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덕 (1920~1988)

金在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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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제5대 교구장. 주교.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본관 경주. 1866년 8월 28일 공주에서 치명한 순교자 김영오(아우구스티노)의 증손자. 1920년 6월 1일 전북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中吉里)에서 김정서(金正瑞, 시 몬)와 김 마리아의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5 년 3월 진안 마령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성 유 스티노 신학교 예비과를 거쳐 1936년 서울 동성상업학 교 을조에 진학했다. 1941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 학하였으나, 1943년 학교가 폐교되자 원산 덕원신학교 로 편입했고, 1946년 다시 서울 용산신학교에 편입했는 데, 이 학교가 1947년 4월 성신대학으로 승격된 뒤인 10월 28일에 졸업했으므로 성신대학 출신이 되었다. 졸업과 동시에 사제로 서품되어 11월 1일 전주 대동 (大洞, 현 중앙)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6 · 25 동란 중인 1950년 8월 2일 교구장과 동료 사제들과 함께 체 포되어 3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9월 27일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당시 그는 심문을 받던 중,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공산당을 비난하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깊 은 병을 얻게 되었다. 1951년 5월 5일 교구 경리부장을 거쳐 1954년 11월 1일 나바위〔羅岩〕 본당 주임으로 부 임하여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서품 후 해 상으로 귀국할 때 상륙한 구내에 김대건 신부 기념탑을 세웠다. 이어 1955년 7월 20일 남원(南原) 본당 주임, 1958년 1월 16일 김제(金堤, 현 요촌) 본당 주임으로 부 임하여 월남민들의 정착촌인 황산농원과 만경 공소를 세 웠다. 그리고 1960년 3월 28일 군산 둔율동(屯栗洞) 본 당 주임, 1961년 4월 21일 전주 중앙 주교좌 본당 주임 으로 부임하여 대학생 지도 신부를 겸임하였고, 1962년 3월 29일에는 한공렬(韓조烈, 베드로) 주교의 입원으로 대리 주교를 겸임하였다. 같은 해 9월 17일에는 부주교 를 겸임하여 한공렬 주교의 수행원으로 제2차 바티칸 공 의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김 신부는 1963년에 본당 주간 행사표를 발행하였는데, 이것이 현 전주교구 주보 인 <숲정이>의 모체가 되었다. 또 그는 성당 구내에 3층 규모의 교육관을 겸한 사제관을 신축하였으며, 1964년 덕진(德津) 본당을, 1965년에는 복자(福者) 본당을 분 리 신설하였고, 공의회 이후 신앙심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정통 신앙에 입각한 신자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 다. 1966년 7월 8일 건강상의 이유로 부주교직을 사임하 고 이리 창인동(昌仁洞)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본당 분리를 위한 성당 터를 구입, 이듬해 12월 12일 주현동 (珠現洞) 본당을 신설하였으며, 성무를 제외한 본당 운 영과 관리권을 평신도들에게 맡겼다. 1969년 12월 31 일에는 전주 전동(殿洞)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교구 신학생과 레지오 마리애 지도 신부를 겸임하였다. 그러 던 중 1972년 9월 1일 사무총장에, 9월 6일 부주교 겸 상서국장에 임명되어 공석 중인 교구장직을 사실상 대행 했으며, 1973년 2월 10일 제5대 전주교구장에 임명되 어 3월 19일 중앙 성당에서 주교 성성식과 착좌식을 가 졌다. 김 주교는 명석한 판단력, 투철한 책임감, 타고난 강직 성을 지닌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8년 동안 교구장직을 수행하며 8개의 본당을 신설하여 교세를 신장시켰고, 문 서 행정의 체계를 정리했으며, 평신도들에게 교회의 주 인 의식을 심어 주었고, 평신도 사도직을 강조하여 평신 도 사도직협의회 성장의 초석을 다졌다. 그리고 교구 예 산 편성에서부터 사목 일선에까지 평신도들을 참여시켰 다. 또 교구 산하의 학교에 종교감을 파견하여 가톨릭 정 신에 입각한 인성 교육에 힘썼고, 가톨릭 센터가 지역 사 회의 복음화와 문화 교육의 산실역을 다하도록 기틀을 다졌다. 아울러 교구 사제단의 친목을 도모하는 데도 앞 장서 힘을 썼을 뿐 아니라 사제들의 실력 배양과 인재 양 성을 위해 해외 유학을 적극 추진하였다. 김 주교의 재임 기간은 대부분 유신 시대였다. 그래서 시대적 요구인 교회의 예언자적 소명에 따라 독재 정권 에 맞서 정의와 인권 회복에 앞장서 투쟁하며 교구 신앙 공동체에 예언자적 소명을 각성시켰다. 김 주교가 맨 처 음 위정자들에게 민주 헌정의 실시를 촉구한 것은, 한편 으로 사회 정의 구현에 소극적인 교회의 태도를 질타한 것이었다. 그 후 교구 내에서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한 의 식 교육과 인권 회복, 유신 헌법 철폐를 위한 기도회를 빈번히 개최하도록 했고, 그 결과 교구 사제들이 당국으 로부터 감시와 연행과 투옥, 그리고 집단 폭행을 당했지 만, 1979년 9월 10일 전주교구 주교좌인 중앙 성당에서 "인권과 교권 수호를 위한 전국 기도회"를 열고 '현 정권 의 직무 집행 정지 가처분' 을 주장했다. 이에 정부는 9 월 11일 주한 교황 대사관을 통해 김 주교의 구속 방침 을 통고했는데, 교구 사제단이 12일 긴급 소집되고, 13 일에는 김 주교와 함께 상경하여 김수환 추기경과 교황 대사를 만났으며, 이와 동시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이 서울에 집결하면서 구속 방침이 철회되었다. 그 동안 김 주교는 1973년 3월 주교 회의 상임 위원, 10월에는 의장단 제2 부의장, 1975년 2월 평신도 사도 직 단체 전국 협의회 총재, 1978년 전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총재를 역임했다. 또 1975년 제2차 극동 주교 회의에 참석하였고, 1978년과 1980년 2차에 걸쳐 로마 교황청 방문과 유럽 교회를 순방했다. 그러다가 1981년 4월 10일 건강상의 이유로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은퇴하 여 지내던 중, 1988년 5월 21일 전북 의대 부속 병원에 입원했으나 6월 5일 69세를 일기로 선종하여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金眞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