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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홍 (1874~1945)金洋洪2

전주교구 초대 교구장. 신부. 세례명 스데파노. 본관 광산. 구교우 가정의 자손인 김덕련(金德練, 루가)과 김 세실리아의 3남 중 차남으로 전북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 만석동에서 태어났다. 1888년 9월 6일 예수성심신학교 에 입학, 삭발례 · 수문품 · 강경품 · 구마품 · 시종품을 거쳐 1900년 5월 10일에 부제품을 받고, 그 해 9월 22 일 사제

김양홍 (1874~1945)
김업이 (1774~1839)金業伊2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막달레나. 당시의 교우들 사이에서는 '복이의 누이' 라고 불렸다. 어려서부 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항상 독실한 신앙 생활 을 하면서 수정(守貞)을 원했으나, 모친의 반대로 교우 청년과 혼인하였다가 중년에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노모가 성격이 괴팍하여 여러 가지 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극진

김업이 (1774~1839)
김여삼 金汝三(?~?)2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의 배교자요 밀고자. 충청도에서 태어나 형제가 모두 입교한 뒤 박해를 피해 서울로 이주하였으나, 그만은 형제들의 충고에도 불구하 고 냉담하면서 불량배들과 어울려 무절제하게 생활하였 다. 그러던 중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가난했던 그는 같은 고향 출신인 교우 이안정(李安正) 등을 위협하여 재물을 갈취하였고, 끝내는 주문모(周文謨)

김연이 (?~1801)金蓮伊2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율리안나. 일찍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고 이를 신봉하던 중 주문모 (周文謨)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던 홍필주(洪弼周, 필립 보)의 집을 왕래하면서 주 신부에게 영세, 입교하였다. 이후 여성 회장인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궁녀 강경복 (美景福, 수산나) 등과 모임을 갖고 천주교 교리를 공부 하면서 강완숙의 지시로 주

김연이 (?~1801)
김영구 (1902~1984)金榮九2

전주교구 신부. 세례명은 베드로. 1902년 2월 4일 전 북 수류(水流)에서 출생하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 하고, 1929년 5월 25일 휴양 중인 드망즈(Demange, 安 世華) 주교를 대신하여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화산(華山) 본당 보좌 신부 (1929. 5), 군산 본당 주임 신부(1931. 1. 1

김영구 (1902~1984)
김영근 (1894~1971)金永根2

수원교구 신부. 세례명은 베드로. 본관은 광산(光山). 1894년 6월 10일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은이 마 을에서 김낙현(金洛鉉)과 밀양 박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5월 20 일 사제로 서품되어 갓등이(현 왕림) 본당 보좌 신부로 사 제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 1925년 6월 진위(振威) 본 당(19

김영근 (1894~1971)
김영렬 (?~1931)金英烈2

간도 지방 최초의 천주교 신자. 세례명은 요한. 함경북 도 온성(穩城) 출신.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 향시에 합 격했으나 회의를 느끼고 오직 진리 탐구에만 전념하다가 1800년대 후반에 집안을 따라 간도(間島)의 호천개〔湖 泉浦〕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1892년 이곳으로 이주해 온 김이기(金以器)를 스승으로 모신 뒤부터 동학을 공부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김영렬 (?~1931)
김영식 金永植(1909~1963)2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베드로. 본관은 김해(金 海). 1909년 5월 17일 충남 덕산 한티골에서 구교 집안 의 막내로 출생하였다. 성신대학을 졸업하고 1937년 2 월 2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난로용 장작을 패다가 오른 쪽 손가락 마디를 잘렸으나 교황청의 특별 허락을 받아 사제품을 받을 수 있었다. 경기도 평택 본당에서 사제 생 활을 시작하였고,

김영식 金永植(1909~1963)
김영일 (1919~1993)金永鎰2

전주교구 신부.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1919년 3월 25일 김제군 금산면 화율리(禾栗里)에서 태어나 성신대 학을 졸업한 후 1947년 10월 28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태인(현 신태인) 본당 주임(1947. 11~1954. 5)으로 사제 생 활을 시작하였고, 1954년 5월 정읍 본당으로 부임하여 현재의 성당인 연와조 120평의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

김영제 金永濟(1896~1966)2

부산교구 신부. 세례명은 요한. 1896년 7월 18일 언 양에서 태어나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9월 23일 대구교구 신부로 서품되었다. 계산동 본당 보 좌 신부로 사제 생활을 시작하였고, 1931년 5월 10일 경남 문산 본당 주임 신부로 전임되어 현재의 성당 · 사 제관 · 성모당 · 수녀원을 신축하고(1932.5.29) 진주 지방 제

김영태 (1915~1977)金永泰2

전주교구 신부. 세례명은 도미니코. 1915년 10월 3일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나,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 한 후 1942년 5월 3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후 수청 (水淸, 현 고산)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기존의 공소 건물을 성당으로 활용하며 사목하였고, 1944년에 는 주임 신부의 공석으로 폐지된 되재〔升時〕 본당 구역 까지 관할하였다.

김영태 (1915~1977)
김영호 (1912~1978)金永浩2

대구대교구 신부. 세 례명은 멜키올. 발행인. 사장. 1912 년 6월 4일 부산시 청 학동에서 김진오(빈천 시오)와 박복순(루치 아)의 아들로 태어났 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 를 졸업하고 1938년 6 월 11일 사제로 서품되 었다. 다음날 익산군 화 산(현 나바위) 본당 신부 를 시작으로, 익산군 석 동 본당(1939. 5. 15) 밀양 본당(194

김영호 (1912~1978)
김옥균 (1925~ )金玉均2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 세례명은 바오로. 1925년 12 월 9일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內四面 南谷里)에 서 태어났다. 가톨릭대학 철학과를 수료하고, 1954년 프랑스 릴 가톨릭대학 신학과를 졸업한 후 그 해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동대학 대학원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다시 신문학과를 수료한 뒤 1959년 귀국하였다. 이후 김 신부는 가톨릭

김옥균 (1925~ )
김옥윤 (1905~1984)金玉允2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장. 세례명은 세자 요한. 1905 년 2월 7일 경기도 화성군 장안리에서 김종환(金鍾煥, 안드레아)과 김익화(마리아)의 독자로 태어났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927년 경성전기전문학교를 고학(苦學)으로 졸업하고 경성전기주식회사에 입사하여 8 · 15 해방 때 까지 근무하였다. 1946

김옥윤 (1905~1984)
김용배 (1937~1988)金容培2

광주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안드레아. 1937년 10월 29일 목포시 산정동 87번지에서 태어났다. 성신대학을 졸업하고 1962년 1월 3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광 주 남동 본당(1962. 2) , 육군 군종 신부(1964), 광주 남동 본당(1968. 10), 나주 본당 및 서귀포 본당(1969. 1) 보좌 신부를 거쳐, 장성 본당(1969.9),

김원영 (1869~1936)金元永2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1869년 5 월 18일 충청도 공주의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다. 1882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페낭(Penang) 신학교에 유 학하였으나, 그곳 기후가 한국인들에게 적합하지 않아 1892년 귀국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편입하였다. 1899년 3월 18일 종현 (현 명동) 성당에서 뮈텔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 품을

김원영 (1869~1936)
김유룡 (1892~1972)金裕龍2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필립보. 본관은 청풍(淸 風). 경기도 행주에서 김영식(金永植)의 아들로 태어나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9월 18일 종 현(현 명동) 성당에서 뮈텔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 다. 풍수원 본당 보좌 신부로 사제 생활을 시작하여 풍수 원 본당 관할 구역 중 춘천 지방을 분할받아 곰실(현 춘성 군 동내면 고은리)에

김유룡 (1892~1972)
김유리대 (1784~1839)金琉璃代2

성인. 축일은 9월 20일. 동정녀. 세례명은 율리엣다. 지방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따라 상경하 였다. 17세 때 혼담이 있었으나 동정을 결심, 부모의 결 혼 강요를 뿌리치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전부 뽑아 혼담 을 중지시켰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를 겪은 뒤 부모가 냉담하여 고향으로 내려가자 홀로 서울에 남아 있다가 궁녀로 뽑혔다. 이

김유리대 (1784~1839)
김유산(1760~1801)金有山2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토마. 충 남 보령(保寧)의 역촌(驛村)에서 천민으로 출생. 한때 승려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 자가)의 권유로 입교한 뒤 교우들에게 교회 소식을 전해 주는 역할을 하였고, 1798년과 1799년 두 차례에 걸쳐 역졸 신분으로 북경을 왕래하면서 중국 교회와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다. 1801

김유재 (1925~1984)金有宰2

부산교구 신부. 세례명은 그레고리오. 본관은 경주(慶 州). 1925년 12월 17일 경남 진양군 문산면 상문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문산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동성상업 학교를 거쳐 성신대학을 졸업하고 1953년 4월 11일 사 제로 서품되었다. 상주(현 상주 서문동) 본당 사제 생활을 시작하였고, 1954년 11월 30일 부산 청학동 본당으로 전임되어 성

김유재 (1925~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