장 신부가 갑자기 선종하 고, 2대 교장으로 페네 (Peynet, 裴嘉祿) 신부 가 부임한 후 퇴학당하 였다. 그 후 1923년 <조선 일보> 대구 지국장, 1925년 간도 용정 해성(海星)학교 부교장, 1927년 간 도 연길 팔도구 조양(朝陽)학교 부교장을 거쳐 1928년 부터 대구 남방 천주공교 청년회의 간부로서 <천주교 회 보>(현 <가톨릭 신문>)의 편집을 맡았고, 이어 1932년 평 양교구장 비서, 관후리 본당 전교사, 월간 《가톨릭 조선》 주간 및 《가톨릭 연구》 편집을 담당하였다. 1938년 만주 홍안남성(興安南城) 성길사한(成吉思汗)에서 효성(曉 星) 농장을 경영하는 한편, 효성국민학교를 설립하여 교 장으로 봉직하였다(1949년 폐교). 1941년부터 <만선일 보>(滿鮮日報) 치치하얼(齊齊哈爾) 지국장으로 근무하 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그 해 11월 귀국한 그는, 군산 여자고등학교 교감(1946), 군산대학 교수(1948)를 역임 하였고, 1951년 고향으로 돌아가 1956년 대구 대건고 등학교에서 강사 생활을 하였다. 1984년 5월 1일 노환 으로 사망. 1960년경부터 주재용(朱在用) 신부와 각별한 관계를 갖고 교회사 연구와 집필에 열중하였다. 순교자 연구에 평생을 바쳤으며 단순한 순교 정신의 탐구보다 민족사 안에서 그 가치를 밝히려 노력하였다. 《가톨릭 연구》에 <양제궁(良娣宮)의 가을>과 <선혈 비사 백서>(鮮血秘史 帛書) 등의 순교 사화를 연재하였고, <대구 매일신문>에 초대 교회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 <동방의 새벽>을 연 재하였다. 순교 자료 발굴에도 노력하여 1868년 울산에 서 순교한 김종륜(金宗倫, 루가)이 등사한 '이 누갈다의 옥중 서간' 을 학계에 소개하였다(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저서로 《가톨릭 유년 독본》, 《어린이 미사》, 《칠성사 풀 이》, 《피묻은 쌍백합》(1969), 《성웅 김대건전》(1961, 경향 잡지사), 《천주교 호남 발전사》(1964) 《천주교 경남 발전 사》(1967), 《영남 순교사》(1966), 《한국 순교 사화》(전 4 권, 1976), 《대구의 순교자들》(1981) 등이 있고, 역서로 는 《영혼의 성약(聖藥)》(1967)이 있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김구정, <교회사에서 내가 발견한 진귀한 사료>, 《가톨릭 청년》, 19권 6호(1965. 6)/ 崔奭祐, 《韓國天主 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天主教平壤教區區史》, 1981.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