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준 (1901~1987)

金在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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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목사.

김재준 목사.


목사. 신학자. 교육자. 호는 장공(長空). 1901년 함경 북도 경흥군 상하면에서 태어나 20세에 기독교로 개종, 일본 동경 청산학원 신학부와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 및 웨스턴 신학교에서 구약신학을 전공했으며(1928~1932), 1958년 캐나다 브리티쉬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명예 신 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가 남긴 업적은 한국 프 로테스탄트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지어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1940년 조선 신학교를 설립할 때 중심 인물이 되었다. 당시 일본 식민 통치에 의한 우리 문화의 말살 정책은 극에 달하여 교회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으며, 그 결과 장로교 신학교인 평양 신학교가 폐교되고 선교 사들은 축출되었다. 당시 간도 은진중학교 교목(1937~ 1939)이었던 김재준은 1939년부터 조선 교회의 자주적 힘으로 교회 지도자를 육성하려는 김대현 장로, 송창근 목사 등과 뜻을 합하여 서울에서 조선 신학원 설립에 참 여하였다. 조선 신학원은 그 뒤 조선 신학교, 한국 신학 대학, 그리고 현재의 한신대학으로 발전하였다. 김재준 은 이곳에서 1965년까지 교수, 학장, 명예 학장으로 봉 직하면서 새로운 진보적 신학 교육과 주체적 신학 수립 운동을 위한 신학 교육의 이념과 목표를 다음 다섯 가지 에 두었다. ① 복음 선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실행함 에 있어서 세계적 수준을 구현한다. ② 경건하면서도 자 유로운 연구를 통해 복음적 신앙에 도달한다. ③ 자유로 운 학풍 안에서 칼뱅 신학의 정당성을 재확인한다. ④역 사 비평적 성서 연구 방법론을 자유롭게 소개한다. ⑤ 한 국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덕에 활력을 주는 한국적 신학 을 수립한다. 둘째, 1953년 한국 장로 교회의 분열과 그 과정에서 탄생한 한국 기독교 장로회 교단 창립에서 중심 인물이 되었다. 폐교되었던 평양 신학교는 해방 후 복교되고, 한 국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평양 신학교와 조선 신학교를 모두 교역자 육성의 신학 교육 기관으로 인정하였다. 그 러나 1950년 6 · 25 동란 발발 후 남한으로 피난해 온 대부분의 보수적 · 근본주의적 신학 성향의 목사들과 신 학생들은 김재준의 진보적 신학 사상, 특히 역사 비평적 성서 연구 방법의 교수 내용에 불만을 품었다. 그 결과 장로회 총회는 1951년 조선 신학교의 인준을 철회하고, 1953년 장로회 총회에서 김재준의 교수직과 목사직을 박탈한 후 그를 이단적 신학 사상가로 규정하여 축출하 였다. 이때 김재준은 신학 연구에서 비평적 탐구는 허용 되어야 한다는 것, 경전으로서의 성경을 비판적으로 연 구하는 것이 '하느님 말씀' 으로서 성서가 지닌 구원 능 력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중세기 적 교권 재판으로써 신앙 양심의 자유를 유린하는 것은 종교 개혁의 정신이나 복음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변호하였다. 동시에 그 의 신학적 입장과 신앙적 고백에 견해를 함께하는 장로 회 총회 산하의 목사들과 교회들은 김재준의 파문 철회 를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아니하므로 '한국 기독교 장로회' 교단 설립을 대내외에 선언하고 한국 프로테스 탄트의 진보적 교단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이 한 국 기독교 장로회 교단 창립 선언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비판적 자유 정신과 개혁파의 신학 정신을 드러냈다. ① 모든 형태의 바리사이주의를 배격 하고 복음의 자유를 확보한다. ② 건전한 교리를 세움과 동시에 신앙 양심의 자 유를 확보한다. ③ 노예 적 의존 사상을 배격하 고 자립 자조의 정신을 함양한다. ④ 분파적 고 립주의를 배격하고 세 계 교회 정신에 철저한 다. ⑤ 그리스도를 인간 생활의 모든 부문에 증 언한다. 셋째로, 1970년대 이후 역사 참여의 신학 및 증언적 신학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1961년 군사 혁명 이후 군사 정권은 인권, 언론의 자유, 분배 정의, 민주주의 원리 등을 근대화의 명분 아래 심각 히 유린하였다. 이에 김재준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양심 의 증언과 책임 윤리의 차원에서 예언자적 비판 신학과 역사 참여의 신학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안병무, 서남동,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박형규, 이해동, 이해학 등 자 신의 제자 이거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되 고 대학과 교회의 강단에서 축출당하는 시련 속에서, 1970년 동인지 《제3일》을 창간하여 기독교 사회 윤리의 창달에 이바지하였다. 이 밖에도 김재준은 한국 신문 윤리 위원(1961), 대한 일보사 논설 위원(1972), 삼선 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 원회 위원장 및 민주 수호협의회 공동 의장을 역임(1973) 하였고, 캐나다에서 한국의 인권, 민주주의, 통일을 위해 서 활약하였으며(1974~1983), 1987년 86세로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그가 발표한 수많은 저작과 논문은 모두 장 공 기념 사업위원회가 간행한 《김재준 전집》(金在俊 全 集 : 총 10권, 한신대학 출판부 발행, 1992)에 연대순으로 수 록되어 있다. 김재준의 신학 사상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결 코 쉽지 않다. 그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을 골고루 섭렵하였으나, 칼 바르트의 신 정통주의 신학과 리차드 니버의 사회 윤리신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리차드 니버 의 저서 《계시의 의미》, 《그리스도와 문화》 등을 번역하 였다. 구약성서의 예언자 정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자 유를 기독교의 본질로 이해한 그의 신학은 내재적 초월 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초월적인 것이 끊임없이 현 실재 속으로 육화해 들어와서 현실을 창조적으로, 구 원의 실재로 변화시켜 나간다는 창조적 변혁의 이론이 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세계 도피적이거나 타계 지향적 이 아니라, 역사 현실과 속(俗)의 현실을 우주적 그리스 도의 능력과 구원사의 경륜 안에서 거룩한 생명 공동체 로 변혁해 가면서 열린 마음으로 자유, 정의, 평화, 영원 한 생명이 온 누리에 구현되는 종말론적 미래를 대망하 는 진보적 신학이다. 몸, 물질, 현세, 땅의 질서는 영, 정 신, 내세, 하늘의 질서와 구별되면서도 분리되어 있지 않 고 하느님의 주권 안에서 하나로 합쳐진 전일적 실재라 고 본다. 또 종교가 지닌 교리, 경전, 교회, 신학은 모두 상대적이며 하느님 홀로 절대 영원하다고 생각한다. 그 러므로 그는 한국의 전통 문화와 전통 종교를 긍정적으 로 포용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구원의 진리 체 험을 우리 민족과 인류에게 증언하려 하는 관용적 입장 을 취하였다. 〔金敬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