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홍 (1874~1945)

金洋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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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홍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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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홍 신부.


전주교구 초대 교구장. 신부. 세례명 스데파노. 본관 광산. 구교우 가정의 자손인 김덕련(金德練, 루가)과 김 세실리아의 3남 중 차남으로 전북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 만석동에서 태어났다. 1888년 9월 6일 예수성심신학교 에 입학, 삭발례 · 수문품 · 강경품 · 구마품 · 시종품을 거쳐 1900년 5월 10일에 부제품을 받고, 그 해 9월 22 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진안 어은동(魚隱洞) 본 당 초대 주임 신부로 임명받고 10월에 임지에 도착했다. 김 신부가 관할할 공소는 진안, 장수, 남원, 용담, 무주, 함양, 안의, 산청, 거창, 삼가, 영동에 흩어져 있었다. 그 는 사제관이 준비되지 않아서 회장 집에 기거하며 좁은 공소에서 미사를 드렸다. 부임 후 기성회를 조직하고 1904년 정월(음력)부터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 6월에 한옥으로 된 성당을 완공하고, 1906년에는 성당 확장 공사를 하여 지붕을 기와로 개량하였다. 그리고 1906년 부터 서당식 학교를 세워 운영해 오다가 1909년 4월 20 일 정규 소학교인 영신학교(永信學校)의 설립 인가를 받 았다. 1908년 4월 8일, 그는 총기 은닉죄로 징계를 받았다. 당시 일본 경찰들은 한국인이 소지하고 있는 총기가 의 병들에게 유출되는 것을 막으려고 가택 수색을 하였는 데, 이때 김 신부는 말생의 소지를 사전에 방지하려고 신 자들에게 총기를 사제관에 맡겨 두도록 하였다. 그런데 일진회(一進會) 회원들과 아전들, 그리고 천주교에 반감 을 가진 사람들의 밀고로 일본 군인들이 어은동에 출동 하였다. 총기 소유주인 신자들은 의병들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당했고, 김 신부에게는 금족령이 내려졌 다. 그 후 전주 본당 보두네 신부의 중재로 사건은 해결 되었다. 또 1908년 6월 24일에는 길을 가던 중 일본 헌 병들에게 의병(義兵)으로 오인받아 진안 경찰서에 구속 되었다가 이틀 만에 석방되었다. 1915년 6월 7일 제주 본당 신부로 전임되었다가 이듬 해 5월 27일 문산(文山) 본당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다. 김 신부는 부임하자 유치원을 설립하였으며, 1923년에 는 성당을 신축하고 종전에 사용하던 성당에 여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기존의 배명학교와 유치원, 교우 사랑방 을 중수 개축했다. 당시 문산 본당의 관할 구역은 경남 지방의 1/3이나 되는 지역에 널리 흩어져 있었는데 사 천, 삼천포, 고성, 통영, 거제, 함안, 의령, 합천, 산청, 하동, 남해, 진주 그리 고 전남의 순천을 비롯 하여 서면, 농소, 황전, 여수, 율곡, 벌교 등이 었다. 그래서 그는 공소 담당 전교 회장을 임명 하여 전교하도록 했다. 1926년에는 진주 옥봉 (玉峰) 본당을 분리하 였고, 1927년에는 본당 내에 무의 무탁한 행려 노인들의 무료 양로원인 고조원(孤助院)을 세웠다. 김 신부는 재임 기간 중 본당은 물론 공 소에 이르기까지 신자들의 각종 활동 단체를 조직 육성했는데,이러한 것으로 는 전교회, 부인회, 소년회, 호상계(護喪契), 청년회, 가 톨릭 품꾼회, 순천 호상회, 노동 공신 조합 등을 들 수 있다. 김 신부는 1929년 8월 15일 전북 전주 본당 주임 으로 부임하여 해성 청년회(海星青年會)를 조직하였고, 이듬해에는 본당 아동의 교리 강습을 목적으로 주야 강 습소를 설치하는 등 청소년 교육과 활동에 힘쓰면서 학 교 설립을 준비했다. 선교사들의 평에 따르면 그는 성인 사제이며 사목에 대단한 열성을 가진 훌륭한 선교사였고, 온순한 성격과 아주 정확한 판단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신자를 책망 할 때면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꾸짖는 도량을 보였으며 자기 교우들을 극진히 사랑했다. 드망즈(Demange, 安世 華) 주교는 이러한 김 신부의 인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 문에 전라북도를 감목 대리구로 설정하면서 1931년 5월 10일 그를 전라도 감목 대리에 임명하였다. 김 신부가 관장하게 될 지역은 전라남북도와 제주도였다. 감목 대 리구 설정 당시 전라도에서 전교하던 한국인 신부는 대 구교구의 조선인 신부 29명 중 15명이었고, 신자수는 대구교구의 교우 37,450명 중 17,529명, 본당수는 14 개(전북 10, 전남 2, 제주 2) , 공소 199개, 성당(공소 강당 포함) 36개였다. 감목 대리구로 설정된 후 가장 큰 어려움은 재정적인 문제였다. 전라북도의 운영은 겨우 현상 유지가 가능하 다 해도 전라남도의 경우는 도서 지방과 낙후된 지역이 많아 막대한 전교비가 소요되었다. 그래서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포교성성과 협의하여 전남을 새로운 선교 단인 골롬반회에 맡기기로 하고 1934년 3월 13일 맥폴 린(0. McPolin, 林) 신부를 전남 감목 대리로 임명함으로 써 김 신부는 전북 지역만 담당하게 되었다. 전주 감목 대리구는 6년 간의 수련 기간을 마치고 1937년 4월 13 일 지목구로 승격, 한국 최초의 자치 교구로 탄생했으며, 김 신부는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맥폴린 신 부는 광주 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전북 감목으로 재직 하는 동안 김 신부는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지 목구의 교세 현황은 조선인 신부 15명, 교우수 19,300 명, 본당 14개, 공소 177개, 성당 44개, 신학생 5명, 상 주 회장 201명, 전교 회장 35명을 기록하게 되었다. 지 목구로 설정된 후 김 교구장은 1937년 10월 12일 샬트 르 성 바오로회의 수녀들을 초청하여 해성학원을 맡겼 다. 이 학원은 1938년 3월 22일 졸업을 끝으로 개편되 어 3월 30일 해성심상소학교(海星尋常小學校)로 개교했 다. 또 그는 전주교구 유지 재단 설립 허가원을 제출하여 1938년 6월 22일 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일제는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이후 전시 체제를 강화하고 황국 신민화 정책(皇國臣民作政策)의 기본인 신사 참배를 강화하였다. 그런데 1939년 종교 단체법이 성립된 후부터 신사 참배가 종교 박해의 양상으로 나타 났고, 1940년부터 황국 신민화의 완성인 창씨 개명을 실시하면서 김 교구장도 가네야마(金山)로 개명해야만 하였다. 일제는 신부들에게까지 신사 참배, 궁성 요배 (宮城遙拜 : 일본의 궁성이 있는 동방을 향하여 예배하는 의 식), 국민 의례, 국기 게양을 의무화하고 교회에 국방 헌 금, 애국 헌금, 항공기 헌금, 교회 종이나 쇠붙이 공출 등을 요구했다. 그리고 가정, 학교, 교회에까지 '가미다 나' (神栩 : 가정 제단)를 두어 신사 참배를 생활화하도록 강요하는 한편 철저하게 감시하였다. 또한 1941년 2월 12일에는 사상범 예방 구금령(思想犯豫防拘禁令)을 공 포하고 감시대를 조직하여 황민화 정책에 유해한 인사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했으며, 이른바 불온 사상을 가진 자 들을 예방적으로 구금하여 격리시켰다. 이러한 와중에서 1941년 여름, 나바위〔羅岩〕 본당 주 임인 김영호(金永浩, 멜키올) 신부가 체포되어 구금되는 일이 벌어졌다. 나바위 본당에서 운영하는 계명학교 교 사인 서정수가 교장인 김 신부를, '가미다나' 를 모독하 고 신사 참배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불평을 가지고 반대 하며, 군사 기밀을 누설했다는 등의 이유로 밀고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김영호 신부는 전주 교도소에 수감되었 고 평신도 3명도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 안대동(安 大洞) 본당 서병익(徐丙翼, 바오로) 신부는 평소 일제에 불평 불만이 많은 자로 낙인 찍혔는데, 로마에 교세 통계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을 외국 스파이 활동이라고 하여 교도소에 구금되고 옥고를 치렀다. 그 결과 교구의 책임 자인 김 교구장과 부교구장인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 메오) 신부도 경찰서에 구금되어 문초를 받았다. 김 교구장은 노령인데다가 교구의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고 일제의 간섭과 탄압을 견딜 수 없어 1941년 11월 21일 교구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리고 1942년 6월 석동 (石洞) 본당 주임으로 부임했다가 광주 북동(北洞) 본당 으로 전임되었고, 1944년 9월에는 나주(羅州) 본당으로 전임되었다가 그곳에서 1945년 5월 3일 72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시신은 전주로 옮겨져 전주교구 성직자 묘 지에 안장되었다. [金眞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