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면호 (1820~1866)
金勉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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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 토마. 본관 은 안동. 기록에는 계호(季浩) 또는 면호(冕浩)라고도 나온다. 경상북도 안동 박골의 양반 집안 태생으로 일찍 이 서울 주동(鑄洞)으로 이주해 살았다. 19세 때인 기해 년(1839)에 모친과 맏형 익례(翼禮), 둘째 형 응례(應禮) 가 먼저 입교하였고, 그는 맏형으로부터 영세를 받고 입 교하였다. 그 후 모친과 두 형은 기해박해 후 3년 이내에 모두 순교하였으며, 그는 약 1년 간 다블뤼(Daveluy, 安 敦伊) 주교의 복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원래 성격이 활달하여 놀기를 좋아했으므로 1849년 이래 10여 년 동 안 냉담하다가 1866년 초에야 회두하여 열심히 신앙 생 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의 잘못을 보상하는 길은 오 직 순교하는 길밖에 없다고 굳게 다짐하면서 자주 보속 행위를 하였다. 이후 그는 남종삼(南鍾三, 요한), 홍봉주 (洪鳳周, 토마), 이유일(李惟一, 안토니오) 등과 교류하 면서 교회 일에도 참여하였다. 이 무렵 제정 러시아(俄羅斯)가 남하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의 국경을 침범 하며 통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자주 있 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면호는 홍봉 주, 이유일 등과 상의하여 흥선 대원군 (興宣大院君)에게 방아책(防俄策)을 제의하는 서한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 책략은 조선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선 교사들을 통해 영불(英佛)의 힘을 빌리 고, 이들로 하여금 러시아를 견제하자 는 것이었다. 대원군에게 서한을 보내 기에 앞서 김면호는 제4대 조선교구장 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 나 사실을 보고하고 필요하면 대원군 을 만나겠다는 답변을 얻어냈으며, 대 원군의 사돈인 조기진(趙基晋)을 통해 서한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처음에 이를 거절하였고, 김면호는 두 려운 마음에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홍봉주는 남종 삼과 협의하여 다시 방아책을 건의하였고, 마침내 대원 군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게 되었다. 이에 김면호 는 지방 교우촌을 순회 중인 베르뇌 주교를, 이유일은 다 블뤼 주교를 서울로 모셔 오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러 시아가 물러가자 대원군은 오히려 1866년 2월 23일(음 1월 9일) 베르뇌 주교를 체포하는 등 이른바 병인박해를 일으켰다. 김면호는 8월 27일(음 7월 18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심문에서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여러 차례의 형벌을 이겨냈다. 그리고 9월 10일(음 8월 2일) 김문원 (金文遠, 바오로)과 함께 새남터에서 효수형을 받고 순 교하였다. (-> 방아책 ; 병인박해) ※ 참고문헌 《치명일기》 《右捕盜廳謄錄》/ 崔奭祐, 《丙寅迫害 資料研究》, 韓國敎會史研究所, 1968. [車基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