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1922~ )
金壽煥
글자 크기
2권

1 / 11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세례명은 스테파노. 본관은 광 산(光山). 김동한(金東漢, 가롤로) 신부의 아우. 경북 대 구 남산동에서 김영석(金永錫, 요셉)과 서중하(徐仲夏, 마르티나)의 6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조부 때부터인데, 조부인 김보현(金甫鉉,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戊辰迫害) 때 충남 논산군 연산(連山)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하 였다. 이때 조모인 강말손(姜末孫)도 남편과 함께 체포 되었으나 임신한 몸이었으므로 석방되어 영석을 낳게 되 었으며, 영석은 성장한 뒤 영남 지방으로 이주하여 옹기 장사를 하다가 혼인한 뒤 대구에 정착하였다. 김수환은 이후 부친을 따라 군위(軍威)로 이주, 그곳에서 국민학 교를 다니다가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 를 거쳐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41년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상 지대학(上智大學)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44 년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동경 남쪽 후시마(父島)에서 훈련을 받던 중 종전(終戰)을 맞고 상지대학에 복학하였 다. 그리고 1947년, 해방을 맞이한 조국으로 돌아와 성 신대학(가톨릭대학의 전신)에 편입, 4년 후인 1951년 9월 15일 대구에서 서품되었다. 김 신부는 이후 경북 안동 본당의 주임 신부로 사제 생 활의 첫발을 내디딘 이래 1953년 대구교구장 비서, 대 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 1955년 경북 김천 본 당 주임 신부, 김천 성의중고등학교 교장, 대구교구 평의 원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56년 7월에 독일 뮌스터 (Miinster) 대학으로 유학, 동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 을 공부하고 1964년 귀국하여 가톨릭 시보사 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66년 2월 15일 마산교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그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해 5월 31일 주 교 성성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이때 김 주교는 초 대 교구장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한 교회 쇄신 정신에 따라 사목 행정을 펴나갔고, 한국 주교 회의 부의장과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한국 부대표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68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盧 基南, 바오로) 대주교가 사임하면서 동년 4월 서울대교 구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되었고, 이듬해 4 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4월 30일 로마에서 '성 펠릭스 성당' 명의의 추기경 서 임식을 가졌다. 김 추기경은 이후 1970년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의 장과 여러 분과 위원장, 주교 회의 산하 여러 전국 단체 들의 총재를 역임했으며, 1974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1977년 미국 노트르담 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 1988년 일본 상지대학에서 명예 신학 박사, 1990 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철학 박사, 미국 시튼 힐(Seaton Hill) 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 1994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울러 그 동안 한국 천 주교의 순교자 시성 운동, 해외 선교 사업, 조선교구 설 정 150주년 행사,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행사, 서울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 등을 통해 한국 교회를 국 내외에 드러내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또 서울대교구 장으로서 교구의 발전에 노력하여 1968년 말에 48개 본 당 14만여 명이던 교세를 1993년 말에는 163개 본당 1 백만여 명으로 확대시켰고, 교구의 성직자 양성에 힘쓴 결과 1993년 말 현재 성직자수 629명(한국인 536, 외국 인 93)을 기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구의 각종 사 회 사업을 발전시키는 데도 노력해 왔으며, 현재 서울대 교구 유지 재단 산하에 있는 각 기관과 단체의 이사장 및 총재를 맡고 있다. 한편 김 추기경은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 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 다"는 인사말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 른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의 원칙을 밝혔다. 동시에 가난 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여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 노동자들 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고, 이후 정치 현실과 노동 문제에 대한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대내외적으 로 인권 옹호자라는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그의 사회 교 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 는 공동선(共同善)의 추구에 목적을 두고 있는데, 그는 이러한 교리를 통해 모든 사회 구조나 정치 형태는 공동 선을 추구함에 있어 평등한 권익을 보장하고 특권 의식 과 배금주의를 버리며, 혁신과 정화의 근본이 되는 인간 내면의 회심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이러한 공동선의 추구를 위한 실천 과정에서 교회는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김 추기 경의 사회 교리에 대한 의식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제3 공화국 이래 현재까지 정치 권력에 의해 많은 고난과 희 생을 받아 왔지만, 그 희생과 고난의 대가로 교회의 지위 가 대내외적으로 크게 격상되었고, 2000년대 복음화를 위한 발판도 다지게 되었다. (→ 서울대교구 ; 한국 천주 교회)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 신문>/ 구중서, 《대화집 : 김 수환 추기경》, 지식산업사, 1981/ 오효진, 《金壽煥 추기경의 뿌리 3 代), 韓國天主教聖地研究院 1987/ 신치구 편, 《참으로 사람답게 살 기 위하여》, 사람과사람, 1994. [車基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