ㅊ · 총 229건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요한. 1912년 10월 3일 전북 진안에서 출생하였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 3월에 중등과, 1929년 7월에 전문부 외국어과, 1931년 7월에 철학과, 1935년 6월에 신학과를 이수한 후 1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즉시 김제(현 요촌) 본당에서 보좌 신부로 사목

최양업 신부에 이은 두 번째 한국인 신학생.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양화진에서 순교한 최수(崔燧, 베드로)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최형(崔炯, 베드로) 성인의 아우. 충청도 홍주에서 최인호(崔仁浩, 야고보)와 황 안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경기도 남양으로 이주해 살다가 1836년 초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이어
덕원 면속구 출신 신부. 세례명은 마티아. 1908년 출생. 덕원 신학교에 입학하여 초대 연길 대목구장 브레허(T. Breher, 白化東) 주교로부터 연길 소속 신학생으로 부제품을 받았다. 이어 1938년 4월 초에 사제 서품을 받고 원산에서 첫 미사를 드렸다. 본래는 3월 21일에 임화길(林和吉, 안드레아), 김보용(金寶容, 루도비코) 신부가 서품될 때

대구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요한. 1919년3월 10일 강원도 원성군 신림면 용암리 749번지에서 최영철(요셉)과 이재유(아가타)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43년 4월에 소신학교인 남대문상업고등학교 을조를, 1945년 3월에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1952년 9월 25일에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순교자. 세례명은 바오로. 순교자 최국신(베드로)의 아들로, 중인의 자손이다. 태중 교우인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천주교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고, 몇 년간 정의 배(丁義培, 마르코) 회장 집에서 일반 글과 교리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면서 최봉인도 1868년 가을에 체포되어 20여 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을해박해(乙亥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아명은 '진강' . 일명 '여옥' . 1815~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과 구(최)성열(具性悅, 바르바라) 부부의 사위. 충청도 홍주 다래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앙 생활을 하였으며, 한때는 공주 무성산으로 이주하
순교자. 세례명은 예로니모. 서울 황교(黃橋)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접하였으며, 장성해서는 동촌(東村) 이 판서 집의 여종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면서 체포되었고, 석방된 후에는 교우 과부와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그는 기해박해 후에도 신앙 생활을 계속하였고, 페레올(J.J. Ferr
평양교구 강계 본당의 회장.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일명 자백(慈伯). 1907년 경북 대구에서 최경집(崔景集, 빈천시오)과 이봉조(李奉祚, 마리아)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東京)의 죠치 대학(上智大學) 예과 2년(철학 전공)을 수료하였다. 귀국 후 평양의 성모보통학교 교사로 부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시몬. 1915년 7월 11일에 인천에서 태어났으며, 소신학교인 남대문상업학교 을조를 거쳐 1943년 12월 5일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종현(현 명동) 성당에서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백동(현 혜화동) 본당 보좌로 첫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고, 1944년 11월에 종현 본당 보좌로 전

순교자. 세례명은 요한. 일명 지혁(智嚇).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8~9세경에 부친에게 교리와 기도문을 배워 입교하였고, 1846~1847년경 다블뤼(M.N.A. Daveluy, 安敦伊)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홍주에 살던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발생하였는데, 이때 아내와 6남매가 체포되었다가 뒤에 순교하였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그는 1866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 황해도 안악 출신으로 12세 때 부친을 따라 상경하였으며, 혼인한 뒤 과부가 되어 실 장수로 생활하다가 1800년 3월경 왕십리에 거주하는 한 과부에게 교리를 배웠다. 이후 신자 김의호(金義浩)의 집으로 옮겨 살면서 송재기(宋再紀)의 가족과 교류하는 등 열심히 신앙을 실천하였고, 1801년의 신유박해 초기에는 송
을해박해(乙亥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바르바라. 본래의 성은 ''최' 가 아니라 '구' (具), 즉 원래 이름은 '구성열' 이다. 일명 '서 과부' . 1815년의 순교자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의 아내이며,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의 장모. 충청도 홍주의 한내장벌(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출신으로,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이전에 천주교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 충청도 내포 출신으로 구교우집에서 태어났다. 고향을 떠나 여러 곳에서 살다가 안성에서 병인박해(丙寅迫害)를 당한 그는 박해를 피해 다시 다른 지방으로 옮겨갔지만, 1868년 8월(음)에 장남과 함께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어 8월 13일(음)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의 차남인 최 요한과 3남도 1878년 천안에서 공주 포교에게 체
성인 최형(崔炯, 베드로)의 형. 세례명은 베드로. 최인호(崔仁浩, 야고보)와 황 안나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날 당시 서울 서대문 밖 고마청동(雇馬廳洞)에 거주하였다. 최수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며, 1866년 9월(음) 임태수(林泰洙)의 '서양 배가 조선에 나온다는 말을 최수에게 들었고, 이에 돈을 모아 천
순교자. 세례명은 수산나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11세에 부모에게 성호경을 배웠으며, 16세에 조성노(趙成老, 마태오)와 결혼하였다. 서강(西江) 수철리(水鐵里)에 살며 시고모에게 성모경 · 천주경 등을 배웠고, 1858년경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주교에게 세례와 고해성사를 받았다. 이후 경기도 부평 마오장리(馬五長里)로 이사하여 살다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며 두 번째 사제. 세례명은 토마스. 본관은 경주(慶州). 아명은 정구(鼎九).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순교자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의 장남. 1836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었고, 마카오와 북만주의 소팔가자(小八家子, 현 길림성 장춘시) 등지에서 공부한 뒤 1849년 상해에서 사제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마티아. 전라도 무장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결혼한 뒤 처가가 있던 한산에서 내포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을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이후 무장으로 돌아온 그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면서 이웃에 복음을 전파하

순교자. 세례명은 필립보. 본관은 강릉(江陵).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체포되어 흥해로 유배되었던 최해두(崔海斗)의 장남이요, 1839년 10월경 포도청에서 물고(物故)된 최병문(崔秉文, 야고보)의 형. 서울 전동에 살던 양반의 자손으로, 일찍이 조부 최창은(崔昌殷)과 부친 최해두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어릴 때부터 신앙 안에서 자라게 되
대구대교구 보좌 주교. 세례명은 요한. 1942년 3월 23일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혜륜현의 한인 교우촌인 선목촌에서 최석암(비오)과 김정식(막시마)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1960년 3월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61년 4월 가톨릭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여 1970년 7월에 졸업하였다. 같은 해 11월 6일 대구의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서정길(徐

순교자. 성녀.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바르바라. 교회 밀사로 활동하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순교한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성인의 아내요, 성 최창흡(崔昌洽, 베드로)과 성녀 손소벽(孫小碧, 막달레나)의 딸. 서울의 중인(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한 부모에게 교리를 배워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의 부모는 한때 냉담 생활을

