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니시오, 베드로 (1521~1597)

Canisius, Pet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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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2의 사도로 불릴 정도로 독일 교회 재건에 앞장선 가니시오.

독일 제2의 사도로 불릴 정도로 독일 교회 재건에 앞장선 가니시오.


성인. 예수회 신학자. 교회 학자. 축일 4월 27일. 아버 지의 뜻과는 달리 신학을 공부한 가니시오는 퀼른(Köln) 에서 체류하는 동안(1536~1546) '근대적 신심' (Devotio moderna)의 공주 형제단과 가르투지오회(Carthusians)의 수도자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1543년 4월, 이냐시오 로율라의 동료 중의 한 사람인 파 베르(Faber) 신부가 지도하는 피정에 참석한 후 예수회에 입회, 최초의 독일인 예수회원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쾰른에 대학을 세우고 또한 당시 프로테스탄트 로 기울었던 쾰른을 구하기 위해 칼 5세 황제 앞에서 가 톨릭을 변호함으로써 쾰른을 가톨릭으로 남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1546년에 사제로 서품, 1547년과 1562년 신학자로서 트리엔트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 후 로마로 가서 1549년, 종신 서원을 한 여덟번째의 예수회원이 되었으며 이어 볼로냐 대학에서 신학 박사가 되었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향후 30년 간, 후세에서 '독일 제 2의 사도' 로 불릴 정도로 독일 교회를 재건하는 데 결정 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독일은 종교개혁의 여파로 크 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1555년 의 아우크스부르크의 종교 회의에 힘입어 점차 종교개혁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가톨릭은 이미 3개의 대 교구와 12개의 교구를 잃었고, 쾰른 대교구까지 프로테 스탄트가 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 니시오는 독일의 각 지방을 두루 다니며 설교를 하고 대학을 세워 교육하는 등 독일 교회의 쇄신과 재건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주로 다음의 세 분야에서 독일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첫째, 독일의 예수회 관구장으로서 독일의 수도회 조직을 완성시켰다. 뿐만 아니라 대학을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하고 수도자 성소를 증가시킴으로써 예수회를 가톨릭 재건의 중요한 동인으로만들어 반종교 개혁의 기수가 되게 하였다.
둘째, 교회 정책면에서의 활동과 영향이다. 그는 당시 거의 모든 지도자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가톨릭 신자들에게 자신감을 일깨워 주었다. 가톨릭 제후들, 특히 황제 페르디난드 1세 그리고 교황들의 신임을 얻어 제국의회, 종교 토론회, 공의회 등에서 매우 중요한 일에 관여 하게 되었다. 또한 독일 교황 사절들의 조언자가 되었으며 바오로 3세 교황은 그에게 로마와 독일을 중재하는 특별 임무까지 맡겼다. 가니시오는 위의 지도자들에게 교회 개혁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하였다. 성직자들을 더욱 잘 선발하고 교육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로마와 독일 교회 간의 긴밀한 유대의 필요성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은 그레고리오 13세에 이르러 교황 대사의 수 가 늘어나고 독일에 교황청립 신학교들이 설립되고 로마의 독일 신학원(Germanicm)이 확대되는 등 교회 개혁안 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참사회원과 주교 선출에 있어서 귀족들의 특권을 폐지하자는 그의 주장은 시대적 상황 때문에 성사되지 못하였다.

셋째,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그의 저술 활동이었다. 그의 저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학생, 중학생, 어 린이를 위한 3종의 교리서이다(Summa doctrinae christianae, Wien, 1555/ Catechismus minus, Ingolsatdt, 1556/ Parvus Catechismus Catholicorum, Köln, 1558). 이 교리서들은 그의 가장 독창적인 업적으로서 그의 생전에 이미 200판이 나 오고,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사후에도 계속 광범하 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밖에 성인전, 성서 주석 학, 호교론, 수덕신학 분야에서도 저술을 남겼으며 성서 와 교부 문헌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보였다. 그런데 가니시오는 만년에 그의 후임인 호페우스(Hoffaeus)와 의견의 대립을 보게 되었다. 그의 지나친 정 확성과 완벽주의가 관구에 지나친 부담이 된다고 판단한 호페우스는 로마에 진정하였고 또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 졌다. 또 다른 견해 차이는 이자에 관한 것이었는데 호페우스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는 것을 정당하게 인정 한 반면 가니시오는 그것을 반대하였다. 이 문제로 가니 시오는 결국 1580년 말 스위스의 프라이부르크로 자리 를 옮겨야 하였다. 거기서 그는 또 대학을 세우고 정기적으로 설교를 하며 죽기 며칠 전까지 저술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의 영성의 특징은 특히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일치, 지칠 줄 모르는 강한 신앙, 신비주의적인 신심, 독일 교회에 대한 헌신 정신, 교황과 수도회에 대한 절대적 충성,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평화주의 등에서 다양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 성인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견해에 집착한 나머지 가끔 필요한 비판을 하지 못하였고 위의 이자 문제에서처럼 시대적인 변화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이나 결함들이 그의 천부적인 다양한 재능과 교회에 대한 봉사를 감소 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역사적인 위대함은 시대의 임무를 완전히 깨닫고 그 요구에 응하고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오로지 독일 교회 를 위해 그의 전생애를 바쳤다는 점에 있다. 가니시오에 대한 공경은 그의 사망 후 즉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의 전기가 잇따라 나왔고(1614, 1616) 그런 후 그의 시복 수 속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예수회 수난, 해산 등으로 중단 되었다가 1864년에 가서야 시복이 되었고, 1925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는 동시에 교회 학자로 선 포되었다. 그의 유해는 프라이부르크 성 미카엘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 반종교 개혁 ; 예수회)
※ 참고문헌  B. Petri, Canisii epistolae et acta, ed. 0. Braunsberger, 8 v. Freiburg 1896~1923/ S. Petri, Canisii catechismi latini et germanici, ed. F. Streicher, 2 v. Roma 1933~1936/ J. Brodrick, St. Peter Cansius 1521~1597, Baltimore, 1950/ J. Lecler, Die Kirchenfrömmigkeit des hl. Petrus Canisius, "Sentire Ecclesiam" , ed. J. Daniélou and H. Vorgrimer, Freiburg, 1961, pp. 304~314. 〔崔奭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