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호 (1824 ~ 1903)

金起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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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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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호.


구한말의 천주교 전 교 회장이요 교리서 저 술가. 명도회(明道會) 의 도회장(都會長, 총회 장). 세례명은 요한. 본 관은 김해(金海). 황해 도 수안군 무송동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글공 부에 힘써 15세 때 향 시(鄕試)에 합격하였 다. 이 무렵부터 인생 문제에 대하여 고민을 하였으며 한때 경향(京 鄕)의 유명 인사를 찾 아 교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중병을 앓게 된 것을 계기로 유 · 불 · 선 3교에 관심을 갖고 이를 가 까이하다가 천주교의 한역 교리서인 《성세추요》를 얻어 보고 천주교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의 교회 지도자인 홍봉주(洪鳳周, 토마)를 찾아가 교리를 배운 후 32세 때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베르뇌(Berneux, 張敬 -) 주교에게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고 천주교인이 되었 다. 입교 후 곧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전교에 힘썼으나 문중과 촌로들의 박해를 받게 되자 가족을 이끌고 황해 도 서흥(瑞興) 땅으로 옮겨가 그곳에 공소(公所)를 마련 하고 전교에 힘썼다. 이때부터 천주에 대한 믿음과 굳센 의지, 그리고 열렬한 전교 활동으로 명성을 얻게 되어 베 르뇌 주교에 의해 관서 지방의 전교 회장으로 임명되었 으며, 이후 베르뇌 주교의 복사(服事)로 임명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베르뇌 주교가 순교한 후에 는 홀로 각지를 전전하며 은밀하게 전교 활동을 폈고, 1876년 블랑(Blanc, 白圭三) 신부가 입국한 후에는 그의 명을 받아 강원도 각지에서 전교에 종사하였다. 다음해 리델(Ridel, 李福明) 주교,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 그 리고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를 비밀리에 조선으로 영입하고 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으며, 1878년 구령 의 기본 교리를 쉽게 풀이한 《구령요의》(救靈要義)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1882년 보좌 주교로 임명된 블랑 주교에 의해 평안도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한국 천주교회의 전국 회장 들을 대표하는 명도회의 도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883년 블랑 주교의 성성식을 계기로 일본과 중국 교회 를 시찰하였다. 1887년경에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 부의 지시로 교리 문답서인 《소원신종》(溯終)眞終)을 저 술했다. 이 교리서는 프와넬 신부의 표현대로 "우몽(愚 夢)한 사람들이 듣기 쉽고 알기 쉽게 지은 것" 으로, 천지 조성(天地造成), 천당 지옥(天堂地獄) , 원조 범명(原祖 犯命), 강생 구속(降生救贖) 칠성사(七聖事) 사후 심판 (死後審判)의 도리를 상세히 가르치고 있다. 1890년부 터 하우현(下牛峴, 지금의 경기도 의왕시)으로 은거하기까 지 10년 간 블랑 주교를 보좌하며 교회 일을 돌보았고, 전국의 회장들을 영도하였으며 새로 입국하는 프랑스 성직자들의 한국어 지도를 담당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회장 교육용 교리서를 편술하여 50여 일 간 전국 회장 교육을 담당하였고, 1891년에는 19권의 《성경직해광 익》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블랑 주교 사망 후에는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부임한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를 보필 하였다. 1901년 70세에 이르자 오랫동안 수행에 오던 회장직을 사임하고 하우현으로 은퇴하였다. 그는 죽음에 앞서 자신의 신앙 생활, 교회를 위한 헌신, 그리고 믿음 의 일생을 자서전적으로 기술한 《봉교자술》(奉敎自述) 을 지어 후손과 교우들을 위한 신앙 생활의 지침으로 남 기고 1903년 선종하였다. 그의 묘지는 청계산 응봉(淸 溪山 鷹峰)에 있다. 〔사 상〕 김기호가 작술한 여러 편의 책과 글(救靈要義, 溯源慎終, 教理問答, 避惡修善歌, 聖堂歌, 奉教自述) 가운데 그 의 천주 사상과 영성 생활을 살필 수 있는 글은 자서전적 글인 《봉교자술》이다. 이에 따르면 김기호는 유학에서 출발하여 유 · 불 · 선을 방황한 끝에 천주학으로 정착하 였다. 그의 천주 신앙은 유학의 천(天)을 토대로 수용된 것이었다. 곧 소박하나마 고유(古儒)들이 지녔던 순천 (順天)에 터전을 둔 것이었으며,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복으로 갚고 하늘에 죄를 지으면 다시 빌 곳이 없 다고 한 공맹(孔孟)의 가르침대로, 선을 행하는 천주교 신앙을 받들고 70 평생 오로지 천주만을 위한 삶을 실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천주 신앙은 고유 문화와 외래 문화의 조화에 의한 천주 이해, 동양 전통 사상과 외래 서양 사상과의 접합에 의한 승화였다. 따라 서 그의 천주 사상은 인간 당위론(人間當爲論)에 터전한 선의 실천과 그것을 위한 자수(自修) · 궁행(窮行)으로 서의 유교적 가치 추구는 아니었다. 그는 천주에 의한 인 간 창조, 천주에 의한 직분 수여, 그리고 천주에 의한 인 간 구원을 깨달아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천주교 교리 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선을 추구하였으며 선의 궁행을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김기호의 구원관은 천주께서 영혼의 기를 넣어 인간을 창조하시고, 천주를 알아 모실 수 있는 가능성을 누구에 게나 주셨기 때문에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는 천주를 알아 모시고 천주 신앙을 봉행할 수 있는 것은 천주의 은혜를 입어서 되는 일이지만 구령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발성과 개과 천선의 노력, 그리고 선의 궁행으로 공을 쌓아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구령 받고자 하는 자는 성삼위(聖三位)를 대월(對越)하고 그 은혜를 묵상해야 하며, 감사와 통회 그리고 기구의 3정(三情)을 항상 간직해야 한다고 믿었 다. 또한 십계의 가르침을 실천함은 물론 칠극(七克)의 인간적 노력이 따라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러기에 대 월 공부에 힘썼고 수계와 전교에 전신 전력을 다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영성 생활을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의 계 시와 구원 사업의 신비체적 차원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 며,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 나아가려는 삶으로 규정한 다면, 김기호는 바로 영성 생활의 실천자요 영성 사상의 체득자라 할 수 있다. 물론 신학자가 아닌 그에게 영성신 학적 논리를 기대할 수는 없으나 《봉교자술》에서 드러난 그의 천주교 신앙과 봉행 생활을 통해 소박하고 순수했 던 영성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입교하고 평 생 전교에 전심하게 된 일들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확신 하였으며,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펴기 위해 평신도 사도 직의 삶을 살았다.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확고한 믿음, 신비체의 한 지체라는 확신, 이를 실현하기 위한 헌신적 자수(自修)의 노력, 탁월한 지성과 지혜를 바탕으로 한 복음 선포 활동은 이 세상에서 이미 천주 구원을 체험했 기에 가능하였다. 그의 신앙적 빛의 생활은 혼배 수정(婚配守貞)과 은서 독수(隱棲獨修)의 엄격한 극기 생활에서도 돋보인다. 이 점에서 그는 옛 은수 수도(隱修修道) 영성을 익힌 수도 자였다고도 할 수 있다. 입교 후에 수정의 귀한 가치를 알고 거듭 주교에게 혼배 수정의 허가를 요청하였으며, 오랜 회장 생활에서 물러난 후에는 하우현 토굴에서 자 기가 바라던 고행 은수 생활을 기쁜 마음으로 수행하였 다. 이처럼 김기호는 철저한 교리 탐구자, 활발한 평신도 지도자, 깊이 있는 영성가로서 반세기 동안 한국 천주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 (-> 《구령요의》 ; 《봉교 자술》 ; 《소원신종》) ※ 참고문헌  金雲會, <金起浩研究>, 《韓國天主教會 200周年紀念 韓國教會史論文集》 I, 1984, pp. 941 ~986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만 남과 믿음의 길목에서》, 1989. [李元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