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노동 윤리 -

勞動倫理

〔라〕ethica laboris catholica · 〔영〕Catholic labor eth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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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노동 윤리는 노동의 가치와 존엄성, 조건,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의 올바른 양식 등을 규정하는 행동 지침이나 정신을 말한다. 따라서 노동 자체에 대한 의미, 그것과 관련된 인간의 모든 행위 양식을 당위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노동 윤리의 임무이다. 가톨릭 노동 윤리는 같은 대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노동 윤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가톨릭 노동 윤리는 하느님의 계시와 신앙의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양심과 이성을 바탕으로 접근하는 일반적인 노동 윤리와는 차이가 있다. 가톨릭 노동 윤리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 부르심과 응답, 소명과 책임이란 관점에서 접근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톨릭 노동 윤리의 대상은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의 노동 행위만을 다루지 않는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노동을 통해 어떤 권리와 사명을 주셨으며 그것을 충실히 실행하기 위한 올바른 노동의 가치 질서는 무엇인지, 계시된 이 진리들이 시대와 문화 여건에서 어떻게 표현되었고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는 어떻게 살아 왔으며 가르치고 있는가를 알아 보는 것이 가톨릭 노동 윤리의 대상이다. 따라서 가톨릭 노동 윤리는 하느님 계시의 말씀인 성서와 그것을 충실히 보전하고 해석해 주는 교회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형성된다.
〔배 경〕 노동 윤리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관심은 산업 발달로 인한 임금 노동자들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 19세기 말 유럽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확대되었고 임금 노동자 층이 폭넓게 형성되었다. 자본가들은 풍부한 노동력 시장을 이용해 이윤을 획득하는 데만 급급했다. 노동 조건이나 임금, 시간 등은 자본가의 이윤 추구라는 측면에서만 취급되었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으로 혹사당했다. 자본가들은 생산비 절감을 위해 어린이나 부녀자들도 낮은 임금으로 채용하였다. 노동자들은 이 같은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이로부터 근대적인 노동 운동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정치 · 사회적으로는 자유주의파와 왕정 복고파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사상이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게 되었다.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노동 헌장>(Rerum Novarum, 1891)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발표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노동 문제에 대한 공식적 가르침의 시작이다. 노동 문제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공황에 직면한 세계 경제의 상황에서 비오 11세는 <40주년>(Quadragesimo Anno, 1931)을 발표하였고, 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요한 23세는 <어머니와 교사>(Mater et Magistra, 1961),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쇄신과 일치, 현대화를 기치로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목 헌장>(Gaudium et Spes)을 발표하였으며 바오로 6세는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을 발표하여 국가간의 경제적 불균형으로 인한 제3 세계의 빈곤 문제를 언급하였다. 또한 바오로 6세는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변화의 희생물이 되고 있는 제 3세계 노동자들의 권리를 언급한 <80주년>(Octogesima Adveniens, 1971)을 발표하였다. 최근에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동 헌장> 반포 90주년을 기념하여 <노동하는 인간>(Laborem Exercens, 1981)을 발표하여 기술, 경제, 정치적 여건의 급격한 발전이라는 상황에서의 노동 문제에 응답하였다. 1991년에는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해체라는 새로운 상황을 반영하여 <백주년>(Centesimus Annus)을 발표하였다.
〔성서의 노동관〕 구약성서는 현대적 의미의 노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창세기에 따르면 노동은 창조의 원질서에 속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창세 1, 27-28)는 말은 노동의 본질을 드러낸다. 자신의 창조주로부터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은 노동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핵심임을 보여 준다. 또한 인간이 하느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노동이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인간의 한 특성이라는 사실을 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신 후 그것을 인간의 손에 맡기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모든 창조물에게 명령을 내리고 땅을 지배할 힘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의무까지도 부여하셨다. 이같은 관점에서 인간은 노동을 함으로써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행위 자체를 반영하고 하느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다(노동하는 인간 4항). 따라서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대한 인간의 동참이며 창조주의 계획에 봉사하여 하느님의 이름이 전 우주에 빛나도록 하는 것이다(사목 34항).
구약성서는 주변의 이방 민족들과는 대조적으로 노동을 천하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랍비들조차도 스스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는 일거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또한 성서는 노동이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의무임을 지적한다. 사람은 일하러 나와서 저물도록 수고하며(시편 104, 23), 올곧고 경건한 사람이면 누구나 노동을 한다(시편 128, 1-2). 하느님은 인간에게 노동을 가르치신다고 묘사되어 있다(이사 28, 23-29). 지혜 문학은 빈둥거리는 게으름뱅이를 책망하고 근면한 일꾼을 칭찬한다(잠언 6, 6-11 : 11, 16 : 15, 19).
노동의 가치에 대한 높은 평가와 더불어 성서는 힘든 수고가 노동에 포함된다는 현실과 노동이 왜곡되는 현실을 의식하고 있다. 인간은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 것이라고 창세기는 말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품삯을 빼앗기고, 노동을 강요당하며 매맞으면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의 교만함과 이기심으로 인해 노동을 둘러싸고 일어날 수 있는 왜곡된 노동의 모습을 성서는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노동은 하느님의 축복이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행되지 않을 때는 저주가 될 수도 있다.
하느님이셨던 예수 그리스도 역시 노동자였다. 그는공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목수로 일했고, 예수의 제자들도 대부분이 노동자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노동을 인간 생활의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요소로 여겼다. 그는 종종 노동의 세계로부터 따온 비유들과 예화들을 사용했다. 밭의 농부, 가사에 종사하는 부인, 충실한 목자와 불충실한 목자, 어부, 포도원의 일꾼의 이야기들이 그러하다. 자기 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은 벌을 받지만 자기 달란트를 이용해 일을 한 근면한 종들은 충실하고 착한 청지기라고 칭찬을 받는다. 바울로도 회중으로부터 부양받을 권리가 있는 사도였지만 자신의 생계를 위해 손수 노동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없이 굳건하게 일할 것을 요구했다. 데살로니카인들에게는 각자의 직업을 가지고 자기 손으로 일할 것을 권고하였으며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였다. 고린토 전서에서는 노동을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려는 의인들의 고통과 노고를 의미하는 것으로 쓰고 있다. "노동을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인간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참여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자렛에서 손수 일하심으로써 노동의 품위를 높여 주신 것이다"(사목 67항). 따라서 노동은 충실한 이행을 통해서 인간 마음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자라나는 공간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영광 및 하느님 나라와 관련된다.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려는 지향으로 충실하게 노동하는 것은 초자연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 같은 성서의 노동관으로부터 노동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첫째, 자아 실현으로서의 노동이다. 인간은 생물학적 욕구를 가진 존재로 생존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 일은 협동이 요구되는 활동이다. 따라서 인간은 노동 조직과 공동체를 창조해야 하고 공통의 가치를 발전시켜야 하며 협동을 유지시켜 줄 상징을 생산해야 한다. 이처럼 노동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사회적인 것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것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게 되고 동시에 더욱 진정한 인간이된다(노동하는 인간 3항). 한편 인간은 노동을 통해 아직 성취하지 못한 자기 자신의 가능성들을 실현시킨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소명에 따라 자기 자신을 창조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은 인간의 자아 실현의 중심축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장 상처를 주기 쉽고 왜곡되기도 쉽다. 노동은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의 노고와 고통을 동반한다. 또한 사회 생활 속에 깊이 침투해 들어오는 해악과 불의도 있다. 인간 노동의 질서가 무너지면 사회 내의 불의와 압제의 구실과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소외의 원천으로 작용하게 된다.
둘째, 노동은 인간이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수단이다. 그 지배로써 인간은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닮은 세상의 모습을 드러낸다. 온갖 기술의 발전은 일차적인 자연을 생산물로 변형시킴으로써 생산된 재화들을 분배하도록 해주는 봉사들로써 외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반영한다. 세계는 그 안에서 활동할 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한 하느님의 업적이다. 여러 가지 일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을 만난다. 그러나 지배력 행사는 연대성과 동떨어지거나 반대되어서는 안된다. 연대에 어긋나는 지배력 행사, 즉 선진 기술의 이점들과 불균형의 교환을 이용해 타인들을 착취하는 지배력 행사는 연대하는 인간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능과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만을 계시한다.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자만심과 교만을 드러내는 계기이다. 이기심은 자기 자신의 발전을 형제들인 타인들과 나누지 않고 타인들을 희생시킨 대가로 얻을 때 발생한다. 이러한 상태는 현세적인 자율성이 절대적 의미로 이해되기 때문인데, 이는 무질서와 인간 자신의 파괴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왜곡된 지배력 행사는 연대의 공존 · 공생을 파괴하기 위해 지능과 자유를 사용하는 것이며, 윤리적으로 하느님의 계획을 어기는 행위이다.
셋째, 노동은 인간이 타인들과 맺는 관계를 측정하고 연대성의 정도를 규정하기 위한 지표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활동에 부여되는 여러 가지 가치들은 사회적 서열, 임금 수준, 소비재를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 지적 내지 사회적 발전의 기회들을 나타낸다. 따라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정의로운 임금 체계를, 특정한 사회의 제도들 및 구조들이 얼마나 정의로운지를 재는 가장 안전한 척도로 본다(노동하는 인간 19항). 척도로 본 임금은 노동에 부여되는 가치를 나타낸다. 임금은 노동을 귀중하게 여기는가 아니면 하찮게 여기는가를 나타낸다. 노동에 대한 보수는 노동이 단지 인간 활동의 객체적 결과들로서 평가되는지 아니면 노동하는 인간 존재의 완성이라는 주체적 차원들로서 평가되는지를 나타낸다. 즉 노동을 통하여 그리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통해 인류가 형제애로 일치케 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노동에 대한 보수를 통해 노동이 친교를 도모하는 활동인지 아니면 분열시키는 활동인지 측정할 수 있다.
넷째, 노동은 인간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나타낸다. 인간의 노동이 하느님의 뜻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서 안에서 다른 여러 가지 표지들 가운데서도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통하여 표명되었다. 그러한 인간 노동의 휴식은 생산을 조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노동의 사회적 차원들을 상기시켰다. 놀고 있는 들에서 나오는 소출은 가난한 사람들, 이방인들, 과부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가톨릭의 관점에서 볼 때 노동은 인간을 타인들의 형제로 규정해 주는 특징이다. 또한 인간을 하느님의 계획에 순종하고 자기 노동의 결실을 번제물로 봉헌함으로써 하느님을 흠숭하는 존재로 규정해 주는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실천 지침〕 가톨릭 노동 윤리는 위와 같은 성서적 근거와 신학적 원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실천 지침들을 제시하고 있다.
노동할 의무와 권리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충실히 노동해야 할 의무가 각 사람에게" 있다고 결론짓는다(사목 67항).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당연히 동료 인간들에게 봉사하고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계속하도록 불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수많은 세대에 걸친 노동의 상속자이며 동시에 그것을 통해 미래의 건설에 참여해야 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넓은 의미로 이해되는 노동의 도덕적 의무를 이룬다. 이러한 맥락의 노동은 손수 노동이라는 좁은 의미가 아니다. 이 노동은 넓은 의미에서 명상 생활의 열애를 포함한 진지하고 뜻 있는 모든 활동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러한 넓은 의미의 노동은 하나의 보편적인 의무이다. 노동은 인간의 복리에 기여하는 다양한 공동체들에 대한 의무이며 형제적 사랑의 요구이다. 그것은 인간을 창조하여 세상을 다스리게 하시고 창조 사업을 완성하도록 하신 하느님께 드려야 할 의무이다.
노동이 인간 각자의 의무라면 노동하는 모든 주체는 그에 상응하는 권리를 가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노동의 의무와 함께 노동할 권리도 단언한다(사목 67항). 이 권리는 자기를 보전하고 딸린 사람들을 부양할 권리 및 의무로부터, 또한 창조 계획에 하느님과 협력하라는 부르심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합당하고 의미있는 직업을 통해 생계를 꾸릴 권리가 있다. 이 권리의 보장을 위해 사회와 국가는 국민들이 충분한 노동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국가는 만일 필요하다면 노동의 기회를 조성하기 위해 사적 소유에 대해 사회적 의무를 부과할 권한이 있다. 국가에게 사적 소유의 사회적 의무 수행을 보장할 의무는 없고 권리뿐이라면 무산 노동자에게는 별 쓸모가 없다. 그것은 노동자를 유산 계급의 자비에 내맡기는 것이 된다. 국가는 사적 소유의 사회적 의무들이 이행되도록 조치할 권리가 있다. 그렇다고 일할 권리가 배운 기술이나 직업에 종사할 권리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일터를 가질 권리와도 다르다. 일터를 가질 권리란 타당한 이유 없이 해고 되지 않을 권리이다. 이에 대한 자연법적 토대는 정의에 입각한 엄격한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 배려를 요구할 권리이며 또 노동자가 오랜 기간을 충실하게 고용주를 위해 일해 오고 있는 곳에서는 어떤 의무감을 요구할 권리이다. 이것은 종종 노동 계약에 의해 부여된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부당한 해직 통고로부터의 보호와도 같다.
정당한 임금을 받을 권리 : 임금은 노동자에게 필수적인 생활 수단이다. 따라서 가톨릭 노동 윤리는 인간이 하나의 인격체로서 품위를 지켜나갈 수 있는 정도의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며 그것이 정당한 임금이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노동자의 가족이 인간 존엄성에 합당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임금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정당한 임금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이 노력해야 할 것을 촉구한다. 정당한 임금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것은 인격체로서 품위있게 살아갈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것을 뜻한다. 가톨릭 노동 윤리는 이러한 권리의 보장을 당연하고도 정의로운 것으로 가르친다. 또한 정당한 임금의 결정은 언제나 자연법적 정의에 입각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어느 계약보다도 더 오래되고 더 엄격한 자연법의 정신은, 임금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검소하고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임금이 지급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노동 헌장 63항).
이러한 정신에 입각해 비오 11세는 임금 결정에 대한보다 실천적인 기준을 <40주년>에서 제시하였다. 그것은 첫째, 노동자들에게 그들 자신과 그들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만한 보수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렇지 못하면 노동자 자신은 물론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이 일상적인 가정의 필요를 충당할 수 있는 충분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사회 정의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생계가 유지되지 못한다면 가능한 한 시급히 합당한 보수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32항). 둘째, 임금의 정도를 정하기 위해서는 기업과 기업주의 조건들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업이 무너질 정도의 임금을 요구하는 것은 기업뿐 아니라 노동자 자신도 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업의 부실한 경영과 기획, 낡은 기술 때문에 발생하는 낮은 이윤을 이유로 노동자에게 낮은 임금을 강요하는 것 또한 부당하다. 따라서 기업주와 노동자 모두는 어려움과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상호 협조해야 함을, 국가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책과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고 있다(33항). 셋째, 임금 수준은 공동선에 합치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공동선을 위해서 먼저 임금 수준은 노동자가 일정량을 저축하여 재산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실업을 줄여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적정한 임금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지나치게 낮거나 높은 임금은 실업을 낳기 때문이다. 실업은 노동자에게 불행과 유혹을 유발하고 각국의 번영을 파괴하며 전세계에 걸쳐 공공 질서와 평화와 안녕을 위태롭게 한다. 따라서 사회 정의는 가능한 한 선의와 노력을 한데 모아 가능한 한 많은 이들에게 고용 기회를 제공하고 적당한 생계 수단을 보장하도록 임금이 결정될 것을 요구한다. 한편 임금은 여러 계층의 합리적인 관계가 고려되어야 한다. 그럴 때 인간의 다양한 경제 활동은 상호 부조와 봉사를 제공하는 하나의 유기체로 결합되고 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34항).
가톨릭 노동 윤리는 이러한 기준 가운데 노동자들을위한 정의가 우선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기업의 선익 또는 국가 경제의 선익을 앞세워 노동자들에게 정의를 다하지 못하도록 허용한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것은 기업과 국가 경제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의 기초 위에서 건설되어 가는 셈이다. 만일 기업과 국가 경제의 구체적인 기초가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변해야 할 것은 기업과 국가 경제이지 노동자 탄압을 통해 임금을 통제해서는 안된다. 임금의 결정을 시장의 자유 경쟁에 완전히 내맡기는 것이 부당한 것처럼, 임금의 결정이 권력자들의 자의에 맡겨지는 것 또한 부당하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의와 평등의 규범들이 지켜져야 한다(어머니와 교사 71항).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점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일정한 사회 · 경제 체제 그리고 모든 경우에서 그 체제가 정의롭게 기능하는가의 여부는 그 체제 안에서 인간이 하는 노동이 정당한 보수를 받고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평가될 수 있음을 또한 강조해야 한다 ··· 여기에서 바로 정당한 임금이 어떤 경우에서든 온갖 사회 · 경제 체제와 온갖 모형과 그 기능의 정의로움에 대한 구체적인 판정 기준으로 된다. 정당한 임금이 유일한 판정 기준은 아니지만, 특별히 중요한 판정 기준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관건이 되는 판정 기준이다"(노동하는 인간 19항).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성 : 가톨릭 교회의 노동 윤리는 노동이 자본보다 우위에 있음을 주장해 왔다.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성은 교회가 그리스도교의 이상적 사회를 규정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기본적인 전제이다. 따라서 사회 교리는 자본을 노동보다 우위에 위치시키는 다른 모든 사회 유형을 반대한다. 노동의 우위성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의 개념은 인간이 자의로 쓸 수 있는 자연 자원만이 아니라 인간이 이를 자기의 필요에 따라 변형시키는 수단의 총체도 역시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 모든 수단들은 인간의 노동이 이룬 역사적 유산의 결과' 라는 점이 즉각 드러나게 된다. 원시적인 단계에서부터 초현대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 수단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온 것은 바로 인간이고, 인간의 경험과 지성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주 간단한 농기구 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의 진보를 통하여 기계, 공장, 실험소, 컴퓨터와 같은 더욱 현대적이고 복잡한 기구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노동에 기여하는 모든 것' , 즉 현 기술 수준에서 최고도로 완벽한 '도구' 를 이루는 모든 것은 '노동의 결과' 이다. 이러한 거대하고 강력한 도구는 노동의 결과이며 인간 노동의 표징을 지니고 있다. 생산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인간은 그가 비록 어떤 특별한 훈련이나 자질이 필요하지 않은 노동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생산 과정에 있어서 진정하고도 유효한 주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것은 모든 도구가 아무리 완전하다 해도 그것은 단지 인간의 노동에 종속되는 도구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교회의 가르침이 남긴 유산의 일부로서 노동 제도에 관한 문제와 전반적인 사회 경제 체제와 관련해서 항상 강조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강조하고 역설해야 할 점은 생산 과정에 있어서의 인간의 우위, 즉 '사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성' 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자본이라는 개념에 속하는 모든 것은 다만 사물의 집적일 뿐이다. 인간은 노동의 주체로서 그가 하는 노동에서 독립하여 인간 홀로 인격체이다" (노동하는 인간 12항)
노동과 소유 : 가톨릭 교회의 전통은 소유권을 절대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재화가 모든 이를 위한 것이라는 뜻에서 모든 이를 위해 소유권이 행사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사유 재산권은 재화가 만인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서 공동 사용권에 속한다. 소유권의 정당한 명분은 개인 소유권이든, 공공 소유권이든, 집단 소유권이든간에 오로지 노동을 위해서만 기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노동에 기여함으로써 재화의 보편적인 목적과 재화의 공동 사용권을 성취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산 수단의 소유가 배타적인 권리라고 옹호하는 극단적 자본주의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가톨릭 신학자들과 사제들은 노동 수단의 공동 소유를 위한 제안으로서 노동자들이 기업 경영 또는 이윤 배당의 참여, 노동에 의한 주식 소유 등을 제시하였다.
노동 조합 : 노동 조합은 노동 시장에서 자신들의 경제 · 사회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조직이다. 노동 조합을 결성할 권리는 결사의 자유라는 인간의 기본권에서 기인한다. 사적(私的) 사회를 결성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권리이다(노동 헌장 61항). 그러므로 국가는 사적 사회들이 윤리적 선과 그 사회의 복지에 명백히 어긋나지 않는 한 금해서는 안된다. 상호 도움과 사회적 보조를 위한 조직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조직은 노동자 조직이다"(노동 헌장 69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노동 조합을 자유로이 조직할 권리는 기본 인권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며, 그와 같은 또 다른 기본 권리는 아무런 보복의 위험없이 조합 활동에 참여할 권리라고 말한다(사목 68항). 그러나 교회는 조합 결성의 권리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종교적 · 윤리적 · 정치적 자유에 대한 훨씬 더 기본적인 인권에 의해 명백히 제한받는다는 것이다. 이 점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들을 몸체로 삼으면서 다른 종교적 · 정치적인 신념들을 차별하는 노동 조합의 경쟁에 맞서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교회는 가톨릭 노동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가톨릭적인 노동 조합을 결성하도록 권장하였다.
파업 : 레오 13세는 파업을 가능한 피해야 하는 하나의 악으로 언급한다(노동 헌장 56항). 그러나 비오 12세는 노동자들이 윤리적으로 허용되는 모든 수단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하려면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온전히 부합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밝힌다. 이 말의 문맥으로부터 이러한 수단들은 최후의 방법으로서 파업을 포함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파업의 권리를 명백히 인정하고 있다. "경제적 또는 사회적 분쟁이 생길 때에는 평화적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언제나 우선은 쌍방의 성실한 대화를 시도해야 하겠지만 오늘의 상황에서도 파업은 노동자들 자신의 권리를 수호하고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최후의 필요하고 정당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사목 68항).
파업의 권리는 두 가지 자연적 권리들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나는 적절한 조건에 대한 동의 여하에 따라 일을 하거나 하지 않을 권리, 또 하나는 공동선과 상충하지 않는 모든 목표들을 위해 단결할 자유이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파업을 허용하되 제한 조건을 달고 있다. 첫째, 파업의 목적이 합법적이어야 한다. 파업의 동기는 파업의 결과보다 더욱 심각하고 더 해로운 것일 때 정당하다. 따라서 시민 공복들의 파업은 공공 질서에 더 큰해를 끼치기 때문에 그 파업은 중대한 불의가 있을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나아가 단체 협약이 유효할 때 상대방이 협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만 파업이 정당화된다는 점은 하나의 일반 원칙으로서 주지되어야 한다. 둘째, 차이점들을 공평하게 해결하기 위한 다른 모든 평화적 수단을 성실히 시도하고 사용해야 한다. 가능한 수단을 일부러 회피하면서 파업을 시도하는 것은 자신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사용되는 수단들이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어떠한 노동자나 피고용주라도 부당한 파업에는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일을 계속할 경우에 심각한 해를 당할 위협을 받는다면 그 노동자는 작업을 중단할 수 있다.
노동 보호 : 노동자들은 부당한 저임금, 장시간 노동, 부족한 휴식 등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그리고 여성 노동자의 혹사, 어린이 노동 등과 같은 명백한 불의는 사회 입법에 의해 금지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레오 13세는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자들이 인간으로서 대우받아야 하며 노예나 또는 영리를 위한 대상물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인간을 단순히 영리의 수단으로 취급하거나 육체적 또는 물리적 힘의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생각이야말로 비인간적이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노동 헌장 31항). 요한 23세는 비인간적이고 인간을 위축시키는 노동 조건을 아주 강력한 어조로 반대한다. "만일에 경제 체계의 구조, 기능, 환경 등이 ··· 인간 존엄성을 위태롭게 하도록 되어 있다면, 그리고 만일 그것들이 조직적으로 사람의 책임감을 무디게 해주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들 각자의 주체성의 표현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설사 그 경제 체제를 통하여 생산된 부(富)가 높은 수준에 도달하고 이 부가 정의와 공평의 기준에 의하여 분배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경제 체제는 정의에 맞지 않는 것이다"(어머니와 교사 83항). 기술적 · 경제적 · 금전적인 요인들은 인간에게 종속되어야 한다. 산업 자본가, 경영자들은 노동자 안에서 기계나 생산 요소의 부속물 이상의 것을 보아야 한다. 노동이 인간을 위해 있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지 않다.
노동자의 협력 : 가톨릭 교회는 노동자들의 고용이 단순히 임금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계약 관계를 넘어 노동자의 협력과 공동 결정의 관계로 발전할 것을 권장한다.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규제하는 결정에 대해 전혀 발언권이 없고 묵묵한 일꾼으로 격하되지 말아야 할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비오 12세는 처음으로 이러한 문제를 언급하였다. 그는 임금 계약을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 동업 계약으로 바꾸도록 권고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자와 관리직 종사자들이 공동 소유자나 공동 관리자가 되고 또 어떻게든 이윤 분배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다(40주년 30항). 요한 23세는 더욱 깊게 언급하였다.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일을 통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기 존재를 완성하려는 내재적 욕구를 지닌다고 설명하였다(어머니와 교사 82항). 따라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이나 사회의 경제적 발전에 관련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공동 결정을 내리도록 허용하는 법규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교황은 그런 공동 결정이 노동자의 직장에서는 합법적이며 바람직스러운 것이고 지역적 및 국가적 차원에서는 긴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공동 참여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1949년 독일 보쿰에서 열린 독일 가톨릭 신도 대회에서 자연적 권리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대회에 모인 가톨릭 노동자 및 고용주 대표자들은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에서의 모든 노동자의 공동 결정은 자연적 권리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교황 비오 12세는 거부하였다. 1950년 6월 3일 그는, 경제에 대한 공동 경영권은 달성 가능한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동 계약의 본질이나 기업의 본질 어느 것도 그 자체로는 반드시 그러한 권리를 포함한다고는 할 수 없다" (AAS 42 [1950] p. 487) . 그리고 1952년 9월 14일 "사회 회칙을 낸 교황들은 자본의 운용 및 그로 인한 소유에 있어서의 피고용인들의 참여권과 노동자들의 공동 결정권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노동 계약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것을 반대 거부하였고 본인 역시 반대한다"고 선언하였다. 경제적 결정은 재산 소유권을 포함하며 노동자들은 타인의 소유권을 통제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AAS 44[1952]p. 792).
이같이 가톨릭 노동 윤리는 노동과 관련한 주요 문제들을 가톨릭 교회의 독특한 인간관과 사회관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들은 구체적인 사회적 조건들과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에 항상 고정된 형태로 남아 있지는 않다. 즉, 가톨릭 노동 윤리는 사회의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그 내용도 변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황들은 변화된 상황을 감지하고 그것에 적응하는, 또는 선도하는 가르침들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 참고문헌  <노동 헌장>(Rerum Novarum)/〈40주년>(Quadragesimo Anno)/ <어머니와 교사>(Mater et Magistra)/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80주년>(Octogesima Adveniens)/ <노동하는 인간> (Laborem Exercens)/ <백주년>(Centesimus Annus)/ Karl H. Pescke, S.V.D., Christian Ethics -Moral Theology in the Light of Vatican II , vol3, C. Goodliffe Neale, Alcester and Dublin, 1986(유봉준 역, 《그리스도교 윤리학 3권》, 분도출판사, 1992)/ J. Höffner Kardinal, Christliche Geselschaftslehre, Verlag Butzon & Bercher, 1975(박영도 역, 《그리스도교 사회론》, 분도출판사, 1979)/ D. Dorr, Option for the poor -A Hundred years of Vatican Social Teaching, Gill and Macmillan, Dublin, 1983(오경환 역,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 분도출판사, 1987)/ 김춘호, 《사회주의와 가톨릭 사회 교시》, 분도출판사, 1991/ Jean- Yves Calvez S.J., The Social Church and Social Justice - The Social Teaching of the Popes from Leo 13 10 Pius 12(1878~1958), Henry Regnery Company, Chicago, 1961/ R. Antoncich · J.M. Munarriz, La Doctrina social de sa Iglesia, Ediciones Paulinas, 1987(김수복 역, 《그리 스도교와 공동체 사회》, 일과 놀이, 1990). 〔朴眩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