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우 (1795~1841)

金星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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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안토니오(박득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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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안토니오(박득순 작)


성인. 축일은 9월 20일. 회장. 세례명은 안토니오. 본 관은 경주. 이름은 우집(禹集)이고, '성우' 또는 치윤(致 允)은 그의 자이다. 경기도 광주 구산(龜山, 현 경기도 광 주군 東部面 望月里)에서 김영춘(金永春)과 청주 한씨(韓 氏)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부유하면서 도 인심 좋기로 유명하였는데, 성우 자신은 성품이 강직 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가 셋째인 문집(文集, 자는 允 深)과 같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1830년경이었다. 이 때 둘째인 만집(萬集, 아우구스티노, 자는 德深)은 입교 를 망설였지만, 이내 신앙을 받아들여 3형제가 함께 열 심히 신앙 생활을 하면서 친척과 이웃에 복음을 전파함 으로써 구산 마을이 교우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3년 뒤인 1833년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김성우는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 〔於義洞, 현 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동대문 밖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馬場內, 현 마장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 다. 그런 다음 다시 구산으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을 마련하고, 1836년 이후에는 한여름 동안 모방 (Maubant, 羅伯多祿) 신부를 이곳에 거처하도록 했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난 뒤 얼마 안된 3 월 21일(음 2월 7일), 포졸들이 구산으로 들이닥쳐 그와 동생 하나를 체포하였다. 이때 그들은 약간의 돈을 주고 풀려날 수 있었으나, 그 해 말 배교자의 밀고로 동생들과 사촌 김주집이 체포되어 광주 유수가 있던 남한산성(南 漢山城)에 투옥되었다. 둘째인 아우구스티노는 체포된 뒤 고문을 참아 받으면서 관헌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였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41 년 2월 19일(음 1월 28일) 옥중에서 통회와 신앙심을 지 닌 채 병사하고 말았다. 반면에 셋째인 문집과 사촌인 주 집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사망하였다. 당시 김성우는 미리 포졸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지방 으로 피신하였다가 끝내 포졸들의 수색망에 걸려 1840 년 1월경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옥에 갇혀 있 으면서도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행동하였고, 외교인 죄 수들에게 교리를 전하여 그중 2명을 입교시키기까지 하 였다. 또 온갖 형벌을 받아내면서 석방될 희망을 전혀 갖 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 생애를 다하려고 다짐 하였다. 그러다가 1841년 4월 28일 치도곤 60대를 맞 고도 배교하지 않자 관장은 다음날인 4월 29일(음 윤 3월 9일) 그에게 교수형을 내렸다. 순교한 뒤 그의 유해는 아 들 김성희(金聖熙, 암브로시오, 자는 希伯) 등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고향에 안장되었으며, 시복 후 1927년 5 월 30일에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 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 구산 본당 ; 기해박해 ; 한국 성인)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中 下/ 안응렬 역, 《79위 순교 복자 전》, 경향잡지사, 1959/ <경향잡지> 616호(1927. 6)/ 하성래, 《성 김성 우안토니오와 구산의 순교자들》, 천주교 구산 교회, 1984. 〔車基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