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제 金命濟(1873~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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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제 신부
부산교구 신부. 세례명은 베드로. 황해도 감목 대리. 1873년 충청남도 서산군 소길리(현 忠南 瑞山郡 八峰面 金 鶴里)에서 태어나 일찍 이 부모를 잃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의지할 곳이 없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던 중 당시 합덕(合德)에서 전교하던 퀴를리에(Cu- rlier, 南一良) 신부에게 신심과 총명함을 인정 받아 용산 예수성심신 학교에 입 학하였다 . 1908년 6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고 북간도(北 間島)에 파견되어 1년 간 전교하고 1909년 6월 경남 문 산 본당 주임 신부로 전임되어 배명학교를 설립(1911년 인가),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16년 6월 황해도 장연 본당의 주임으로 전임되었 고, 1928년 1월 황해도 감목 대리구의 감목 대리로 임 명되었다. 이에 황해도 지역의 복음 활성화를 위해 '황 해도 감목 대리구 자치 기성회' 를 조직, 장연 본당에 그 본부를 두고 각 본당과 공소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또한 그 해 4월에는 황해도 내의 교회 학교 교사와 주일학교 교리 교사 및 전교 회장 등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해우 양성회' (海友養成會)를 조직하였다. 건축에도 조예가 깊 어 황해도 내 각 본당에서 많은 건축과 개간 사업을 전개 하였으며, 가톨릭 운동을 일으켜 장연 본당에 많은 신심 단체를 조직하였다. 또한 장연 본당에서 운영하는 경애(敬愛)보통학교의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경애학교의 저학년 학생 들과 황해도의 다른 국민학교 학생 중 성소가 있는 가톨 릭 소년들을 경애학교로 전 · 입학시켜 소신학교 기초 과 정을 가르치고 졸업과 함께 서울 소신학교로 보내곤 하 였다. 그러므로 경애보통학교는 황해도 감목 대리구의 예비 신학교로 불렸으며, 이 학교의 졸업생들 중 많은 이 들이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36년 5월 사리원 본당으로 전임되어 고딕 양식의 벽돌 성당을 건립하고 사제관과 수녀원도 건립하였다. 또한 1937년 11월 봉화(鳳和) 유 치원을 개원하고, 4년제 여자 국민학교인 명성(明星)학 원을 개설하였다. 일제 말기, 계속되는 일본 경찰의 교회 에 대한 감시와 탄압으로 김명제 신부는 태평양 전쟁 발 발 이튿날인 1941년 12월 9일 사리원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심문과 모진 고문을 당하고 약 15일 만에 석방 되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감목 대리로 교회를 이끌고 온 갖 의욕적인 사업을 전개했던 김 신부였지만 거의 모든 문제를 혼자 결정하고 집행하여 황해도 신부들의 지지를 얻지는 못하였다. 1942년 1월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신임 서울교구장 이 교구 행정을 개편하면서 황해도 감목 대리구 제도를 폐지하자 황해도 감목 대리직에서 자동 해임되었고, 원 주 본당으로 전임 발령되었다. 그러나 이 인사에 불복하 고 서울교구를 떠나 전주교구로 이적했다. 이후 전주교 구청에서 잠시 머무르다가 전주 전동 본당 · 익산군 화산 본당 석동 본당 주임 신부 등을 역임하고(1944~1947), 경남 거창 본당에서 사목하였다(1951~1953). 1957년 신 설된 부산교구로 다시 이적하여 진주 장재리 본당에서 사제 생활의 마지막을 보냈는데 말년에는 정신 분열 증 세로 본당 사목이 어려웠다. 부산과 마산 등을 불편한 몸 으로 방랑하다 1960년 12월 22일 마산 완월동 행려 병 자 수용소에서 외롭게 사망하였다. 당시 일반인 복장에 신분증도 없어 신원 확인이 어려웠는데 품속에서 묵주가 발견되어 인근 성당의 신자들이 와서 김명제 신부임을 확인하였다. (→ 황해도 감목 대리구) ※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教會史刊行事業會 편, 《黃海道天主教 會史》, 1984. [尹善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