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 (1911~1982)

金成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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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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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 신부.


대구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빅토리오. 1911년 8월 12일에 태어나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거쳐 덕원(德源) 신학교를 졸업한 후 1940년 3월 25일 연길교구(延吉敎 區)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간도 훈춘(琿春) 본당의 보좌 신부로 사제 생활을 시작하였고, 1943년 용정 상시(龍 井上市) 본당의 주임 신부로 전임되었다. 8 · 15 해방 후 간도를 점령한 소련군과 중국 팔로군(八路軍)의 종교 탄 압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다. 1946년 5월 20일 교구장 브레허(Breher, 白化東) 주교를 비롯하여 연길교구의 독 일인 신부 · 수사 · 수녀들이 연길 보안 제1단 감옥에 감 금되었고, 5월 22일 한국인 신부 · 수녀와 중국인 신부 도 체포되었는데 적국(敵國)의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김성환 신부는 연길교구장 대리 로서 연길교구 내의 교회 재산(건물, 토지, 성당 내 제구 등) 을 몰수하려는 공산군에 항의하였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 하였다. 1947년 8월 1일 공산군의 제2차 숙청이 시작되 면서 한국인 신부들도 체포되어 가자 위기감을 느낀 신 자들의 노력으로 모란강〔牧丹江〕의 최 비안네 신부, 도 문(圖們)의 김 마오로 신부, 그리고 3명의 수녀와 함께 조선 국경을 향해 피신하였다. 신자들의 도움으로 월남한 후 공소로 격하되어 있던 행주(幸州) 본당의 8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사목 활동을 재개하였으나 곧 이어진 6 · 25 동란의 발발로 부산으로 피신하였다. 1952년 4월 목포 경동 본당의 초대 주임으 로 부임하여 200평 규모의 2층 석조 성당을 건립 · 낙성 하였다(1954.7.7). . 또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 을 초빙하여 성모 유치원을 시작하고, 한국 천주교회 최 초로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을 조직하는(1953. 3. 31) 등 전교에 주력하여 4년의 재임 동안 1,400여 명의 영 세자를 탄생시켰다. 1956년 봄 경북 김천 성의(聖義)중학교, 성의고등상 업학교, 성의여자중 · 고등학교 등 4개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어 학교 운영을 재정비하고 제반 규정을 마련하였 다. 한편 화재로 불타버린 구관(舊館)을 1958년 11월에 다시 건립하고, 성의 장학 三(聖義獎學制度)를 마련하 였으며(1959. 3), 학급 증설과 학급수 증가로 황금동(黃 金洞) 본당 내에 있던 교사를 평화동으로 이전하였다. 당 시 학교 부지 매입비 및 교사 건립비 일체는 평화동 본당 파비아노(Fabianus, 卓世榮) 신부가 조달해 주었으며, 김 신부는 이를 가지고 평화동에 부지를 매입하고 3층 20개 교실의 교사를 준공하 였다(1961. 10. 18). 또한 1962년 12월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급 증설 인 가를 받고, 성의상고 본 관(1965. 10) 및 신관 (1968. 11)을 준공하였 으며, 성의여자중학교 설립 인가(1969. 10) 및 성의여자상업고등학교 설립 인가(1969. 11)를 받아 1970년 3월 1일 남자 학교와 여자 학교 를 완전히 분리하였다.1976년 말 성의중 · 상고의 교장 직을 사임하였다가 1979년 5월 18일 성의상고의 5대 교장으로 다시 취임하여 활동하던 중 1982년 3월 19일 선종하였다. 《진화론(進化論) 해설 및 비판》, 《주일 첨례 강론》 등 7권의 저서가 있다. (→ 경동 본당 ; 연길교구) ※ 참고문헌  《교회와 역사》 225호(1994.2). [尹善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