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노동 운동이란 좁은 의미에서 생산 수단이 자신의 노동력뿐인 신자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생산 수단의 소유와 관리에 참여하면서 생산 수단이 없어 생기는 불이익을 제거하고 자신뿐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기본 생활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벌이는 지속적인 집단 활동 과정이다. 보다 넓은 의미로는 교황이 노동 문제를 다룬 사회 회칙에 나타난 교회의 관심, 대륙 주교 회의, 주교 대의원 회의, 교회 관련 기구에서 노동 문제에 관여하는 행위, 그리고 주교, 사제 또는 평신도들이 개인 자격으로 노동 문제의 해결을 위해 벌이는 활동들을 가리킨다.
〔배 경〕 가톨릭 노동 운동은 시기상으로 일반 노동 운동이 시작되고 난 후에 나타났다. 노동 문제에 대한 교회의 관심도 사회보다는 나중에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가톨릭 노동 운동에 대해 알려면 항상 일반 노동 문제와 그것이 나타난 배경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먼저 가톨릭 노동 운동의 시작 배경이 되는 몇 가지 객관적인 조건들은 다음과 같다.
노동 문제 :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문제는 먼저 기본 사회 관계인 임금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임금은 노동력의 시장 가격에 따라 형성된다. 그리고 보통 노동자와 그 가족이 생존을 유지할 만한 최저 수준에서 결정된다. 그런데 노동력은 일회용 상품이 아니라 육체적 · 정신적 피로로 소모되는 속성을 갖는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 인격체이다. 그래서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가 임금 노동자들로부터 최소의 임금으로 최대의 이윤을 얻고자 하는 것은 노동자들과의 갈등의 원인이 된다. 두번째는, 노동 시간이다. 자본가들은 자본주의가 시작되기 이전 오랜 기간 동안 하루 8~10시간 정도로 유지되었던 노동 시간을 자본의 이윤 증가를 위해 점차 늘려 하루 12시간 내지 14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일반화시켰다. 그래서 이러한 자본가들의 욕구와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보장받으려는 임금 노동자들의 이해(利害)는 서로 충돌하였다. 세번째는 산업 재해와 직업병이다. 이것은 근대적인 생산 관계와 더불어 생겨났고, 산업 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며 나타났다. 주거 조건, 지역 환경, 통근 조건, 공해 등 어떤 측면을 보더라도 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기 때문에 노동력과 직접 연관된 조건들을 개선하려는 노동자들의 요구가 당연히 제기된다. 마지막으로 신분의 측면이다. 처음에 노동자의 충원은 유괴와 쟁탈 등의 방법에 의존했고, 충원된 노동자의 관리는 상기(賞旗) 제도, 공장 징벌, 체벌 등의 방법에 의존하였다. 이러한 원생적(原生的) 노동 관계의 극복은 그 후 사회적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런 관계의 극복을 꾀한 것이 사회 정책 내지 노동 정책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노동자들 자신의 자각에 의한 조직적인 극복 노력이 노동자 운동으로 나타났다.
독점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등장 : 가톨릭 노동 운동이 태동하던 19세기 초 · 중기는 자유 경쟁이 지배하던 독점 이전의 자본주의가 절정에 달하고, 독점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시작되어 완료 단계에 접어드는 때였다. 독점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은 산업 혁명을 거친 모든 나라에서 일어났는데, 각 나라마다 고유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시기의 특징은 기술상의 대혁신, 공업 발전과 그 집중이다. 그리고 독점 이전 자본주의 단계에서 지배적이었던 자유 경쟁은 대기업에 생산이 집중되는 과정을 초래하면서 약화되었다. 생산의 집중은 독점보다 앞서 왔고, 기업의 규모가 거대해지면서 경쟁이 힘들어 지고 경쟁의 결과도 매우 파괴적이 되었다. 동시에 수십의 거대 기업이 협정을 체결하기가 수백 수천의 소기업보다 쉬웠으므로, 자유 경쟁 대신 독점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전세계로 확대되면서 여러 나라를 경제적으로 접근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독점 자본주의인 제국주의는 뒤떨어진 나라나 국민을 경제적 혹은 정치적으로 예속시켜 통합을 실현하고자 했다.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와 종속국의 민중을 종속시키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 : 산업 혁명은 인류 역사상 커다란 진보였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노동의 부담을 줄이려고 발명한 기계가 오히려 노동자를 괴롭히는 수단이 되었고, 자본가들의 착취를 용이하게 해주는 데 이용되었다. 또한 기계를 사용하면서 숙련이 필요없는 단순 노동이 늘어났고, 여자와 어린아이를 고용하는 일도 많아졌 으며, 노동 시간도 길어져 노동 조건이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임금은 낮아지고, 노동자의 생활은 빈곤해졌다. 장시간 노동으로 노동자들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육체적인 질병 · 재해 · 사고가 잦았으며, 정신적 도덕적으로도 악한 영향을 받았다. 이 같은 육체적 퇴화 · 지적 퇴폐 · 도덕성의 저하가 모두 당시 노동자 계급이 처해 있는 사회적 조건에서 비롯되었다. 기계에 밀려 실업자가 범람
하고, 고용은 불안정했으며, 저임금 · 살인적인 노동 강도 · 열악한 노동 환경 등이 당시의 노동자들에게 인간 이하의 조건을 강요했다. 교회는 이러한 당시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를 느꼈다. <노동 헌장>(Rerum Novarum, 1891)의 서론에 노동자들이 겪는 불의한 현실을 고발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결과였다.
사회주의의 발흥과 성장 : 1750년대 이후 급속하게 발전된 기술 혁명, 의식 구조의 변화, 사회 구조의 변화 등은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시민 혁명이 준 충격과 함께 사회 전반의 질적, 양적 변화를 초래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생산 양식의 변화였다. 봉건제 생산 양식이 해체되고 자본제 생산 양식으로 변천하였다. 자본과 노동의 분산성을 특징으로 했던 봉건적 농업 구조와 장인 제도가 가내 수공업 생산에서 공장제 수공업을 통한 대량 생산 단계를 거쳐 자본과 기술의 고도화와 전문화가 촉진되었다.
장인(匠人) 제도에서는 오늘날의 숙련공인 도제(徒弟)와 미숙련공인 견습공들이 자신의 직업적 긍지와 전문인들로서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장제 수공업 단계에 들어서면서 장인 제도의 근간은 해체되었다. 장인은 산업 자본가로 탈바꿈하게 되며, 도제와 견습공 그리고 몰락한 장인들까지 포함해서 그들은 산업 자본가 밑에 임금 노동자로 전락한다. 농촌 사회에서는 중산적 생산자층이 신흥 부르즈와층으로 편입되면서 농업 자본주의가 확대되고, 농업에서 공업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탈락된 임금 노동자 계층이 고용 기회를 찾아 도시의 공업 지대로 몰려들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고용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부랑인 혹은 룸펜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다. 이 과정에서 도시 산업 체제의 고용 부분을 중심으로 노동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라고 불리는 계급에 의한 사회적 갈등이 사회 모순으로 심화되어 혁명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움직임이 고양되었다. 19세기 중반 노동 운동은 천부 인권적 자연권에 대한 권리 주장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독점 자본주의 경제가 기승을 부리던 1871년 파리 콤문의 실패는 사회주의 영향 아래 사회 운동과 노동 운동의 방향 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독일 통일 하에 급속한 경제 발전과 제국주의적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 독일 독점 자본의 요구는 마침내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후반의 유럽은 자본과 노동이라는 양극화된 사회 집단들을 더욱 날카롭고 공고한 계급 의식과 연대 의식으로 무장하였다. 19세기 후반 독점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 노동자 계급의 세계적 연대라는 차원의 성격을 띠었다.
〔근 거〕 가톨릭 노동 윤리가 가톨릭 노동 운동의 이념적 기초가 된다. 그래서 이 기준에 따라 노 문제를 진단하고 윤리적 평가를 내리며 실천의 기초로 삼는다.
노동하는 인간 : 가톨릭 사회 교리의 제1 원리는 인간이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존엄하고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도 침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톨릭 사회 교리의 중심은 인간 존엄성을 옹호하고 보존하기 위한 시도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가톨릭 노동 윤리도 결국은 존엄한 인간, 곧 노동자를 중심으로 삼는다. 따라서 이 원리에 입각하여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성을 강조하며, 노동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에서 인간의 노동보다 그리고 노동의 주체인 인간보다 앞서는 것을 반대한다.
그리스도교의 노동 원리 : 여기에는 여섯 가지 기본 원칙이 있다. 첫째, 인간은 자신의 품위와 능력에 긍지를 가져야 한다. 둘째, 인간의 모든 활동은 자신과 이웃의 성장과 발전의 관점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셋째, 인간은 자기의 처지와 능력대로 노동의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기본적 사명을 다해야 한다. 넷째,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노동 현장에서 보증되기 위해서는 개인과 사회가 공동으로 협력해야 한다. 다섯째,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기계 문명은 인간에게 긍지를 심어 주고 한계성에서 해방시켜 준다. 그러나 균형 있는 발전과 인간적 유대 관계가 고려되어야 변화의 충격을 극복할 수 있다. 여섯째, 노동은 인간의 활동이므로 노동하는 인간은 인간다운 노동의 환경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노동의 자유로운 선택과 정의로운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갖는다. 이 원리에 바탕을 두고 가톨릭 노동 운동은 노동 문제의 해결을 시도한다.
노동의 영성 : 계시 진리를 실제 생활에 적용하여 새로운 삶을 형성하는 것을 영성이라고 본다면 노동 영성의 기본 원리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인간의 노동은 창조 질서에 대한 신앙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노동과 함께 휴식의 의미를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노동의 주인이 되어야지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가톨릭 교회는 기본 원리들을 침해하고 벗어나는 문제들에 대응한다.
〔사례와 역사〕 유럽 교회 : 유럽 교회의 노동 운동은 19세기 초반에 태동하여 중 · 후반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 이후에도 간헐적인 시도가 있었지만 일반 노동 운동의 조건들과 비교하여 보면, 매우 빈약하고 영향력도 적었다. 그래서 19세기의 노동 운동을 중심으로 다룬다. 가톨릭 노동 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양과 질에서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월등했던 독일 교회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노동 운동은 집단적인 성격을 띠지 못하고 개인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노동자들의 집단과 집단 행동은 19세기 후반에야 조직화된다.
독일 교회 : 독일 교회의 노동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은 베스트팔렌의 신부이자 나중에 주교가 된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 대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빌헬름 엠마누엘 폰 케틀러(W.E. von Ketteler, 1811~1877)이다. 물론 이전에 케틀러와 같은 관심을 보인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관심의 폭과 깊이, 업적으로 볼 때 그를 시초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고 외쳤던 바로 그 해에 사회 불의와 노동자들의 고통, 유산 계급의 냉혹함과 몰이해에 대항하면서 가톨릭 교회를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독일 가톨릭 교회의 사회적 자각과 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케틀러는 사회 문제를 당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보았다. 그래서 1848년 마인츠 대성당 대림절 강론에서 "우리가 이 시대를 알려고 한다면 사회 문제를 밝혀야 한다" 고 하였다. 또한 사회악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선의 행위로 구제될 문제가 아니라 단지 "사고의 변혁을 통해서 가능할 뿐" 이라고 주장하였다. 후에 이 생각이 달라지긴 했으나 해결책은 영혼 구제적이며 도덕적 인애(仁愛)의 성격이 강하다. 그의 신앙 고백에 따르면, 사회 불의를 제거하는 일이 사회 개혁이나 법률로써가 아니라 단지 '충만한 사랑' 이나 '불신의 해소' 를 통해 되는 것으로 본 것 같다. 그리고 재산의 정당한 분배는 '폭력' 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 을 바꿈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영혼 구제자로서의 확신, 그리스도교적 사명에 대한 케틀러의 신념은 당시 사회에 뿌리박힌 자유주의적 국가에 대한 불신에서 생겨난 것 같다.
케틀러 다음으로 주의 깊게 볼 수 있는 사람은 프란쯔 폰 바더(F. von Baader, 1765~1841)이다. 그는 인간의 진정한 해방이란 오로지 그리스도교적인 질서에 바탕을 둔 사회에서 신분 질서를 바로잡을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가 새로 생겨난 계급 대립과 늘어난 노동자들의 빈곤 문제 등을 깨달았다는 점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비평가들은 그가 시대에 앞서 있기는 했지만 개혁안들은 아직도 낭만주의에 사로잡혀 있고 중세적인 신분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한다. 다음의 인물로는 아담 뮬러(A. Miiller, 1779~1829)를 들 수 있다. 그는 임금 노동 제도를 '노예제의 연장' 이라 불렀다. 아울러 '자유주의적 공장 제도'
를 '세계 멸망' 이라는 이름으로 고발하였다. 또한 구슬을 완성하듯 전체를 스스로 생산하고 싶은 인간 본연의 욕구와는 반대로 인간의 관계를 단편으로 끊는다는 이유 때문에 근대적 공장 분업을 거부하였다. 그는 옛날식의 신분과 협업의 자연적 질서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였다. 노동자들에게 '공장제' 로 잃었던 '농업이나 상업에서의 원래의 생존 기반' 을 되찾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저축 은 행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으로 주목해 보아야 할 인물은 프란츠 요셉 리터 폰 부쓰(F.J.L. von Buth, 1803~1878)이다. 그는 1837년 바덴 의회에서 최초의 포괄적이며 구체적인 사회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 개혁안은 질병, 사고 보험, 노동 시간 제한, 특히 아동 노동 시간 단축, 공장의 감시, 공의(公醫), 감독관, 임금 현물 지급제 폐지, 주일 · 휴일 노동 금지 등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쓰도 다른 연구자들로부터는 낭만주의적 사회의 신분 질서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는 수공업에 대한 요구 외에 농업 국가의 자연 보존' 을 국가의 사회·경제 정책의 가장 중대한 과제로 생각하였는데 동시에 산업 발전도 저지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피터 랑헨스페르거(P. Langhensperger, 1810~1892)도 《농업 문제》란 저서에서 원칙적으로 산업화에는 찬성하면서 국가의 폭 넓은 '상업' , '자본' , '기계의 집중 배제화' 라는 사회 경제 정책을 요구하였다. 특히 그는 민중이 조합, 길드, 단체 등을 조직하여 안전을 도모할 것을 바랐다. 그러므로 그는 이전 상태로 아무 생각 없이 복귀한다는 것을 생각치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중엽까지는 독일 가톨릭 측에서 제시한 당대에 적합한 철저한 사회 이론이나 사회 개혁 활동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가 당대 사회 불의의 문제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그 전통이나 범위 안에서, 1848년까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관심을 보여 주었다는 면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 하다.
그 다음 시기에 꼽을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은 가톨릭 직인 조합의 아돌프 콜핑(A. Kolping, 1813~1865) 신부이다. 그는 정신적 감독자(prases)로서 활약하였고, 1846년 가을 가톨릭 수공업 직인 조합을 만들었다. 이곳에서부터 가톨릭 직인 조합은 전국으로 퍼졌고, 1851년에는 '가톨릭 직인 연합' 이 생겼으며, 1855년까지 104개의 연합과 12,000명의 조합원이 가입하였다. 이러한 가톨릭 직인 연합의 활동은 신앙 교육, 직업 교육, 가족적 친교 등이었다. 그가 인정받는 점은 그 활동의 이론적 바탕보다는 가톨릭 교회의 영역을 넘어서 영향을 미친 그의 사회 사업이었다. 또한 이즈음 1847년에 처음으로 레겐스부르크에, 그 후 바로 뉘른베르크 등 남부 독일에 생겨났다가 후에 가톨릭 직인 조합에 합쳐진 '가톨릭노동자연맹' 이 있었다. 1848년 혁명의 해는 가톨릭 정당이 최초로 시작된 기념비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해 10월 3일 마인츠에서 열린 가톨릭 최초의 연합 총회는 공개적으로 독일 가톨릭 신자들이 사회 불의와 악폐에 대하여 토론한 광장이었다. 이 시기에 케틀러 주교는사회 문제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자본주의 제도의 폐지나 그리스도교적 '협동 사회 제도' 를 통한 보완이 아니라 현존 사회 질서 내에서 국가 조력에 의한, 또 노동자들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노동자들의 공동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실질적인 사회 정책이었다. 독일 가톨릭 노동 운동사에서 1877년은 매우 중요하다. 1877년 3월 19일 케틀러의 조카인 갈렌 백작이 <사회 조사서>에 대한 수정 보완안과 1869년의 <영업 조례 개정안>을 제국 의회에 제출하여 노동 계급 보호를 위한 실제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또한 에쎈에서 1869년에 설립되었던 노동자 총연맹' 의 지지를 받은 중앙당의 노동자 선거인들이 이해에 공식적인 중앙당 후보를 물리치고 크룹 회사의 금속 선반공인 겔하르트 스퇴제를 제국 의회 하원 의원으로 선출시키는 데 성공한 해이기 때문이다.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로 프란쯔 힛쩨(Franz Hitze, 1851~1921)를 들 수 있다. 그는 1880년대 이래로 다른누구보다도 독일 가톨릭의 사회 운동에 결정적인 자극을 주었다. 그는 맑스 이론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한편 라쌀레에 더욱 깊이 공감하면서, 자본주의 경제 · 사회 질서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기계적 생산 양식이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여 가톨릭의 사회문제 해결책으로서 '사회 민주적 국가 사회주의' 를 비판하였고, '보수적 전체 사회주의' 를 주장하였다. 또한 새로운 신분제를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과거의 신분 이념으로의 복귀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사회 문제 해결에 대해 국가의 임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는 점에서는 케틀러를 넘어서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와 다른 이론을 주장했던 이론가로는 프란쪼 헤르틀링(F. Hertling, 1843~1919)이 있다. 그는 1876년 이후 제국 의회에서 중앙당 대표로 힛째 이전에 중앙당의 사회 정치 안건을 다루었다. 포겔장(Vorgelsang, 1815~1890)은 "사회에는 인성의 협동 원리가 지속적인 지표로서 늘 내재해 있다. 이 원리는 중세 봉건주의에서는 오점으로 남았지만, 아직도 현세에서는 계속해서 적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자본이 인간을 대신하여 경제 목표를 만들어 가며 사물의 질서를 변화시켰고 가정의 해체, 위생과 도덕의 파멸 등 일반적인 양극화 현상인 조직적 연관성 파괴 그리고 시대적 병폐를 가져왔다고 보았다. 이 시기와 다음 시기는 가톨릭 사회 운동,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노동 운동이 조직화되는 시기였다. 1880년 직물 공장주인 프란쯔 브란트르가 중심이 된 가톨릭 기업인들은 몇몇 성직자와 공동 작업으로 노동자 복지회'를 만들었고, 프란쯔 힛째가 1년 간 사무 총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회의 임무는 여러 곳에서 활동하는 가톨릭사회 운동 회원들의 집회를 후원하고 장려하는 것이었다. '노동자 복지회' 는 10년 후에 성공한 '독일 가톨릭교도 민중 연합'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나아가 가톨릭 기업가들에게 가톨릭 교회 노동자 단체의 필요성을 주지시켰다. 1884년 이래 독일에는 가톨릭 직인 단체 외에 가톨릭 노동자 연맹이 활발히 퍼졌으며 1889년에는 280개 단체에 6만~6만 5천 명의 회원이 가입하였다.
<노동 헌장> 이후 교황의 이 회칙을 기초로 하여 1891년 이후 독일에서 전개된 '가톨릭 노동자 연맹' 은 '독일 가톨릭교도 민중 연합' 그리고 마침내는 '그리스도교 노동 조합' 으로 발전하였다. 그 후 제국 의회에서 중앙당파의 사회 정책 주창자들은 1893년 이래 뭔헨 대학 교수인 프란쯔 힛쩨를 필두로 하여 노동자 사회 보장이나 기업 내에서 기업가와 노동자 간의 공공 사업의 직능별 조직을 위한 사회 정책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독일 가톨릭이 더 이상 사회 개혁 운동의 방향에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이 평가 가운데 한 가지가 헬가 그레빙의 것인데 그는 "이 시기에 독일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 재산의 국유화와 문화 투쟁 결과로 가톨릭 신자가 경제 사회 분야의 국가 계급에서 제 신분으로 후퇴한 것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는 동안 수많은 독일 가톨릭 신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해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며 불분명한 평가를 내렸지만,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모두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케틀러 시대까지 인정받고 있던 인간적인 동기마저도 더 이상 이해받지 못하였다. 독일 가톨릭 교회의 태도는 가톨릭 신앙에서 나온 사회적 책임의 인정, 노동자들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통찰력, 노동자들의 희망과 소원에 대하여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에 입각하여 이해하고 규정하였으며 동시에 실제 파트너 슈을 허용치 않는 가부장적 · 위계적 태도가 특징이었다. 특히 가톨릭 신도 대회의 보고서는 일반 노동자들을 칭찬하고 직업 노동자들이 학문적인 강의를 통해서 가부장적 질서를 묵인하였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평가하면서 당시의 가톨릭 노동 운동이 가지고 있던 특징을 지적하였다. 독일 가톨릭 노동 운동 단체들은 1890년 풀다에서 열린 주교 회의의 교서와 교황 회칙의 공식적인 인정과 변호를 통하여 처음으로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되었다. 1891년 이후 뮌헨을 중심으로 남부 독일에서 먼저 지방 연합이 이루어졌고, 1911년에는 베를린을 제외하고 하나의 단체 연합이 형성되었다. 1914년 가입 회원수는 약 50만 명이 되었고, 1898년 이래 널리 보급된 주간지 <서부 독일 노동자 신문>을 발간하게 되었다. 가톨릭 노동 연맹의 사업은 사회주의로부터의 방어를 위한 신앙 보호의 측면이 두드러졌으며, 조합원의 '직업인으로서의 교육' 을 강조하였다.
프랑스와 벨기에 : 1870년 이후 'Oeuvre des Cercles Catholiques d'Ouvriers' 가 발족되었으며 그 지도적 역할은 레네 드 라 투르 뒤 팽(René de la Tour du Pin, 1834~1924)과 알베르 드 뮌(Albert du Mun, 1841~1914)이 맡았다. 이들은 그랑메종(Grandrmaison), 밀셍(Milcent), 레옹 아르멜(Léon Harmel), 길라르 방셀(Gailhard-Bancel)과 더불어 〈Association Catholique>를 발간했다. 벨기에에서도 포티에(Pottier)와 듀트를루(Douteloux)가 유사한 관심을 보였다. 1900년 프랑스 리용에서는 노동 사제단이 탄생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사제이지만 일반 노동자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공장 노동자나 하역 노동자로 일하면서 그 임금으로 생활했다. 그들은 직장에서 미사 봉헌은 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모범과 <노동 헌장>의 가르침에 따라 헌신적으로 노력하면서 개인적으로 만나는 노동자 개개인에게 영적 지도와 희생적 봉사를 실천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1925년 카르딘 추기경이 벨기에 브뤼셀에서 시작한 지오세(J.O.C) 운동의 확산 노력이 두드러진다. 지오쎄 운동은 꾸준한 활동을 통해 이제는 전세계적인 조직이 되었고 가톨릭 노동 운동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와 내용을 갖추어 가고 있다.
이탈리아 : 이탈리아에서는 쥐세페 토니올로가 가톨릭 노동 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오스트리아인 쿠페스타인이 로마에서 'Circolo dei Studi sociali ed economiche'를 이끌어 나갔는데, 1882년 이후에는 추기경이 된 야코비니(Jacobini)와 메르밀로가 계속해 이어나갔다.
스위스 : 1885년에는 제네바의 메르밀로 추기경이 위에 열거한 그룹들을 국제적으로 Union catholique d'études sociales et économiques a' Fribourg/Suise' 로 결합시켰다. 메르밀로 추기경이 이끄는 이 연합회는 1891년에 나올 <노동 헌장> 회칙에 기초 작업을 통해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프리부르그 유니온(Union de Fribourg)의 활동도 중요한데 그 대표적인 주장은, 적정선의 임금과 최저 임금 제도 확립, 사회 문제에 대한 이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국가 개입권, 노동 문제에 대한 불법(Unrech)을 제거하기 위한 국제 협약, 임금 체계의 불완전성을 상쇄시키는 수단으로 질병 · 재해 실업 보험 실현 등이다.
영국 : 매닝 추기경은 1889년 런던의 선거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성공회 대주교와 런던 시장이 중재 시도를 포기한 후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조정하였다. 그는 1865년부터 신흥 공업 도시인 런던의 공장 노동자와 부두 노동자들의 인권 옹호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1889년에는 영국을 마비시켰던 런던 부두 대파업의 해결을 위한 중재자로 활약하여 노동자에게 유리한 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오스트리아 : 1880년 포겔장의 영향으로 사회 정책적인 입법 활동이 시작되었으며, 독일에서는 중앙당이 제국 회의에서 맹활약하던 황제 빌헬름 1세와 2세 때 사회 정책적 입법 활동을 전개했다. 대표적 사상가들은 게오르그 폰 헤르틀링과 프란쯔 힛쩨이다. 1882년 프랑크푸르트의 독일 가톨릭 신도 대회에 이어 1883년 뵈멘에 있는 하이드 궁정에서 가톨릭 사회 혁신자들의 위원회가 열렸다. 여기서 나온 문헌이 <하이더 테제>이다. 쟁점이 되었던 이자 문제는 해결을 보지 못했으나 보다 공정한 임금, 그리고 자본 소유주들과 노동자들 간의 회사 계약 체결 등을 요청하였다. 회사 계약의 요청은 가톨릭 사회 혁신자들간에 쟁점으로 남아 있었다. 포겔장의 영향을 받아 <프리부르그 유니온>이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이를 발전시켰다. 이 단체는 포겔장의 이념을 수용 발전시켜 가톨릭 사회론으로 집약, 1888년 2월 2일 교황청에 보고했다. 당시 교황청은 가톨리시즘의 발전과 연구를 사실상 이 단체에 위임할 정도로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네덜란드 : 1890년 뤼티히에서 열린 제3차 국제 가톨릭 사회 회의에서는 공권력의 개입을 지지하는 이들이 확고한 기반을 얻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890년에 모든 나라들의 사회 정책적 법률 자료 수집과 출판을 위한 국제 사무소가 설립되었다. 1891년 3월에 파리에서 노동자의 법률적 보호를 위한 국제 연합이 열렸고, 베를린에서는 사회 정책을 위한 제1차 국제 회의가 열렸다.
미국 : 라이얀(J.A. Ryan) 신부의 탁월한 입법 운동을 들 수 있다. 그는 1895년 신학생 때에 <노동 헌장>의 정신을 미국에서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노동 관계 입법 운동을 전개했다. 최저 임금법, 8시간 근로법 등 13개 조항의 노동 관계 입법을 추진하던 중 1918년에 최저 임금법, 부녀자 아동 보호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라이얀 신부의 계속적인 입법 활동은 1929년 미국의 대공황으로 인하여 좌절당하고 법안이 폐기되기도 했지만, 전후 산업 부흥과 실업자 고용 문제를 해결하려는 루즈 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1933) 과정에서 제정된 노동 조합법' (1935)과 '공정 노동 기준법' (1938)에는 라이얀 신부의 13개 조항과 <노동 헌장>의 기본 정신이 반영되었다. 또 다른 사례는 기본스(J. Gibbons) 추기경의 활동이다. 1845년 유럽인들의 대량 이민으로 산업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빈곤한 노동자들이 증가하자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기본스 추기경은 1880년대에 곤경에 놓인 노동 조합, 노동의 기사단을 구제하기 위해 활약하였다. 또한 교황과의 대담을 통해 이 단체가 기업의 착취에 대항해서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조직체임을 설득시킴으로써 교회의 견해를 바꾸어 놓았는데 이 조직은 '미국 노동 총동맹' 의 전신이 되었다. 기본스 추기경은 1887년 로마를 방문하는 동안, 가톨릭 교회와 보통 사람(시민)들과의 관계에 관해서 교황에게 열렬히 호소하였다. 그의 직접적 목적은 미국 노조, 노동 기사단을 캐나다 교계 제도의 공격들로부터 방어하는 것이었다. 기본스 추기경은 교회가 대중들의 지원을 추구하지 않았을 때 그리고 정부와 유럽의 지배 계급들과 더욱 전통적인 동맹(연대)에 의존하는 대신에 '민중의 교회' 가 되지 않을 때,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후의 시기에도 지속적인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만큼 관심과 노력의 정도가 증폭되어 나타난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이후의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앞의 시기에 한정을 짓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이 외에도 남미 대륙의 가톨릭 노동 운동이 포함된다.
한국 교회 : 한국 가톨릭 교회의 노동 운동의 효시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활동으로부터 보아야 할 것 같다. 이전에 이렇다 할 만큼 한국의 가톨릭 교회가 노동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보여 준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1958년을 시작으로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1960년대에 수원교구 선면공업주식회사의 노조 결성, 서울대교구 드레스 미싱 노조 결성, 전주교구 제지 공업 임금 인상 사건, 인천교구 심도직물 노조 결성 사건 등에 관여했다. 이 같은 활동은 교회가 노동 운동에 직접 관여하여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어 1970년대에는 사회 정의에 입각하여 노동 문제에 대한 포괄적 관심을 표명하고 노사 분규가 일어난 사례에 대한 연구와 지원, 노조의 조직에 주요 구성원으로 참여, 노조 활동과 해고 근로자 지원, 노동 문제의 실태 조사 등의 활동을 하였고, 노동 사목을 표방하며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본격적인 연대를 시작하고, 이들과 함께하였다. 1980년대에는 교회 안의 가톨릭 노동 청년회, 가톨릭 장년회, 그리고 이들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활동하는 노동 사목 전국 협의회가 활동하였다.
〔평 가〕 가톨릭 노동 운동은 일반 노동 운동에 비해 역사적으로나 노동 문제에 대한 대응 양식에서나 뒤져 왔다. 이 문제는 가톨릭 사회론의 한계로 지적되는데 다음의 원인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전통적인 교리나 사회에 대한 뿌리깊은 거부감 때문에 사회 문제에 대해 부차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교회가 창립 당시부터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 온 사례에 비추
어 보면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하지만 이 흐름이 교회사 안에서 지배적인 조류가 된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사회 문제가 이미 심각해진 다음에야 이차적인 대응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 때문에 사회 문제에 대해서 전통적인 관행을 되풀이하는 한계를 보여 주기도 했다. 이것은 교회가 사회 문제나 복잡한 정치 문제에 휘말리거나, 교회가 하나의 정당으로 오인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 교회의 관심과 주장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다. 그리고 어느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상대적인 거리를 두면서 비판적 관계를 유지한다. 또한 사회 문제에 점진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항상 그 문제의 근본으로부터 출발하도록 독려하고 그 바탕에 그리스도교적 가치의 핵심인 인간 존엄성의 원리가 지켜지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가톨릭 교회는 노동 문제를 이론적인 성찰이나 교회 안의 영역으로만 국한시키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의 관심은 신자와 종교의 경계를 넘어 인간 그것도 노동하는 인간에 중심을 두고, 이들의 구원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가톨릭 노동 운동의 장점이자 존재 의의이다.
※ 참고문헌 Karl H. Pescke, Christian Ethics-Moral Theology in the Light of Vatican II, vol 3., C. Goodliffe Neale, Alcester and Dublin, 1986(유봉준 역, 《그리스도교 윤리학 3권》, 분도출판사. 1992)/ Kardinal Joseph Höffner, Christliche Geselschaffslelehre, Verlag Butzon & Bercker, 1975(박영도 역, 《그리스도교 사회론》, 분도출판사, 1979)/ Donal Dorr, Option.for the Poor -A Hundred Years ofVatican Social Teaching, Gill and MacMillan, Dublin, 1983(오경환 역,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 분도출판사, 1987)/ Aaron I. Abell, American Catholicism and Social Action( 1865~1950), 《ERE》/ A. Steinbach, Labor movement, 《NCE》/ Wolfgang Abendroth, Die Geschchte der europäischen Arbeiterbewegung, Frankfurt, 1977(신금호 역, 《유럽 노동 운동사》, 석탑, 1984)/ Jean - Yves Calvez S.J., The Social Church and Social Justice - The Social Teaching of the Popes.from Leo 13 to Pius 12(1878~1958), Henry Regnery Company, Chicago, 1961/ 김춘호, 《사회주의와 가톨릭 사회 교시》, 분도출판사, 1991. 〔朴文洙〕
가톨릭 노동 운동 -
勞動運動
〔라〕motus operariorum catholicorum · 〔영〕Catholic labor move-ment
글자 크기
1권

1 / 3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는 가톨릭 노동 운동의 태동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