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섭 (1915~1965)
金洪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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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섭 바오로.
법관. 가톨릭 사상가. 세례명 바오로. 전북 김제군 금 산면 금산리(金山里)에서 1915년 8월 28일에 태어나 원평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 서 일하다가 링컨의 전기를 읽고 법률을 공부하기로 결 심하였다. 1939년 일본에 유학하여 니폰(日本)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940년 조선 변호사 시험에 합격, 이듬해 귀국하여 서울에서 김병로(金炳魯)와 합동 변호사로 활 동하였다. 1944년 김자선(金子善, 엘리사벳)과 결혼하 고, 해방이 되자 서울 지방 검찰청 검사로 임용되었다. 1946년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 위조 지폐 사건을 맡아 명성을 떨쳤으나, 검사직에 회의를 느껴 사임하고 농사 를 짓다가, 김병로의 권유로 서울 지방 법원 판사가 되었 다. 1948년부터 중앙대학교에 법리학(法理學) 강사로 출강하기도 하였다. 1950년에 서울 고등 법원 판사, 1953년에 서울 지방 법원장으로 승진하였으나, 6 · 25 동란 때 절친한 친구를 잃고 회의에 빠져 사찰로 다니며 방한암(方漢岩), 김일엽(金一葉) 스님 등과 토론하던 중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을 만나 1953년 9월 거의 동 시에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이 개종은 한국 지성 사에서 의미 깊은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도 법관으로서의 생애〕 가톨릭에서 새 삶의 환희를 발견한 그는 많은 글을 발표하고 시집 《무명》(無明 1954), 수필집 《창세기초》(創世記抄, 1954)를 펴냈다. 이 후 그의 전교로 법조계의 인사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 고, 이것이 오늘날 '가톨릭 법조인회' 의 초석이 되었다. 1956년에 서울 고등 법원 부장 판사로 전임되었다가 1959년에 전주 지방 법원장으로 부임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향토애와 신앙심을 연결시켜 전주 지방의 순교 사 적지를 순방하고, 치명자산(致命者山)에 순교자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동정 부부의 묘비를 세운 뒤 루갈 다를 가리켜 '한국 천주교의 춘향(春香)' 이라 칭송했으 면서도 비문에는 '동교 후생(同敎後生) 나그네 세움' 이 라고만 적어 넣었다. 1960년 대법원 판사 가 되어 다시 서울로 올 라온 그는 대법관 직무 대리로 사법부의 최고 직에 오른 뒤 언제나 신 앙과 양심에 따라 바른 재판을 하려고 애썼고, '인간이 인간을 재판할 수 있는가? 고민하였 다. 그가 전국 법관들에 게 설문지를 돌려 조사 한 결과를 토대로 <형 (刑)의 양정(量定)에 관한 소고>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도 이런 취지 에서였다. 1960년 12 월에는 수상집 《무상 (無常)을 넘어서》(正音 社)를 펴냈는데, '무상 에서 상생(常生)에로' 라는 글에서 보여 주듯이 구도(求 道)와 확신의 행로를 솔직 담백하게 그려 놓고 있다.이 책은 1971년에 성바오로출판사가 인수하여 《무명》, 《창 세기초》를 합쳐 합권으로 발간하였다. 또 김홍섭은 신앙 서적을 사서 서대문 교도소의 사형수들에게 차입하여 주 었는데, 그중 김창룡(金昌龍) 중장 살해범으로 사형 판 결을 받은 허태영(許泰榮) 대령을 가톨릭으로 귀의시킨 미담은 '판사와 사형수의 교의(交誼)' 로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1960년 4 · 19에 의해 성립된 제2 공화국에서 김홍섭 은 법률가로서의 청정한 자세를 지켰다. 장면(張勉) 총 리와 개인적으로 절친한 사이였지만, 노기남(盧基南, 바 오로) 주교를 통하여 민의(民意)를 간접적으로 전하려고 애썼다. 사법부의 수장(首長)까지 될 것으로 촉망되던 그는 1961년 5 · 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그 해 9월 광 주 고등 법원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2년 간은 사실상 생(生)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시기였다. 그 는 탈속(脫俗)의 법관으로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제3회 에 가입하였고, 재속 성직자의 면모를 실천하던 중 1964 년 3월에 서울 고등 법원장으로 올라왔으나, 간암 발병 으로 6개월 간 고생하다 1965년 3월 15일 사직동 자택 에서 51세로 선종하였다. 〔사 상〕 김홍섭의 사상은 크게 법 사상과 가톨릭을 포 함한 종교 사상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를 다시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연법 사상 : 김홍섭의 법 사상은 해방에서 5 · 16에 이르기까지, 국가나 법 현실과 결부되는 실정법(實定法) 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회의에서 출발하였다. 합목적적 이고 가변적인 실정법을 초월하고 궁극적으로 정당한 법 을 추구하여 법 → 양심 → 이성 → 절대자' 라는 자연법 적 사고로 발전하였다. 그러므로 "악법도 법이란 말을 법언집에서 지워 버릴 날을 기약할 수 있음직도 한 노릇 이다"고 하였고, "순리(順理)의 법을 법대로 다루어 쓸 때 법관은 보람을 느낀다" 고 하였다. 또 "기본적 인권은 법의 위에 있고 인류의 공동 운명은 민족의 그것보다 크 다고 보는 것이 나의 법관으로서의 기본 신조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김홍섭의 자연법 사상은 한국 현대법 사상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학과 재판 철학 : 김홍섭의 법 사상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것에 기초한 재판 철학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는 "어떤 근거에 의하여 인간을 재판할 수 있나?" 고 고 민하였고, 법관도 피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고 하였다. 슈바이처와 간디를 존경했던 그는 "보이는 형제와 이웃을 미워하면서 어찌 안 보이는 나라와 뭇사 람을 사랑하겠는가" 하였고, "나는 일찍이 애국자를 자 부하여 본 일이 없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 에 대해 성찰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나' 와 더불 어 반목하고, 상존하고, 회의하고, 절망하고, 또다시 모 색하고 ··· 어느 하루 '나' 와의 대립을 의식함이 없이 지 낸 날이 없었다" 고 하였다. 가톨릭 신학 사상 : 호교론적, 비교 종교론적으로 쓴 <어떤 프로테스탄트에게> 등 많은 글들은 김홍섭의 가톨 릭 사상가로서의 깊이를 보여 준다. 어릴 적에 프로테스 탄트에 다녔고 불교에도 경도되었다가 가톨릭으로 개종 한 그는 "영원한 희망을 위한 망루를 황당한 토대 위에 세울 수는 없다. 이리하여 지식은 또 마침내 신앙에 일치 될 수 있을 것임을 나는 믿는다" 고 하였고, "동방인의 체 질을 아니 느낄 수 없는 우리에게, 가톨릭에서의 정(靜) 이란 종교의 기조는 동양에의 향수로서 실로 매력적인 인력이 아닐 수 없다" 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톨릭에 는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인 것에 대한 해답이 있다고도 하였다. 자연 신학 : 그림을 그리고, 등산을 하고, 천체 망원경 으로 성좌를 연구하기도 한 그는 "내 취미는 내 세계관 과 직결되고 있다", "별의 성음(聲音)을 듣는 것은 부질 없는 낭만이 아니요 내 인생의 창(窓)이요 숨통이다"고 하였다. 그는 또 "자연-조물(造物)에의 자애와 깊은 감 명은 그를 있게 한 이에 대한 이해와 또 그와의 거리를 가깝게 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고 하면서, 존재 유비(存 在類比, analogia entis)에서 신앙 유비(analogia fidei)로 자 연스럽게 연결짓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에게서도 자연 신학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 진다. 순교자 신앙 : 법관으로서 관용차도 타지 않고 항상 잠바 차림과 흰 고무신에,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던 그는 틈틈이 지방으로 전교 여행을 떠났다. 특히 교회사에 기 록된 순교자들의 유적지를 돌보았는데, "진지하려는 교 도들에게 순교자의 정신과 사적은 훌륭한 나의 도표(道 表)요 봉화(烽火)이며 위안이요 격려이다' 고 하였다. 그 가 언제나 다산(茶山) 문집을 책상 위에 두었던 것도 선 조들의 신앙과 지혜를 전승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실천 신앙 : 김홍섭은 《준주 성범》을 누더기가 되도록 읽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실천하려고 애썼다. 김홍섭을 '사도 법관' (使徒法官)이라 부른 장면 박사는 "그는 범 상한 교우만이 아니었고 모든 덕행을 뛰어나게 실천하여 일생을 청빈하고 검소하게 살았고, 말을 삼가고 수계에 열심하여 그야말로 덕이 몸에 배어 그윽한 향기를 풍기 는 산 성인이라는 인상까지 주었다"(<가톨릭 시보>, 1965. 3. 28)고 하였다. 또 윤형중 신부는 김홍섭을 '남을 위해 산 사람' 이라고 불렀고, 장순용(전 서울 고등 법원장)은 그를 '비범한 가톨릭적 행자(行者)' 라 불렀고, <법조시보>지 는 '법의(法衣) 속에 성의(聖衣)를 입은 법관' 이라 하였 고, 한승헌 변호사는 '절망의 생명을 어루만지던 대부 (代父)' 라 설명하였다. 김홍섭에 대한 관심과 평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높아지고 있다. 1972년 율곡 문화원(栗谷文化院)에서는 율곡 법률 문화상을 추서하였고, 1975년 최종고(崔鍾 庫)에 의해 평전(評傳) 《사도 법관 김홍섭》이 출간되었 으며, 1983년에는 법의 날 기념 공로 표창장이 미망인 김자선 여사에게 수여되었다. 1985년에는 한국 종교학 회에서 20주기를 기념하는 심포지엄을 서울과 광주에서 개최하여 김홍섭의 생애와 사상을 재평가하였고, 같은 해 《정경 문화》(政經文化)지에서는 그를 '해방 후 한국 인물 40인' 의 한 명으로 뽑았다. 또 동아일보사에서 낸 《법에 사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김홍섭의 삶과 사상을 평가하는 많은 문헌들이 나오고 있다. 이처럼 그는 현대 한국의 법조사 · 종교사 · 지성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 는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 참고문헌 <한국 법조인 11인>, 《신동아》, 1965. 1/ 韓龍煥 · 徐 相堯, 《福音의 證人》,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2/ 李炳璘, <栗谷思 想과 김홍섭의 法律思想>, 《栗谷思想論叢》, 율곡문화원, 1973/ 崔鍾 庫, 《使徒法官 金洪燮》, 육법사, 1985/ 崔鍾庫, <김홍섭과 교회사의 관심>, 《교회와 역사》 제55호, 1980. 4/ 李英根 외, 《法에 사는 사람 들》, 三民社, 1984/ 崔鍾庫, <김병로와 김홍섭>, 《法과 宗敎와 人間》, 三英社, 1984/ 許奎, <罪囚의 代父 김홍섭>, 《新亞日報》, 1975. 5. 2~8/ <해방 40년의 한국 인물 40人選>, 《政經文化》, 1985. 1/ 崔鍾庫, 《위대한 法思想家들 III》, 學研社, 1985/ 《한국 인명 사전》 《기독교 대백과 사전》/ 《가톨릭 사전》/ 《한국 민족 문화 백과사전》. 〔崔鍾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