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기 (1858~1895)

金じ(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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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 성당 안에 있는 김이기의 묘비.

용정 성당 안에 있는 김이기의 묘비.


조선 후기 간도(間島)의 학자. 아명은 진구(鎭九) 자 는 중성(重聲). 호는 어초자(漁樵子). 서울의 학자 집안 에서 태어나 충청도 노성(盧城)의 풀개〔林浦〕라는 곳에 서 한학을 배우며 소년 시절을 보냈다. 16세 때 김옥균 (金玉均)의 개화당에 가입하였다가 1884년 갑신정변 (甲申政變)이 실패하자 만주로 망명, 동학을 배운 뒤 1892년 가을 간도의 호천개(湖泉浦)에 정착하여 의원 생활을 하다가 서당을 열고 제자들에게 동학을 가르쳤 다. 이때 그의 제자로는 간도 최초의 천주교 신 자인 김영렬(金英烈, 요 한)과 최문화(崔文化, 베네딕도) 등이 있었다. 이듬해 봄 서학대(棲鶴 臺)로 서당을 옮긴 그는 제자들과 함께 동학과 다른 종교들을 연구하 던 중, 동학 교리에 회 의를 느낄 무렵 천주교 교리를 접하게 되었으 나,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으로 서 당은 폐쇄되고 자신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 다. 이후 그는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기로 결 심하고 상경하던 중 함북 고령에서 동학도로 체포되어 1895년 3월 25일(음) 회령(會寧) 옥에서장사(杖死)하 였다. 이에 앞서 그는 제자인 김영렬에게 천주교가 바로 진교(眞敎)임을 역설한 적이 있는데, 그의 사후 김영렬 은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는 동시에 간도 지방에 교 리를 전하여 "북관(北關)의 12종도"를 탄생시키는 등 이 지역의 천주교 수용과 정착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33년 연길교구에서는 용정(龍井) 성당 구내에 있는 그의 무덤에 묘비를 건립하였다. (-> 간도 교회 ; 김영 렬) ※ 참고문헌  韓允勝, <金以器와 그 弟子>, 《가톨릭 青年》 41호 (1936. 10)/ A. Hafner, KIM IKI, Miinster, 1956(번역 : 《교회와 역사》 191~209호).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