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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1898~1966?)金善永2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요셉. 본관은 경주(慶州). 병오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김준원(金俊遠, 아니 체도)의 손자. 1898년(광무 2) 8월 15일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청계리 206번지에서 김석오(金錫午, 세자 요한) 와 이치도(李致道, 마리아)의 5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 다. 7~8세부터 하우현(下牛峴) 본당 르 각(Le Gac, 郭 元良)

김선영 (1898~1966?)
김성수 (1891~1955)金性洙2

언론인. 교육가. 정치 가. 본관은 울산. 호는 인촌(仁村). 세례명은 비오. 전라북도 고창에 서 호남의 갑부 김경중 (金暻中)의 넷째 아들 로 태어나 3세 때에 큰 아버지 기중(棋中)의 양자가 되었다. 1906 년 전라남도 창평에서 영어를 공부하였고, 1908년 군산의 금호학 교(錦湖學校)에서 공부 하였다. 그 해 10월 새 학문을 배우고자 일본으로 건너

김성수 (1891~1955)
김성우 (1795~1841)金星禹2

성인. 축일은 9월 20일. 회장. 세례명은 안토니오. 본 관은 경주. 이름은 우집(禹集)이고, '성우' 또는 치윤(致 允)은 그의 자이다. 경기도 광주 구산(龜山, 현 경기도 광 주군 東部面 望月里)에서 김영춘(金永春)과 청주 한씨(韓 氏)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부유하면서 도 인심 좋기로 유명하였는데, 성우 자신은 성품이 강직 하고 도량

김성우 (1795~1841)
김성임 (1787~1839)金成任2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마르타. 경기도 부 평 출신으로 결혼에 실패한 후 상경하여 장님 점쟁이와 재혼했는데, 그 집안에서 이미 천주교를 알고 있던 터라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되었다. 그 후 외교인이던 남편이 사망하자 미신을 끊고 신앙 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교우 들의 집을 전전하였으며, 어렵게 생활하는 가운데서도 인내와 극기로써 신앙을 지켜냈다

김성임 (1787~1839)
김성진 (1955~1983)金成珍2

전주교구 신부. 세례 명 토마스. 본관 경주. 구교우 가정 출신. 1955 년 4월 8일, 전북 김제 군 금산면 화율리(수류 본당)에서 김용기(바오 로)와 조남순(루시아) 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67년 전 주 남국민학교, 1970년 전주 남중학교, 1973년 대구 대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대건 신 학 대 학 에 입 학 하여 1979년

김성진 (1955~1983)
김성학 (1870~1938)金聖學2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알렉시오. 평남 순천군 은 산(殷山)에서 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최 아가다의 넷 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 친 김 프란치스코 사베 리오는 1864년 베르뇌 (Berneux, 張敬一) 주교 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 주교의 평안 · 황해도 전교 때 수행하였고, 병 인박해 후 황해도 · 강 원도 · 평안도에서 로베 르(Robert, 金保

김성학 (1870~1938)
김성환 (1911~1982)金成煥2

대구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빅토리오. 1911년 8월 12일에 태어나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거쳐 덕원(德源) 신학교를 졸업한 후 1940년 3월 25일 연길교구(延吉敎 區)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간도 훈춘(琿春) 본당의 보좌 신부로 사제 생활을 시작하였고, 1943년 용정 상시(龍 井上市) 본당의 주임 신부로 전임되었다. 8 · 15 해방 후 간도를 점령한

김성환 (1911~1982)
김세박 (1761~1828)金世博2

정해박해(丁亥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암브로시 오. 관명은 언우. 일명 군미.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희생 자인 김범우(金範禹, 토마)의 친척으로 서울의 역관 집 안에서 태어나 교회 창설 직후에 입교하였다. 입교한 뒤 아내와 자식들이 천주교를 배척하여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1791년 이후 가족들을 떠나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다니면서 교회

김세중 (1928~1986)金世中2

조각가. 세례명 프란치스코. 경기도 안성 출생. 1947 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학년 재학 중 제1회 국전(國 展)에 '청년상' (青年 像)을 출품하여 특선의 영예를 차지하면서 미 술계 에 입 문 하 였 다 . 1950년 서울대학교 미 술대학과 1952년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30 여 년 동안 모교에 재직 하면서 수많은 조각가 를 배출하고 1천여 점 에

김세중 (1928~1986)
김수환 (1922~ )金壽煥2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세례명은 스테파노. 본관은 광 산(光山). 김동한(金東漢, 가롤로) 신부의 아우. 경북 대 구 남산동에서 김영석(金永錫, 요셉)과 서중하(徐仲夏, 마르티나)의 6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조부 때부터인데, 조부인 김보현(金甫鉉,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戊辰迫害) 때 충남 논산군 연산

김수환 (1922~ )
김순성(?~1862)金順性2

배교자요 밀고자. 세례명은 요한. 일명 여상.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자 자신의 출세를 위해 정 하상(丁夏祥, 바오로),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유진길 (劉進吉, 아우구스티노),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등 지 도급 교우들을 밀고하였고,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의 복사인 정화경(안드레아)을 속여 포졸들을 주교의 거 처로 인도하

김승립 (1943~1984)金昇立2

예수회 신부.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1943년 11월 22 일 인천시 중구 북성동에서 김윤묵과 김복강(점마)의 2 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1970년 연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진학하였고, 1972년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1974년 9월 연세대학교 에서 동양 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동성고등학교에 서 국민 윤리와 종교

김승립 (1943~1984)
김승연 (1874~1945)金承淵2

신부. 세례명 아우구 스티노. 본관은 경주. 1868년 8월 14일 울산 장대벌에서 순교한 김 종륜(金宗倫, 루가)의 후손. 1874년 2월 28 일 경북 영천 용평(龍 坪)에서 태어난 김승연 은, 일찍이 성소를 받고 어린 나이인 1884년 페 낭으로 유학을 떠났다 가 1892년 7월 12일 귀국하여 용산 예수성 심신학교에서 사제 수업을 계속, 이듬해 5월

김시우 (1781~1815)金時佑2

을해박해(乙亥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알렉시오. 일명 시우재. 본관은 연산(連山). 충청도 청양(靑陽)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반신 불수의 몸이었 으나 신앙만은 굳게 지키면서,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며 교우들의 애긍으로 생활하였다. 또 글을 쓸 줄 알았으므 로 한 손으로 교회 서적을 필사하기도 하였고, 언제나 신 자의 본분을 지키면서 교우들

김아기 (1790~1839)金阿只2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아가다. 서울의 외 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을 모르고 살다가 결혼 후 장 년에 이르러 친정 언니의 권유로 교리를 배웠다. 본래 기 억력이 나빠 12단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여 세례를 받을 수 없었지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하 여 지성으로 신앙 생활을 하던 중 1836년 9월(음) 김업 이(金業伊, 막달

김아기 (1790~1839)
김양선 金良善(1907~1970)2

장로교 목사요 교회 사가. 호는 매산(梅山). 1876년 만주에서 한국 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된 백홍준(白鴻俊)의 외손. 평북 의주군 피현 면 당후동(堂後洞)에서 김관근(金灌根) 목사와 백관성의 4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나 중원학교(重遠學校)와 선천(宣川)의 신성중학교(信聖中學 校)를 졸업한 뒤 평양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學校)에

김양선 金良善(1907~1970)
김양홍 (1874~1945)金洋洪2

전주교구 초대 교구장. 신부. 세례명 스데파노. 본관 광산. 구교우 가정의 자손인 김덕련(金德練, 루가)과 김 세실리아의 3남 중 차남으로 전북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 만석동에서 태어났다. 1888년 9월 6일 예수성심신학교 에 입학, 삭발례 · 수문품 · 강경품 · 구마품 · 시종품을 거쳐 1900년 5월 10일에 부제품을 받고, 그 해 9월 22 일 사제

김양홍 (1874~1945)
김업이 (1774~1839)金業伊2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막달레나. 당시의 교우들 사이에서는 '복이의 누이' 라고 불렸다. 어려서부 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항상 독실한 신앙 생활 을 하면서 수정(守貞)을 원했으나, 모친의 반대로 교우 청년과 혼인하였다가 중년에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노모가 성격이 괴팍하여 여러 가지 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극진

김업이 (1774~1839)
김여삼 金汝三(?~?)2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의 배교자요 밀고자. 충청도에서 태어나 형제가 모두 입교한 뒤 박해를 피해 서울로 이주하였으나, 그만은 형제들의 충고에도 불구하 고 냉담하면서 불량배들과 어울려 무절제하게 생활하였 다. 그러던 중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가난했던 그는 같은 고향 출신인 교우 이안정(李安正) 등을 위협하여 재물을 갈취하였고, 끝내는 주문모(周文謨)

김연이 (?~1801)金蓮伊2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율리안나. 일찍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고 이를 신봉하던 중 주문모 (周文謨)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던 홍필주(洪弼周, 필립 보)의 집을 왕래하면서 주 신부에게 영세, 입교하였다. 이후 여성 회장인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궁녀 강경복 (美景福, 수산나) 등과 모임을 갖고 천주교 교리를 공부 하면서 강완숙의 지시로 주

김연이 (?~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