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봉 (1914~1967)

金基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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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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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봉 신부.


부산교구 신부. 세례 명은 필립보. 본관은 연 안(延安). 신앙을 버리 라는 형제들을 피하여 황해도에서 내려와 김 제 수류(金堤 水流)에 정착한 김종서(金鍾瑞 혹은 成九, 시몬)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1914 년 8월 30일 태어났다. 8세에 진안 한들(大坪, 鎮安郡 馬靈面 延章里)로 이주하였고, 12세에 형 김기운(金基運, 토마 스)의 권유로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진학, 1938년 6월 11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후 구태인읍 본당(1938. 3~ 1939. 3), 이리 본당(1939. 3~1941. 5), 남원(南原) 본당 (1941. 5~ 1944)에서 사목하였고, 자원하여 만주(滿洲)로 건너가 안동 무순(安東 撫順)에서 전교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말기에 접어들자 일제의 압박은 더욱 극심해졌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이주하였다. 당시 무순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 지역이었는데 일제가 메리놀회 선교사들을 준적성(準敵性) 국민이라 며 추방하였으므로 이 지역의 사목은 평양교구에서 돕고 있었다. 만주에 이어 북경(北京)의 북당(北堂) 성당에서 사목하였는데, 중국이 공산화되고 북한에서의 종교 탄압 이 가속화되자 6 · 25 동란이 발발하기 직전 부산교구로 돌아왔다. 청학동(靑鶴洞)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성당 · 사 제관 · 수녀원을 신축하고,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의 수 녀들을 초빙하였으며, 강당을 신축하고 유치원을 설립하 였다. 이어 청학동에 인접한 신선동 3가 84번지에 30평 의 목조 건물을 마련하여 '성모 건설원' (聖母建設園)을 설립, 전쟁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6 · 25 동란 중 최후의 거점이었던 부산에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들 었고, 그런 중에 버려지거나 방황하는 아동들도 많이 생 겨났는데, 당시 신선동 3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부대 의 페트릭 데니어 특무 상사의 협조로 황무지 930평을 정리하는 한편 1954년 8월 11일 재단 법인 성모 건설원 을 인가받았었다. 1955년 1월 1일 신선동(新仙洞) 본당 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미군들의 협조를 얻어 이 듬해 11월 건평 60평의 성당과 사제관을 준공 · 축성하 였다. 이어 성모 건설원의 원사 2동(건평 78평)과 부속 건물 2동을 완공하여 40명의 원아를 수용하였다. 원아 들은 계속 증가하여 1956년 10월에는 70여 명이 생활 하였고, 1957년 5월 정부로부터 시설 기구의 원조를 받 았다. 또한 1958년 10월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의 원조로 광안동에 건평 250평의 새 원사를 신축, 이전하 였으며 이때부터 성모 건설원 운영에만 주력하였다. 1957년 8월 26일 대양중공업고등학교(大洋中工業高高 等學校)의 4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1960년 5월 13일까 지 교육 사업에도 헌신하였다. 특히 학교 내에 레지오 마 리애를 조직하여 전교에 주력함으로써 수많은 학생들을 영세시켰을 뿐만 아니라, 패트릭 데니어 특무 상사의 도 움으로 많은 통신 장비를 실습용으로 구비하여 학교 교 육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1963년 1월 정신 질환자 치료 와 성모 건설원 운영비 마련을 위해 성모 건설원 2층에 '성 필립 신경 정신과' 를 개설한 김기봉 신부는, 1967년 4월 6일 성모 건설원에서 숙환으로 선종하였다. 김기봉 신부의 사후 성모 건설원의 남아들은 이우철(李宇哲, 시 몬) 신부가 설립 운영하고 있던 '성심보육원' (聖心保育 院)으로 보내졌고, 여아들은 부산교구청에서 맡았다. (→ 신선 본당 ; 청학동 본당) ※ 참고문헌  《교회와 역사》 208호(1992. 9) .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