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준 (1796~1839)
金濟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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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성인. 회장.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이 냐시오. 자는 신명(信 明). 보명은 제린(濟 麟). 본관은 김해. 최초 의 한국인 사제인 성 김 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의 부친. 충청도 면 천(沔川) 땅 솔뫼(현 충 남 당진군 우강면 松山里)에서 김택현(金澤鉉)의 차남으로 태어나 조부 진후(金震厚, 비오)와 계부 종한(宗漢, 안드 레아)에게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고, 장성하여 고(高) 우르술라와 혼인하였 다. 그러나 조부 진후가 1791년부터 박해를 받은 끝에 1814년 해미(海美) 옥에서 순교하고, 계부 또한 경상도 안동 땅 우련밭(雨蓮田, 현 봉화군 재산면 葛山里)으로 피 신하여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15년 을해박해(乙亥迫害) 때 체포되어 이듬해 순교하자 더 이상 박해를 피할 길이 없게 되었다. 이에 1827년 정해박해(丁亥迫害)가 일어 날 무렵, 부친 택현과 함께 서울 청파(靑坡)를 거쳐 경기 도 용인 땅 한덕동(寒德洞, 현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墨里) 에 정착하였다가 이웃의 골배마실(현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南谷里)로 이주해 살았다. 골배마실에 정착한 김제준의 가족은 1836년 초 모방 (Maubant, 羅伯多祿) 신부가 입국하자 서울의 정하상(丁 夏祥, 바오로)의 집에 유숙하고 있던 그를 찾아가 성사 를 받고 돌아와 더 열심히 수계하였다. 모방 신부는 그 해 4월 이후 지방 순방을 하던 중 골배마실 이웃에 있는 은이 공소에 들렀는데, 여기에서 제준의 장남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12월에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는 한편, 제준을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 후 1839년 기해 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자 7월(음)에 사위 곽(郭) 씨를 앞세운 밀고자 김순성(金順性, 일명 여상) 일당에게 체포 되었다. 즉시 서울로 압송된 그는 포청과 의금부에서 아 들을 외국으로 내보낸 사실을 자백함으로써 국사범으로 취급되어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한 때 배교하였다가 형조로 이송되어서는 배교를 취소하는 동시에 신앙을 굳게 지키고, 9월 26일(음 8월 19일) 서소 문 밖 형장에서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 조신철 (趙信喆, 가롤로)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 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 해 시성되었다. (→ 기해박해 ; 김대건 ; 김진후)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中/ 《기해일기》/ 《推案及勒案》/ 《日 省錄》/ 《가톨릭 사전》/ 《교회와 역사》 219~220호(1993. 8~9) 〔車基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