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학 (1870~1938)

金聖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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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신학교 학생들과 함께한 김성학 신부(앞줄 왼쪽에서 네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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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신학교 학생들과 함께한 김성학 신부(앞줄 왼쪽에서 네번째).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알렉시오. 평남 순천군 은 산(殷山)에서 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최 아가다의 넷 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 친 김 프란치스코 사베 리오는 1864년 베르뇌 (Berneux, 張敬一) 주교 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 주교의 평안 · 황해도 전교 때 수행하였고, 병 인박해 후 황해도 · 강 원도 · 평안도에서 로베 르(Robert, 金保祿) · 프 와넬(Poisnel, 朴道行) · 쿠데르(Couderc, 具瑪 瑟) 신부의 복사로 활동 하였다. 김성학은 1883년 강원도 이천(伊川)에 살고 있었는데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4명의 동료와 함께 페낭(Penang) 신학교에 유학하였다가 한국에 신학교가 신설됨에 따라 1892년 귀국하였다. 용 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남은 학업을 마치고 1897년 12 월 18일 제2회 졸업생으로서 뮈텔 주교 주례로 약현 성 당(현 중림동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가족 들이 살고 있는 황해도 매화동에서 6개월 동안 머무른 후, 경북 가실(현 낙산) 본당 주임 신부(1898. 6)를 거쳐 1902년 김천 본당의 초대 주임 신부로 전임되었다. 현 김천시 황금동에 한옥 기와집을 매입, 임시 성당으로 사 용하면서 전교에 주력하는 한편, 1907년 성의(聖義)학 교를 설립하여(여자부는 1911년 병설) 교육 사업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다가 1911년 황해도 장연 본당 주임 신부로 전임되었는데 관할 공소의 토지 등기 문제, 본당 묘지 조성 문제 등 총독부와 많은 마찰을 겪어야 했다. 이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라틴어 교수(1916), 평양 본 당(관후리 본당의 전신) 임시 주임(1922)을 거쳐 이듬해 주 임 신부로 정식 임명되었으며, 1927년에 영유 본당을, 1931년에는 서포 본당을 분리 · 신설 하였다. 또한 신설 평양교구를 맡은 메 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고문으로, 동교구 소속 한국인 신부들의 협력자로 크게 기여하였다. 1936년 7월 서울교 구로 복귀하여 충남 공세리 본당에서 사목하던 중, 1938년 8월 28일 관할 소동리 공소의 강당 축성을 마치고 돌 아온 후 건강이 악화되어 9월 8일 뇌출 혈로 선종하였다. 저서로 《진리변론》 (真理辯論)이 있다. (-> 김천 본당 ; 서 포 본당 ; 장연 본당) ※ 참고문헌  《교회와 역사》 99호(1983, 9). [尹善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