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준 (1914~1981)
金正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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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김정준 목사.
구약 신학자요 교육가. 장로교 목사. 호는 만수(晚穗). 1914년 11월 6일 경남 동래군 구포(龜浦)에서 태어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평양 숭실중학교, 서울 연희전 문학교, 동경 청산학원 신학부를 거친 후 1943년 귀국 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경주 불국사 역전 구정 교회, 경북 자인 교회, 경북 김천 황금동 교회 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 다. 그러다가 중학교 3 학년 때 얻은 폐결핵의 재발로 1946년 마산 요 양소(현 국립 마산병원)에 입원하여 30개월 동안 투병 생활을 하였다. 요 양소에 들어갈 때 그의 병은 소생 불가능한 상 태였으나, 그는 기적적 으로 소생하였으며, 이 것이 그에게 감격과 열정의 제2의 인생을 가져다 주었다. 요양소에서의 투병 생활 동안 '시편 탄식시' 에 심취하여 후에 석사, 박사 학위 논문을 모두 시편 연구로 쓰게 되 었다. 건강을 회복한 후 그는 1949년 한국 신학대학 교수 1959년 한국 신학대학 학장에 취임하였다. 그 사이 1953년에는 캐나다 임마누엘 신과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하였고, 이어 1962년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 <의지 신앙에 나타난 히브리 경전 연구>(A Study of Hebrew Piety with Special Reference to BATAH)라는 제목의 시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연세대학 교 교목실장(1963),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장(1964) 을 거쳐 1970년에는 다시 한국 신학대학장으로 취임하 였다. 1976년 건강이 악화되어 학장직을 사임하였고, 건강이 회복되자 평교수로서 계속 강의하다가 1979년 65세로 교직에서 은퇴하였다. 그러는 동안 에큐메니칼 적 연합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연세대 연합신학대학 원(1964), 전국 신학대학협의회(KAATS, 1965), 동북 아 시아(일본, 대만, 한국) 신학교협의회(1965) 창설 등에 크 게 기여하였으며, 1981년 2월 3일 서울 수유리에서 선 종하였다. 〔학문과 사상〕 김정준의 학문적 스승은 군켈(Hermann Gunkel)과 폰 라트(Gerhard von Rad)였다. 그는 목회 생활 과 투병 생활 때 특별히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편을 자신 의 학문 대상으로 삼았다. 박사 학위 논문 제목이 암시하 듯이, 그의 시편 연구는 이중적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 하나는 시편 양식 비평적 연구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군 켈의 고전적인 양식 분류 방법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비판을 토대로, '고난' 에서 얻은 자신의 경건과 히브리의 경건을 동일한 범주에 넣 고 그 경건의 고난 신학적 의미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는 군켈의 시 양식 분류가 단순히 형태 분류에만 머 무르지 않고 각 양식의 삶의 자리 규명을 중시한다는 것 을 잘 알았다. 따라서 시편 23편 같은 신뢰의 시-김정 준은 이를 의지시(依支詩)라고 부름-를 탄식시의 종속 양식으로 분류하는 군켈의 의도와 이유를 잘 알고 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의 시가 탄식시의 종속 양식 이 아니라 탄식시와는 별개의 한 독립된 양식을 이루는 것임을 학위 논문에서 증명하였다. 특별히 바이저(A.Weiser), 크라우스(H.J. Kraus) 등의 학자들도 김정준과 비 슷한 입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김정준의 학문적 업적은 여기서 더 앞으로 나아간다. 곧 그는 의지시뿐만 아니라 탄식시의 신앙을 히브리 경 건의 특성으로 이해하였다. 탄식시의 '탄식' 은 그 자체 가 하나의 '신뢰' 이며, 탄식시의 '분위기 급전환' 은 바 로 시인의 신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는 탄식시(후 일 고난시라고 고쳐 부른다)에 표현된 '고난' 의 정체와 그 신학적 의미를 규명하고, 마침내 고난이 곧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 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으며, 이러한 고난과 경건의 신학을 군켈의 양식 비평과 알트, 노트, 폰 라트 의 전승 비평을 토대로 하여 폰 라트의 구원사 신학에 접 맥시켰다. 이렇게 하여 폰 라트의 구원사 신학은 김정준 에게 와서 '고난받는 민족의' 구원사 신학이 된다. 이스 라엘의 선민(選民) 됨은 그의 '고난받음' 에 있다는 새로 운 선민 유형론을 채택한 김정준은 이제 한국민도 선민 임을, 그리고 한국사도 하느님의 구원사임을 선포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신학을 한편으로는 교회의 신앙 고백과,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신학의 새 주제들과 연대 관계를 맺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에서 행 한 <제2 이사야의 목회 신학>(1973)이라는 주제의 강의 와 더불어 말년인 1979~1981년에는 주로 <성서와 설 교>라는 주제의 연재 논문을 쓰는 데 주력하였다(이 시기 의 《기독교 사상》 참조). 동시에, 1970년대부터 김정준의 논문은 두드러지게 해방신학, 정치신학, 수난자의 신학, 민중신학, 희망의 신학, 한(恨)의 신학 등과의 대화를 시 도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이러한 현대 신학에 성서신 학적 전거를 헌상하려는 데서 온 것이 아니라, 현대 신학 주제들이 성서신학적으로 정당한지를 확인하려는 데서 온 것이었다. 한마디로 김정준은 교파를 초월하여 목회 자, 선교자로서의 책임 의식을 남달리 강하게 갖고 있었 던 신학자요 신앙인이었다. 김정준은 1백 편이 넘는 학술 논문을 비롯하여 신앙적 으로 또는 신학적으로 무게 있는 저서를 20권 이상, 역 서를 10권 이상 남겼다. 이들은 대체로 《만수 김정준 전 집》(晚穗 金正俊 全集 : 전 8권, 한국신학연구소, 1987~ 1991)에 수록되어 있다. ※ 참고문헌 대한기독교서회, 《만수 김정준 논집 : 신학과 경 건》, 1981. 〔金二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