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임과 김효주
金孝任 - 金孝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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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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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질을 당하는 김효임 골롬바(탁희성 작).
자매 성인. 동정녀. 언니인 김효임(1814~1839)의 세례 명은 골롬바, 동생 김효주(1815~1839)의 세례명은 아네 스. 서울 근교에 있는 강촌(혹은 밤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래 교우 집안은 아니었으나 부친이 사망한 뒤 모친과 오빠(혹은 동생) 김 안토니오, 골롬바와 아녜 스, 그리고 여동생 글라라가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 교하였으며, 얼마 되지 않아 매우 열심한 신자들이 되었 다. 특히 골롬바와 아녜스, 글라라의 수계하는 태도는 남 의 모범이 될 정도였는데, 모두 오빠 안토니오의 집에 살 면서 일찍부터 동정을 지킬 결심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가 한창이던 5월 3일에 한 밀고자의 인도를 받은 포졸들이 안토니오의 집을 포위하 게 되었다. 이때 안토니오와 가족들은 미리 소문을 듣고 도망하고, 골롬바 · 아녜스 자매만이 체포되어 서울 포도 청으로 압송되었다. 포장은 처음부터 그들 자매를 배교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로 유혹하였고, 이들이 그의 제안을 거절하자 여러 차례 형벌을 가하면서 특히 다리를 모질게 고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금도 굴함이 없이 오빠가 피신한 곳이나 서적이 있는 곳을 대기는커녕 교리를 이 해시키려 하거나 침묵 속에 기도할 뿐이었다. 포장은 이 에 그들의 등에 글자를 쓰게 하고는 불에 달군 꼬챙이로 글자를 13군데나 뚫게 하였지만, 이 방법으로도 배교를 이끌어 낼 수는 없었다. 고문을 당하는 가운데 이 자매가 설명한 교리는 바로 "마음과 몸을 조촐이 하여 천지(天 地) · 신인(神人) · 만물(萬物)을 조성하신 대군 대부를 공경하고,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오"(《기해일기》 63a)라는 것과 "제사는 헛된 일이라. 세상 옥(獄)에 갇힌 자라도 자손들이 생일이나 기일에 진수 성찬을 차려 놓 고 청하여도 자기 임의로 올 수 없거늘 하물며 지옥에 갇 힌 자가 어찌 나와서 제사를 흠향할 수 있으리오"(《기해 일기》 64a)라는 내용으로, 이것은 당시의 순교자들이 설 명하던 기본 교리인 동시에 자신들의 동정 지키는 이유 를 잘 설명한 말이었다. 이때 포장은 그들의 옷을 다 벗 기도록 하고 형벌을 가하였으며, 그대로 죄수들이 있는 옥으로 보내 갖은 능욕을 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 자매는 평시에 나타나지 않는 힘을 부여받았고, 죄수들 도 보이지 않는 힘에 눌려 그들의 순결을 빼앗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5월 12일 골롬바 · 아녜스 자매는 형조로 이송되었다. 여기에서도 그들은 신문을 받으면서 포청에서 설명했던 교리를 다시 한번 설명하고는 그곳에서 당했던 능욕에 대해 형조 판서에게 항의하였다. 그러자 형조 판서는 그 들의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포장과 형리들을 꾸짖고 는 그중 몇몇을 유배형에 처하였다. 그 후 동생 아녜스는 또다시 형벌과 유혹을 받았지만, 이를 신앙으로 극복하 고는 1839년 9월 4일(음 7월 26일) 박후재(朴厚載, 요 한), 이연희(李連熙, 마리아)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언니 골롬바는 당시 여러 차 례 염병에 걸려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리고 옥에 갇힌 지 5개월 후인 9월 26일(음 8월 19일) 전경협(全敬俠, 아 가다),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 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들이 순교한 뒤 오빠 김 안토니오는 교회 일에 참여해 1861년에 리델(Ridel, 李 福明), 랑드르(Landre, 洪) 신부 등을 조선에 입국시키는 데 앞장섰다. 골롬바 · 아녜스 자매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 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기해박해)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中/ 《기해일기》/ 《承政院日記》/ 《日省 錄》. 〔車基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