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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흉 화복吉凶禍福2

동양 전통의 신앙이나 사상, 인간의 운세, 행위와 점복 (占 卜) 등에서 사용되는 용어의 하나. 길(吉)은 '선하 다. '좋다' , '옳다' 는 의미로, 선비의 말을 따르면 좋은 결과가 온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여기서 선비는 통상 글을 읽는 사람이라기보다 점괘를 읽어내는 사람을 말한다. 물론 나중에는 의리에 밝은 사람, 지식인을 지청하기도 하였다. 흉(凶)

길흉 화복
김 데레사 (1779~1840)金 -2

성인. 축일은 9월 20일.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 종한(金宗漢, 안드레아)의 딸. 김대건(金大建, 안드레 아) 신부의 당고모.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 산리)의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17세 때 교우인 손 연욱(요셉)과 혼인했고, 여러 자녀를 낳아 모두 열심한 신자로 교육시켰다. 1824년 남편이 해미(海美)에서 순 교하자 가난

김 루시아 (1769~1839)金 -2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어려서부터 몸이 불구였던 탓 에 외교인들 사이에서는 '꼽추 할멈' , 교우들 사이에서 는 '꼽추 루시아' 로 불렸다. 서울에서 태어나 신유박해 (辛酉迫害) 이전에 입교했으나, 남편과 가족들이 모두 외교인이라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교우들과 교류를 갖게 되면서 집을 나와 교우들 집에 얹혀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한

김 루시아 (1769~1839)
김 바르바라 (1805~1839)金 -2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일명 '진주의 모친' . 시골 교 우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집이 가난하고 부모와 동생이 열심히 수계하지 않자, 13세 무렵에 홀로 상경하여 교우 집에 식모로 들어갔다. 평소 동정 지키기를 원하였으나 부친이 달래고 강요하여 혼인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아 들과 딸을 낳았지만, 남편이 끝내 외교인으로 죽자 딸을 데리고 신앙 생활을 하

김 바르바라 (1805~1839)
김강이 (1755?~1815)金綱伊2

순교자. 세례명은 시몬. 충청도 서산(瑞山)의 부유한 중인 집안 출신으로, 주문모(周文謨) 신부 입국 전에 입 교하였다. 입교 후 얼마 안되어 동생 김창귀(金昌貴, 타 대오)와 함께 재산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고산(高山)으 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여기에서 박해를 피해 지방 교우 촌을 순방하던 주문모 신부를 만나면서 더욱 믿음이 강 해져 고산 지역에서는 유명

김건순 (1776~1801)金健淳2

한국 천주교 초기의 신자. 세례명 요사팟. 자는 정학 (正學). 호는 가귤(嘉橘) 본관은 안동. 병자호란(丙子胡 亂) 당시에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가 심양(瀋陽)에 볼 모로 끌려갔다 돌아온 김상헌(金尙憲)의 후예. 이구(履 九)의 아들. 서울 출신으로 노론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 서부터 경기도 여주(驪州)에 있던 종가의 양자로 입양되 었고, 9세 때에 이미

김건순 (1776~1801)
김경민 (1902~1950?)金慶旻2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루도비코. 본관은 경주. 1868년 경상남도 울산 장대벌에서 순교한 김종륜(金宗 倫, 루가)의 증손자. 1902년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오산 리 사기막골에서 김홍연(요한)과 콘스탄시아(성명 미상) 의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용산 예수성심신학 교를 졸업하고 1931년 5월 3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 후 수원 본당(현

김경민 (1902~1950?)
김경우 (1916~1978)金慶佑2

부산교구 신부. 세례 명은 알렉시오. 경남 밀 양군 삼랑진읍 미전리 慶南 密陽郡 三浪津邑 美田里)에서 태어났다. 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 學校)를 거쳐 성 유스 티노 신학교를 졸업한 후 1942년 5월 3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해 6월 1일 대구 계산 동(桂山洞) 본당의 보 좌로 사제 생활을 시작 하였고, 1945년 12월 진영(進永) 본당의 제5대 주임

김경우 (1916~1978)
김계룡 (1906~1947)金季龍2

대구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베드로. 경북 영천군 화산 면 용평동(永川郡 花山面 龍坪洞)에서 태어났다. 성 유 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한 후 1932년 5월 21일 드망즈 (Demange, 安世華) 주교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고 진주 본당(현 진주 옥봉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어 이후 12년 동 안 진주 지역의 복음 전파에 주력하였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문제들이

김관택(1909~1974)金觀澤2

전교 회장 · 총회장 · 교육자 · 민족 운동가. 세례명은 요셉. 본관은 전주(全州). 김석원(金錫元)과 이내순(李 廼順, 마리아)의 아들로 평남 강서군 성태면 연 곡리(江西郡 星台面 硯 谷里)에서 출생하였다. 1929년 평양의 광성고 보(光成高普)를 수료하 고, 1932년 성태면 마 산의 효성학교(曉星學 校) 교원으로 임용되었 다. 1937년 교직을 사

김관택(1909~1974)
김광옥(1741~1801)金廣玉2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 안드레아. 충청도 예산(禮山)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출생. 1791년 무렵 내포(內浦)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면장(面長) 직책을 맡아 온 사람으로 본래 거 친 성격을 지녔으나, 입교한 후로는 겸손한 태도를 보이 며 열심히 신앙을 실천하

김교명 (1911~1950?)金敎明2

춘천교구 신부. 세례명은 베네딕도.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6월 24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풍수원 본당 보좌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강제 추방당한 후 노기 남(盧基南, 바오로) 서 울교구장 겸 임시 춘천 감목에 의해 신부 부족 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 던 평양교구로 1942년 5월 파견되었다. 이후 평양

김교명 (1911~1950?)
김교신 (1901~1945)金敎臣2

한국의 무교회(無敎會) 기독교 운동의 창도자 중 한 사람. 조선 초 함흥차사 박순(朴淳)과 함께 함흥에 갔다 가 요행히 죽음을 면하고 그 근처에 정착하게 되었던 김 덕재(金德載)의 후손. 1901년 4월 18일 함경남도 함흥 사포리에서 김염희(金念熙)와 양신(楊愼)의 장남으로 태어나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도일, 동경고등사범학 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박물

김교신 (1901~1945)
김구정 (1898~1984)金九鼎2

한국 천주교회사가. 세례명은 이냐시오. 본관은 김해 (金海). 호는 지원(志園). 필명은 달성산인(達城山人). 김상연(金湘連, 바오로)의 셋째 아들로 대구시 신암동 715번지에서 태어났다. 1892년 신암동 공소를 설립한 아버지로부터 신앙의 지평을 넓혀갔고, 대구 지방의 민 족 운동과 노동 운동에 헌신했던 큰형 김하정(金夏鼎, 루가)으로부터 민족과 가난한

김구정 (1898~1984)
김귀동 (?~1802)金貴同2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의 순교자. 전라도 고산(高山) 출신으로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살았다. 그 후 천주교 를 자유롭게 신봉하기 위해 1801년 2월 초(음) 배론(舟 論, 현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 산중으로 들어가 옹기점 을 운영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2월 그믐,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이 신유박해를 피해 김한빈(金 漢彬, 베드로

김기봉 (1914~1967)金基奉2

부산교구 신부. 세례 명은 필립보. 본관은 연 안(延安). 신앙을 버리 라는 형제들을 피하여 황해도에서 내려와 김 제 수류(金堤 水流)에 정착한 김종서(金鍾瑞 혹은 成九, 시몬)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1914 년 8월 30일 태어났다. 8세에 진안 한들(大坪, 鎮安郡 馬靈面 延章里)로 이주하였고, 12세에 형 김기운(金基運, 토마 스)의 권유로 성 유스

김기봉 (1914~1967)
김기호 (1824 ~ 1903)金起浩2

구한말의 천주교 전 교 회장이요 교리서 저 술가. 명도회(明道會) 의 도회장(都會長, 총회 장). 세례명은 요한. 본 관은 김해(金海). 황해 도 수안군 무송동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글공 부에 힘써 15세 때 향 시(鄕試)에 합격하였 다. 이 무렵부터 인생 문제에 대하여 고민을 하였으며 한때 경향(京 鄕)의 유명 인사를 찾 아 교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김기호 (1824 ~ 1903)
김낙호 (1866~1951)金樂浩2

천주교인. 천주가사 (自身歌)의 저자. 세 례명은 야고보. 본관은 예안. 김휘중(金輝重, 요셉) 신부 의 부친. 그의 집안은 경상도 예천 출신인 조부 김 안토 니오 때 천주교에 입교하였으며, 그가 신앙 생활을 위해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현 배론 성지가 있는 지역) 인근 으로 이주하면서 이곳에 정착하였다. 김낙호가 태어난 곳도 이곳 구학리의 꽃담(일명

김남수 (1922~ )金南洙2

제2대 수원교구장. 주교. 세례명은 안젤로. 1922년 만주 간도성 연길현 다조구 대령동(間島省 延吉縣 茶條溝 大領洞)에서 출생. 14세 때 수원에 살던 형을 찾아가 그곳에서 수원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덕원(德源) 신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10월 17일 연길교구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옥에 갇혀 있던 연길교구장 브레허(Breher, 白化東) 주

김남수 (1922~ )
김노사 (1784~1839)金老沙2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로사. 일명 '전의 감골집' .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과부가 된 후 천주교 에 입교하였다. 이때부터 모친과 동생들을 돌보며 열심 히 수계하기 시작하였고, 선교사들이 입국하자 자주 성 사를 받고 때로는 음식도 마련해 주었다. 이로 인해 1839년 1월 16일(음 1938년 12월 2일) 권득인(權得仁, 베드로) 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