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후상 (1901~1983)

金厚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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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상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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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상 신부.


전주교구 신부. 세례명 바오로. 일명 후생(後生). 본관 경주. 구교우 가정의 자손으로 1901년 6월 24일, 전북 진안군 백운면 주암동에서 모범적인 회장으로 존경받던 부친 김한서(金漢瑞, 니고나오)와 모친 최성녀(崔性女, 루치아) 사이에서 9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1세 때 진안 어은동 본당 김양홍(金洋洪, 스데파노) 신부의 권유를 받고 본당에서 운영하는 영신학교(永信學校)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914년 10월 3일 대구 성 유스티 노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라틴어와 중학 과정, 고 등과, 철학과를 거쳐 1926년 5월 29일 신학과 졸업과 동시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926년 5월 30일 신설 본당인 경남 통영군 옥포(玉 浦) 천주교회 주임 신부로 부임한 후 1942년 1월 20일 까지 재임하여 '옥포 신부' 라는 별호가 붙여졌다. 여기 에서 그는 1927년에 성당 수리와 종을 매입했으며, 강 습회를 개강하였고, 이듬해에는 성당을 증축 수리하고 대지를 확장하는 한편 통영(현재의 충무) 성당을 신축했 으며, 10월 1일 본인 부담으로 무료 교육의 학교를 설립 하였다. 이 학교는 그 후 10년 간 계속되었다. 1929년 5 월 25일 통영 읍내를 분리시켜 본당을 신설했으며, 왜구 리 강당 대지를 매수하고 본당 대지도 다시 확장하였다. 1930년 학교를 신축하고, 1931년에는 지삼도 경당을 신축하였다. 1933년 성당과 사무실 등 부대 건물을 신 축하였으며, 1934년에는 두동 경당을 신축하였다. 같은 해 9월 26일에는 장승포읍 공소를 분리하였고, 1935년 에는 명진 공소에 성당과 사무실을 신축하고 옥포 본당 에서 분리시켜 6월 15일 명진(明珍, 현 거제) 본당을 신 설하였다. 1937년에는 장승포 공소 경당을 신축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일제의 교회에 대한 간섭이 심 해지자 김 신부는 여러 차례 경찰서에 호출되는 등 사목 활동을 감시받았다. 잠시 쉴 겨를도 없이 바쁜 사목 활동 을 하던 중 1941년 12월 7일 대구 명치정(明治町, 현 계 산동) 본당 주임으로 전출 명을 받고 1942년 1월 20일 부임하였다. 그러나 부임한 지 몇 달이 안된 1942년 5월 5일 고향 인 전주교구로 전출 명을 받고, 5월 15일 전주 전동(殿 洞) 본당 신부로 부임하였다. 1944년 6월 8일 군산 둔 율동(屯栗洞) 본당 주임 신부로 전임되었는데, 일제의 단말마적인 탄압으로 매사에 경찰들의 미행과 삼엄한 감 시를 받았다. 군산에 부임해서는 본당이 침체 상태에 빠 져 있어 교적을 들고 신자를 찾아 나서는 것이 일과였고, 생계가 어려워 본인의 침구와 생활 도구를 팔아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허물어져 가는 성당과 사무실을 수리하며 재건하였다. 그러던 중 1947년 4월 16일 교구청 경리부장 (당가)으로 임명되었다 가 건강이 나빠져 1948 년 8월 20일 나바위〔羅 岩〕 본당 주임으로 전임 되었다. 이 본당에서 그 는 1949년 8월 19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를 초청하여 유치원과 시 약소(진료소)를 설립하여 경영하도록 했다.그리고 1952 년은 성 김대건 신부가 황산포에 상륙한 110주년이 되는 해였음으로 나바위 성당 화산(華山)에 기념비를 세울 계 획을 세워 모금을 하였으며, 1953년에는 나바위 성당 초 대 주임 신부인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신부의 공적 기념비를 세웠다. 1954년 11월 6일 주교 대리와 평의원으로 선임되었 다가, 이듬해 10월 17일 주교 대리와 평의원직을 사임 하고 중앙 본당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다가 1956년 5월 5일 다시 이리 창인동(昌仁洞) 본당 신부로 전임되었다. 1957년 8월 26일 임실(任實) 본당 주임 신부로 부임하 여 덕치 공소와 물우리 공소를 세우고, 1958년 8월 29 일 오늘의 임실 성당 신축 공사를 착수, 1959년 5월 10 일 성당 · 사제관 · 수녀원을 완공하여 준공식을 마치고 14일에는 성당 축성식을 가졌으며, 1961년 1월 수녀원 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1961년 7월 1일 교구 상서국장 으로 부임하여서는 교구의 성사 문서를 정리하여 문서 보관의 기틀을 닦았다. 1962년 4월 빈혈증으로 성모병 원에 입원하였다가 7월 9일 황등(黃登) 본당 주임 신부 로 부임하여 1963년 9월 1일 성당 축성식을 가졌다. 1967년 6월 24일 은퇴하여 해바라기 농장에 거주하였 고, 1975년 정양소로 거처를 옮겨 지내다가 1983년 10 월 20일 83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대주교의 말처럼 김 신부는 한국 모든 사제들의 '모범' 이었다. 그는 평생 건강에 시 달리면서도 사제의 영성 생활과 사목 활동에 철저하였 고, 주일 공소 예절에 필요한 강론을 매번 등사하여 공소 로 보냈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본당에서는 손수 목수 일로 성당 의자와 비품을 제작하였고 철저한 내핍 생활 로 본당 살림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는 육정을 끊고 사심을 두지 않았으며, 사제로서의 신심 생활에 성 실하였다. 김 신부는 평생 수전증에 시달리면서도 역사를 기록하 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옥포 본당에 재임하던 1939년에는 거제도 천주교회 약사인 《거제도 천주교 연 혁》(巨濟島天主教沿革)을 지었으며, 1940년에는 자신 의 가력인 《경주 계림 김씨 문중 천주교 약사》를 엮었고, 1953년에는 《전주교구 화산(나바위) 천주교회 약사》를 저술하여 간행하였다. 또 김 신부는 사목에 필요한 자료 를 수집하여 엮어 놓는 데도 특별하였다. 옥포 본당에 재 임하는 동안은 신심에 필요한 각종 자료들을 모아 공책 에 적어 묶었고, 거제도에 전해 오는 <천주가사>를 수집 하여 필사본으로 남겼으며, 천주가사에 곡을 붙여 전례 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경향잡지》 창간호부터 1937년 까지의 목록을 색인하여 공책으로 엮었다. 〔金真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