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피득 (1907 ~ 1954)

金彼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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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피득 신부

김피득 신부


서울대교구 신부. 세 례명은 베드로. 본관은 김해(金海). 황해도 송 화군 풍천 너른골에서 김학선(시몬)과 김종선 (金宗善, 아네스)의 1 남 1녀 중 외아들로 태 어났다. 어머니 김종선 은 송화군 하리면 안농 리 농암촌 공소의 여회 장으로 활약하였다. 11 세에 용산 예수성심신 학교에 입학한 김피득 은 1930년 4월 5일 부 제품을 받고 동성상업학교 을조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다 가 1931년 5월 3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강원도 평강과 이천 본당에서 사목하였고 해방 후 월남하여 덕정리(현 의정부) 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덕정리 성당터를 매각하고 의정부에 1,625평의 부지를 매입하여 임시 성당과 사제 관을 마련하였다. 6 · 25 동란의 발발로 피난하였다가 청주(현 청주 서운동) 본당 주임(보좌?)을 거쳐(1952) 김포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었다(1953) 김포읍 걸포리 북변리 로 본당을 이전하고 전교하던 중 1954년 11월 5일 간경 화로 선종하였다. 한편 김 신부는 추를 이용하여 광맥과 수맥 등을 탐지하는 일에 흥미를 갖고 연구하였으며 그 방면의 권위자로 유명하였다. <천국의 존재>(1934. 5), <불국(佛國) 성 루가협회>(1934. 10), <불란서 국민의 루 르드 참배>(1934. 11), <소비에트 러시아 전망>(1935. 4~5), <김범우 순교 150주년>(1935. 9), <소 주교(蘇主 敎)의 최후>(1935. 10) 등을 《가톨릭 청년》에 기고하였고, <가톨릭 완덕론>(1936. 11~12), <가톨릭 덕행론>(1937. 9~10), <용덕>(勇德, 1937. 11), <가톨릭 수덕론>(1938. 11) 을 《가톨릭 조선》에 기고하였다. (→ 김포 본당 ; 의정부 2동 본당) ※ 참고문헌  《교회와 역사》 97호(1983. 7).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