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배 (1905~1960)

金賢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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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김현배 신부(1947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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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김현배 신부(1947년 8월 24일).


전주교구 제3대 교구장. 주교. 세례명 발도로메오. 본 관 김해. 김대건 신부와 같은 문중으로 1905년 7월 15 일, 김현숙(요셉)과 김 말가리다의 아들로 전북 익산군 여산면 대성리(臺城里) 성치(城峙)에서 태어났다. 그 후 부모가 안대동(安大洞)으로 이사하여 10여 세까지 지내 다가 다시 나바위(羅岩)로 이사했다. 1920년 9월 14일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 철학과와 신학과를 졸 업하고 1930년 5월 21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다음 날 대구교구 주교좌인 계산동 본당(桂山洞) 보좌 신부로 발령받아 신암 · 화원 공소를 담당하였고, 1940년 7월 20일 계산동 본당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다. 이때 김 신 부는 복음 선교와 청소년 교육에 역점을 두는 한편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 공경 등의 신심을 강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교회에 대한 탄압이 심해져 사목 활동에 제약을 받아오던 1942년 1월 20일, 성 유스티노 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가 5월 20일 전주교구 나바위 본당 주임 신부로 발령을 받고 7월에 부임했다. 그러나 김 신 부는 사제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전임 김영호(金永 浩, 멜키올) 신부가 투옥된 후 사제관은 폐쇄되었으며 열쇠는 경찰서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당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혼자서 사랑에서 지내며 성당 일을 도맡아 하였는데, 요시찰 인사로 감시 를 받았으므로 주재소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그를 호출 했다. 그러다가 1944년 11월 전주교구 경리부장으로 전 임되었으며, 이듬해 2월 14일 교구 경리부장 겸 재단 이 사로 정식 임명을 받았다. 당시 전주교구는 교구 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7년 동안 신학생을 양성하지 못했는데 김 신부는 교구 경리부장으로 부임하여 3명을 신학교에 보냈다. 1946년 1월 22일 그는 전주교구 교구장 서리로 선임 되었다가 1947년 7월 7일 제3대 교구장에 임명되어 8 월 24일 자신의 영명 축일인 발도로메오 축일에 착좌식 을 가졌다. 이후 1948년 전동 성당 구내에 무료 진료소 를 설치하였으며 이를 발전시켜 다음해 성모병원으로 개 원했고, 1949년 성심여자중학교, 1952년 성심여자고등 학교, 1960년에는 해성중학교를 설립하였다. 또 1949 년 18개 본당에 가톨릭 연맹을 조직하여 신자 배가 운동 에 힘써 오던 중, 1950년 6 · 25 동란이 일어나 8월 2일 체포되었으며, 다음날 4명의 교구 신부, 1명의 부제와 함께 전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9월 27일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평소에 그는 순교자에 대한 공경과 순교 사 적을 찾고 기록하는 일에 관심이 깊었고, 특히 부부 동정 순교자 유 요한과 이 루갈다에 대한 공경이 지극하여 묘 소를 자주 방문하였는데, 5명의 신부와 함께 구출된 것 도 부부 동정 순교자의 도움이었다고 했다. 한편 1949 년 농지 개혁법 실시로 교회 전답이 경작 농민에게 분배 되고 정부로부터 지가 증권으로 보상받게 되면서 전주교 구에서는 1951년 10월 12일, 보상받은 지가 증권으로 '전북제사' (全北製絲)를 매입했으나 운영 부실로 인한 경영난으로 1956년에 이를 매각하였다. 전쟁 이후 김 신부는 교구장으로서 파괴된 성당의 복 구에 힘쓰는 한편 초라한 성당 건물들은 현대식 건물로 신축하고, 1군(郡) 1본당을 목표로 하여 본당 신설에 주 력하였다. 이와 같은 결심은 전쟁 때 옥중에 있으면서 성 모께 '교구 내의 성직자가 한 사람이라도 희생되지 않으 면 성당을 많이 세워 성모께 봉헌하겠다' 고 한 약속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교구장으로 취임하여 1960년대까지 10개의 본당을 신설하고 9개의 성당을 신축하는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1957년 3월 7일 전주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됨과 동 시에 그는 '아그비아' 명의 주교에 임명되어, 5월 21일 중앙 성당에서 성성식 및 은경축을 가졌다. 그리고 6월 28일에는 주교좌를 전동 본당에서 중앙 본당으로 이전 하고 축성식을 가졌다. 1959년 4월 23일 사제 회의를 열어 교구의 숙원인 주교관 신축을 결의하고, 전주시 중 노송동 2가 361번지 언덕에 마련한 17,000평의 부지 에, 413평 규모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9월부터 착공 하였으나 지병인 고혈압으로 1960년 4월 30일, 56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영결식은 5월 4일 중앙 성당에서 거 행되었는데, 시신은 평소 주교관의 완공을 고대하던 김 주교의 마음을 헤아려 주교관 뒷동산에 안장되었다가 1987년 자치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 참고문헌  金九鼎 · 金榮九, 《天主教湖南發展史》, 천주교 전 주교구, 1964/전주교구 주보, <숲정이>. 〔金真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