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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교구 신부. 세례명은 바오로. 1921년 5월 평양 관후리에서 조봉윤(요셉)과 곽인숙(아가다)의 3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1933년 3월 평양 성모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진학하였고, 1938년 4월 덕원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45년 12월 27일 임시 주교좌 본당이었던 평양 상수구리 본당에서 홍용호(洪龍浩, 1906~?)
순교자. 세례명은 안드레아. 1825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났고, 1840년대에 경기도 양지(陽智) 언리(彥里, 은이)로 이주하여 농사와 의술로 생활하였다. 그는 1845년에 같은 마을의 이계원(李季元)에게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1849년에는 이계원의 주선으로 서여심(徐汝心) 회장 집에서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에게 고해성사를 받았다.
효(孝) 사상을 바탕으로 생명의 근본인 선조께 끊임없이 감사의 보답을 드리는 유교의 추원 보본(追遠報本)행위. 〔조상 숭배의 바탕인 효〕 조상 숭배의 바탕이 되는 효를 유교에서는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유교에서는 효를 유교의 핵심 사상인 인(仁)을 실현하는 근본으로 여기며, '인간 행위의 기초, 최우선, 모든 덕의 으뜸' 으로 본다. 이 효에 의해 사람됨이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는 교황청의 지침에 대해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과 신자들이 보인 반응과 해결에 대한 문제. 〔조상 제사 금령과 천주교 탄압〕 한국 천주교회 창립 당시의 초기 신자들은 천주 외의 다른 신에 대한 경배와 제사 행위를 미신으로 알고서 배척하였다. 하지만 조상 제사 문제에 대해서는 금지 명령을 제대로 모르고 천주교 신앙과 함께 병행하고 있었
순교자. 세례명은 마태오. 12세에 부모로부터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였고, 서강(西江) 수철리(水鐵里)에 살면서 홍봉주(洪鳳周, 토마스)에게 이끌려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났다. 이후 베르뇌 주교를 세 차례 집으로 모셔와 미사도 드리고 고해성사도 받았으며, 1866년 베르뇌 주교가 사망했을 때에는 최사관(崔士寬, 예로니모), 박순지(朴順之,
순교자. 세례명은 베드로. 동정 부부.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사위이자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의 친척. 1787년 경기도 양근의 양반 집에서 태어났으며, '숙' 은 관명(冠名)이고 '명수' 라고도 불렸다.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하자 부모를 따라 강원도 외가로 피신하여 여러 해 살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의 부모와 조숙이 1801년 이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 한국 성은 조(趙). 1851년 10월 19일에 프랑스의 브와소(Boiseau)에서 신앙심 깊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성직자를 희망하여 낭트(Nante)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거쳐 1875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년 동안 노트르담 데 쿠에(Note-Dame des Couëts) 소신학
플랑드르 악파의 작곡가.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위대한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 '데 프레' 는 간혹 다르게도 표기되며(des Prés, Des-prés), 라틴어로 '요스퀴누스' (Josquinus) 또는 '요도쿠스프라텐시스' (Jodocus pratensis, 풀밭의 요도코)라고도 표기 된다. 〔생 애〕 조스캥은 1440년경 북부 프랑스의 피카르디(Pic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가롤로. 일명 덕철(德喆). 자(字)는 경우(京友). 성녀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의 남편이자 성인 최창흡(崔昌洽, 베드로)의 사위. 강원도 회양(淮陽)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5세때에 모친이 사망하였다. 이후 얼마 안 되던 가산이 탕진되자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으며, 몇 년 후 환속하고 이집 저집 다니며 머슴

순교자. 세례명 미상. 양반 출신으로 서울 도저동(桃楮洞)에 거주하며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등과 교류하였다. 조신행의 입교 과정과 활동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명도회(明道會)의 회원이었다는 점에서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에 열심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남송로(南松老) · 최태산(崔太山) · 손인원(孫仁遠) · 이재신(李在信) 등과 명도회의 6회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세례명은 알퐁소. 한국명은 옥유아(玉裕雅). 1877년 2월 5일 루아르(Loire) 강 하류의 애그르푀이유(d'Aigrefeuille) 면의 가네스통(Geneston)에서 태어났다. 노트르담 데 쿠에(Notre-Dame des Couëts)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수사 학년이 끝날 무렵, 그의 지도자의 의견에 따라 쿠에 신학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세례명은 베드로. 한국 성은 오(吳). 1832년 2월 9일 코트 뒤 노르(Côte du Nord)의 멜리오네(Mellionnec)에서 출생하여 삭발례를 받은 후 1856년 1월 3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57년 12월 19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1858년 3 월 21일 임지인 조선을 향해 출발하였으나
수원교구 소속 본당.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341-9 소재. 1973년 1월 5일 발안 본당에서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관할 구역은 화성시 우정읍 전 지역과 장안면 일부 지역. 〔교 세〕1973년 1,051명, 1979년 1,493명, 1985년 2,121명,1990년 2,512명, 1995년 2,762명, 2001년

순교자. 세례명은 베드로. 경기도 양근의 양반 가정에서 두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의 슬하에서 자랐는데, 아버지 조제동은 가난 때문에 더 이상 고향에 머물 수 없자 두 아들(조용삼 · 조호삼)과 함께 여주로 이주하여 임희영(任喜永)의 집에 얹혀 살았다. 조용삼은 몸이 쇠약하고 외모도 보잘것없었으며, 세상 일에도 어두워 남들의 조

수원교구의 공동 주교좌 본당 중 하나.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675-6 소재. 1976년 11월 19일에 북수동(北水洞) 본당에서 분리 · 설립되었다. 주보는 평화의 모후. 관할 구역은 조원동, 영화동, 송죽동, 정자동. 〔교세〕 1976년 1,889명, 1981년 3,758명, 1988년 7,519명, 1994년 12,665명, 2001년 5,85

교리 교사. 세례명은 요한. 호는 두봉(斗峰). 1892년 6월 24일 충남 서산군 팔봉면 금학리에서 조병학(曹秉學, 요셉)과 유정혜(柳貞惠, 바르바라)의 아들로 출생.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이 발발하자 인천으로 피난하였다가 3년 뒤 합덕으로 이주하였다. 1914년 관립 한성 사범학교를 졸업하여 당진 공립보통학교 훈도로 있다가, 1917년부터 용산 예수
순교자. 세례명 미상. 충청도 홍주 서면 출신으로 부모에게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였다. 모친과 함께 신창 창말로 이주하여 살았으며,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는 가운데 항상 산중으로 들어가 수도(修道)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1864년 여름에는 모친을 여동생에게 맡기고 친구들과 함께 떠나려고 하였으나, 어른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결혼 후 처가에서 살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